원의 눈쌀에 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별과 연이 있는 본궁으로 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멀리 떨어져 눈 앞에 사리지자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홍 역시 모습을 들어냈고, 원의 모습에 겁을 내던 성과 란은 제빨리 홍의 뒤에 숨어버렸다.
"야야, 원아. 애들이 놀라잖아. 그 독한 표정 좀 풀어라. 환이형님 동복은 난데 지금 하는 짓을 보면 네가 동복 같다?"
원은 홍의 말을 듣지도 않은체, 환에게 말했다.
"어디로 도망갔다 했더니 여기 있었어요? 형님은 목숨이 몇개라도 됩니까? 그렇게 수명을 단축 시키고 싶어요?"
"에이,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운이형님이랑 있던게 뭐 그리..."
"별이누님 눈 밖에 날까봐 그럽니다!"
이번에 여왕으로 계승식을 갖는 별은 평소에도 운을 좋아하지 않았다. 꾸준히 운을 궁으로 들일려는 연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 별이라는 것을 궁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별이 이번에 군사정변을 일으켜 강제로 왕에게 강제계승을 받았다. 지금 별의 권력은 거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별과 동복인 혁이를 제외한 황자들이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것은 바로 별의 정변을 도왔던 연이었다.
"난 형님이 잘못되는 것도 싫고, 그걸로 인해 연이형님이 위험해 지는 것도 무섭습니다."
황자에 대한 결단을 내릴때, 연이 황자들을 대표해서 말했었다. 피비릿내 나는 왕실 혈육전을 벌이는 일이 없게 하겠노라고. 이 황자들 중 단 한명이라도 별이누님의 자리를 노린다면 제자신의 목을 내놓겠느라고 모든이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렇게 황자들은 연이의 목숨을 건 맹세로 살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홍 역시 조용히 원의 말에 동조 했다.
"솔직히 나도 그건 동의해. 연이형님이 없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연은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로 경계심을 가지지 않고, 정말 형제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신이 황세자 자리에 앉아 막강한 힘을 쥐고 그들을 단단히 붙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 그런데 만약 운이형님이 정말 연이형님에게 해가 가는 인물이고, 그로 인해 연이형님의 신변에 누가 생긴다면, 그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낫가림을 떠나서 절대 친해지면 안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연이형님에게 미안하다고. 우리가 그 형님이랑 친해지면."
"..."
"제발 정신 좀 차려 형."
홍은 단호하게 말했고, 환은 약간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일단 연이형님이 왜 운이형님을 자꾸 데리고 오고자 했는지, 정말 애착인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그리고 별이누님이 무슨 연유로 운이형님을 데리고 오는 것을 허락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확신을 하고 나서 움직이는게 좋을거 같아. 뭐 솔직히 난 아직 운이형님이 무섭기도 하고."
"..."
그것을 보고 있던 혁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조용하고 뼈가 있는 목소리로.
"저는 그냥 저주받은 왕실 혈육은 궁에서 멀리 기거해야 한다는 법칙만 따랐으면 좋겠네요. 신하들도 그것 때문에 아마 난리가 났을 듯 하니..."
그들의 살벌한 대화에, 성과 란은 그자리에 주저 앉아서 펑펑 울어버렸고, 그제야 그들의 말싸움은 끝이 난듯 했다.
***
운이 본궁에 와, 별과 연이 있는 응접실의 문을 열려는 그때, 안에서 낫선 타인의 소리가 들렸다.
"전하! 거두어 주시옵소서!"
아마, 신하 중 한명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운황자는 전하를 지키는 방패가 아닌, 전하를 겨누는 검이 될 것이옵니다. 서둘러 다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신하들은 운을 반대하고 있었다. 예로 부터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생긴 황족은 왕실에 불운을 가져다 준다고 말했다. 때문에 얼굴에 흉이남은 왕의 혈육은 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을 은연중 법으로 두고 있었다. 운은 조용히 자신의 가면을 만지작 거렸다.
쾅!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참 말 거슬리게 하신다... 칼이니 방패니... 인간을 왜 물건에 비유하나요? 배도 다르고, 나이도 같지만... 엄연히 내 동생인데.. 엄연히 다른 계급인데... 너무 겁이 없으시네."
"저하...그런 뜻이 아니오라."
"불운의 아이... 하. 그 옛날 법도에는 여왕도 오르면 안된다고 되어 있던데, 그럼 우리 별이 누님의 계승도 반대하는 것이라 보아도 되겠습니까?"
연의 옹호가, 운은 참 거북했다. 자신을 제일 싫어하고 몰아 붙여야 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다. 보호하려들고 편을 든다. 운은 그것이 가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별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말거라. 운에게 따로 맏길 일이 있어서 부른 것 뿐이다. 일만 빨리 끝내면 즉시 돌려보낼 것이다."
"..."
운은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난뒤, 문이 열리면서 신하가 나왔다. 그 신하는 문 앞에 운이 서 있던 것을 보고 놀라 주저 앉을 법 했고, 그 모습이 제법 우스워 연은 까르르 웃어 넘겼다. 운은 아무말 없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엇입니까? 제게 맞길 것이?"
"..."
"하루 빨리 거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빨리 사라져 드리지요."
운은 정말이지 이 궁이라는 곳이 지긋지긋하게 싫다.
별의 누님 이미지는 대충 이런...
"..."
별과 운은 약 23년만에 만남이었다. 운이 궁을 나갈때, 별의 나이는 열살이었고, 운이 나가 있는 동안 별은 한번도 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솔직히 운은 별의 얼굴 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 어렸을때 얼굴이 전혀 남아 있지 않구나. 정말 못생겨 졌어."
별은 굉장히 묘한 인상의 이미지였다. 눈매는 고양이 같아 운을 닮았지만 풍기는 기세는 연과 닮거나 그보다 거대해 보였다. 압도감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갖춘 아름다운 연인. 그런 그녀가 운에게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고 있던 것이다. 그에 운은 조용히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
그렇게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어색해졌다기 보단 조용한 맹수들의 서열 싸움 같았다. 본능적으로 눌리지 않으려는 운과 그를 제압하려는 별. 그들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이긴 하겠지만,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고 연은 생각했다.
"별이 누님이 정변을 일으켰을때, 아니아니 솔직히 말하면 정변이 아니지."
결국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연이었다.
"누군가 먼저 누님의 암살을 시도했어. 일부 권력층들이 가담하여 별이 누님과 나를 없앨려고 했지. 그리고 말도 안되는 일을 허락한 사람이 우리 선왕님이셨지."
여자인 주제에 선대왕들 누구보다 왕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점쳐지는 별. 그녀는 사사건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관습들과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그것은 서서히 왕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신하들에게 이끌려 나약해진 왕은 별을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위험한 자라고 고하는 간신들의 말에 현옥되어 별의 숙청을 명했다. 그것을 눈치챈 별과 연이 먼저 왕을 치지 않았으면 아마 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것 이라...
"근데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일어난 정변이라 뒷처리가 부족했어. 도망간 반역자들을 모두 찾지 못했으니까."
"..."
운은 차분하여 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연은 운을 보며 끝까지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사이 뒤통수를 치려고 해. 그래서 현제 나를 포함한 황실의 모든 사람들이 계승식 준비로 바쁘다고 소문을 내놨어. 우리는 지금 알려지지 않은 왕실 사람이 필요해."
"...필요할 때만 왕실 사람이군."
"원래 세상이 그런 거잖아?"
불만이 가득한 운을 향해, 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간단해. 아직 남아있는 반역자들을 찾아줘. 그럼 계승식이 끝나자마자 돌려보내줄게."
***
한밤중, 연은 자신의 궁 정좌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순간 바시럭 거리는 소리에 연은 바로 칼을 꺼냈다.
"자, 잠시만! 나예요. 환!"
"..."
"어떻게 운이형님이나 연이형님이나 소리만 나면 칼을 들이되요?! 너무해!"
"그런 기척으로 온 너가 잘못한거야."
"헐..."
환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연의 옆에 털석 주저앉았다. 연은 제법 술에 취해 있었지만 정신은 잃지 않았다. 연은 한번도 다른 이들 앞에서 온전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완벽한, 환에겐 우상 같은 존재. 그래서 처음 그런 연이, 누구보다 이성적인 그가 그런 말도 안되는 복수를 했다는 말을 믿지 못했다. 그만큼 운을 싫어했던 것일까? 하지만 운을 데리고 오기 위해 몇년동안 애쓴 것을 보면 마냥 그렇게 해석하기도 힘들었다.
"나 지금 형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운이형님에 대해 묻고 싶은 것도 수두룩하고, 별이 누님이 운이형님을 왜 싫어 하는 지도 물어보고 싶고... 근데 사형, 다른거 다 재체두고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내가 운이형님을 어떻게 해야되는 지말 알려주면..."
"난 내 아우들을 내말만 따르는 인형으로 키우지 않았는데?"
연의 날카로운 말에 환은 작게 움찔 했다. 환은 혼자 있을때, 연을 사형이라 불렀다. 단순한 혈육을 넘어 연 그자체를 존경하는 의미였다. 어렸을때, 연이 환을 구해준 뒤부터 환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연을 따랐다. 그것이 마치 어머니를 따르는 오리같아 종종 동생들에게 놀림거리가 되도, 환은 연이 좋았다. 하지만 연은 그런 환이 종종 걱정스러웠다.
"우리 밉상쟁이였던 꼬마아이. 제법 많이 컸어.우리 환이는 어머니 손보다 내 손을 더 많이 탔지?"
믿기 어렵겠지만, 이렇게 순수한 환은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왕실에서 알아주는 망나니로 통했다. 황자라는 이유로, 외가가 막강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말릴수 없던 그를 유일하게 미칠듯히 혼낸 사람이 연이었다. 거의 짐승을 인간으로 만들어줬다는 소리를 들을정돌, 환의 변화는 거의 개혁적이었다. 이런 이유를 들면 어쩌면 환이 연을 따르는 건 당연한 걸지고 모른다.
"사형은 운이형님이 싫습니까?"
"그게 중요해?"
환은 크게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연은 그것이 왜 중요한지 물었다. 그리고 연이형님을 좋아해서 그렇다는 말에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운이를 싫어하던 좋아하건, 그건 너의 감정이랑 상관이 없는 거야. 왜 내 감정이 너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니? 그냥 솔직하면 되는 거지."
"...그럼, 내가 운이형님이랑 친하게 지내서 나를 멀리할거 아니지요?"
그 말에, 연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미워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