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회사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잔업을 하느라 한창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추적추적 비오는 늦은 저녁,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안경을 벗고 노트북을 덮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누가 온단 말인가.
“하아아아… 안녕.”
대문을 열었을 때, 나는 오초 간 멍하니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뜻밖의 손님이었기 때문이었다. 흠뻑 비에 젖어 생쥐 꼴을 하고 있는 소년. 보얀 김이 피어오르는 어깨와 창백하게 질려있는 흰 얼굴. 검푸른 피딱지가 입술 옆에 아스라이 맺혀있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 소년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사라진 것 같은 그 찰나,
똑.
또옥.
하고 소년의 소매 끝자락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깜작깜작 눈을 뜨며 살펴보니 소년이 흐릿하게 웃었다. 도발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표정이었다. 삵, 소년에게서 삵이 떠올랐다. 야생 고양이라고도 불리는 살쾡이가 요염하게 꼬리를 흔드는 것만 같았다. 당황했지만 곧 연륜의 힘으로 침착함을 되찾고 손짓했다. 일단은 들어오라고. 소년은 서있는 단순한 행동조차 힘에 부처 보였다.
“고마…ㅇ…….”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소년이 내 품으로 쓰러졌다. 차가운 몸이었지만 어딘가 따듯한 온기가 전해졌다. 막 알을 까고 세상에 나온 병아리처럼 소년은 따스하고 불안정했다. 자칫하다간 모래성처럼 와르르 부서질 것 같은 아이. 비로소, 나는 소년이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ㅡ섹스 파트너
며칠 전에 갔던 게이바에서 만난 소년이었다.
[피코] Rainy Day
w.검백
서둘러 이마를 짚자 후끈후끈한 열기가 만져졌다. 지독한 몸살감기임에 틀림없었다. 더는 지체 할 수가 없어 나는 우선 소년을 안고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점,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바깥 날씨를 버티기엔 터무니없이 얇은 옷가지였다. 그것만 해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나체의 소년의 몸을 본 뒤로는 기분이 더 험악해졌다. 하얀 피부에 열 손가락으로 세기도 힘든 피멍이 울긋불긋 번져있었던 것이다. 계단에서 구르는 정도로 생길 상처들이 아니었다. 필시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한 증거였다.
“후우. 웬 살쾡이 같은 녀석이 들어와서는.”
상처가 눌리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며 온수로 몸을 씻겼다. 얼마나 지쳤던 건지 샤워 내내 소년은 눈 한번 뜨지 않는다. 혹여나 내가 시체를 씻기는 건 아니가싶어 몇 번이나 소년의 코에 손을 댄 채 숨을 확인했다.
샤워가 끝나자 타월로 꼼꼼히 물기를 닦아준 뒤 반창고와 마데카솔로 급하게나마 응급처치를 했다. 괴발개발로 잘린 거즈 때문에 꼴이 퍽 볼만했다. 셔츠는 불편할 것 같아 잠옷을 입혔는데 손, 발이 한참이나 남아서 몇 번이고 접어줬다. 허리는 고무줄이라 어떻게 간신히 맞았지만.
“열이 아직도 안 내렸네.”
펄펄 끓는 이마 위는 달걀이라도 탁 깨면 후라이가 될 정도였다. 최근 몇 년 간 감기에 걸려 본 적이 없어 한참이나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해열제를 찾아냈다. 약품에도 유통기한이 있던가. 개봉은 안했으니 괜찮을 거다. 구태여 주전자로 물을 데웠다. 잠이 든 소년에게 약을 먹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르고 달래서 겨우 손톱만한 약을 삼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렇게 일을 끝마치니 어느덧 자정이 훌쩍 지나있는 시간이었다. 환자를 내쫓을 수는 없으니 이불을 들고 소파로 나왔다. 눕고 나서도 실감이 나지 않아 허허 웃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32세 표지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속담을 처음으로 실감한 날이었다.
***
“으음.”
커튼을 치지 않은 탓에 햇빛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파도처럼 빛은 나의 가랑이와 사타구니 구석구석을 스며들더니 굳게 닫힌 내 눈두덩이도 톡톡 건드린다.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비척비척 얼굴까지 이불을 덮고 한숨 푹 자려던 나는 불현듯 어제 밤일을 떠올렸다. 살쾡이, 섹스파트너, 소년. 졸음이 싹 달아났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섰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조심스레 방문을 여니 세상모르게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소년이 보인다. 고르게 올라갔다 내려가는 가슴팍. 아기 새 같은 소년 덕분에 절로 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다행히 열은 밤새 내렸나 보다. 편안하게 잠든 소년의 얼굴이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콕, 볼을 찔렀다. 푸딩을 눌러도 이렇게 말랑말랑하지는 않으리라.
방문을 닫고 나와 잠에서 깬 소년의 허기를 달래 줄 아침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인스턴트로 매 식기를 때웠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요리된 요리를 한다싶다. 버터를 두르고 채소와 밥을 약불로 볶았다. 냉동고에 남은 달걀을 모조리 꺼내 풀어 부쳤다. 케첩이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
잠시 후에 소년이 방문을 열고 등장했다. 고소한 냄새를 맡고 깬 듯 소년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프라이팬을 쳐다보고 있었다.
“배고프지? 거기 앉아있어. 금방 될 테니까.”
목소리가 잠겼는지 소년은 말 대신 고개만 끄덕이고 식탁에 앉았다. 꽃무늬가 있는 예쁜 접시를 찾아 오므라이스를 담았다. 케첩으로 무슨 글씨를 써줄까 하다가 살쾡이를 그렸다. 허접한 내 그림 솜씨는 개인지, 고양이인지, 곰인지 통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잘 먹겠습니다.”
수저를 들기 전 소년이 말했다.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흘깃 눈으로만 쳐다본 뒤, 잘 먹어라, 라고 대답해줬다. 시장했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년은 허겁지겁 들이켰다.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며칠은 굶은 거지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체할라. 물 도 좀 마시면서 먹어.”
입 안 가득 밥을 오물거린 채로 끄덕였지만 끝내 소년은 한 그릇 비울 때까지 물에는 손도 뻗지 않았다. 겨우 내가 반 공기를 비웠을 때 소년은 싹싹 깨끗하게 해치우고 눈을 깜작이고 있었다.
“더 먹을래?”
끄덕끄덕. 말하진 않았어도 소년의 눈빛은 여전히 잔뜩 굶주려있었다. 프라이팬에 남았던 밥을 모조리 담아서 내밀었다. 위에 먹을 것이 좀 찼는지 소년은 아까와 달리 여유롭게 수저질을 했다. 대화가 끊긴 탓에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공기를 울린다.
소년에게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다. 왜 비를 맞았던 거니, 몸의 상처는 어떻게 된 거니, 우리 집에는 왜 찾아온 거니. 허나 그 나이 때는 호르몬 변화가 워낙 들쑥날쑥이라 감정기복이 조수간만의 차보다도 심할 터였다. 예민한 소년을 일부러 건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의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소년이 곤란을 겪는다면 그것만큼 미안한 일도 없을 거다. 당장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곤한 몸을 추스를 집과 배를 채워줄 약간의 요깃거리 그리고 배려였다.
“나, 우지호라고 해.”
밥을 다 먹자 소년이 대뜸 선언했다. 식후라 기름이 반지르르하게 묻어있는 소년의 입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소년은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지훈.”
통성명이라도 하자는 건가. 내게는 별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소년에게는 이름이 아주 중요한 것 인듯 싶었다. 지훈……. 소년은 내 이름을 소리 내 발음해 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풀어야 할 일들이 첩첩산중이었다. 까마득한 기분으로 빈 접시만 내려다보는데 소년, 지호가 부탁했다.
“아저씨 나… 당분간 여기에서 살면 안 돼?”
너무도 갑작스럽게.
***
‘같이 살자고?’
물론 나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두 개라 그리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문제라면 나보다는 지호 쪽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테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지호에게 필요한 생필품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옷이 없어 내 것을 입고 있는 형편이 아니던가. 나는 지호에게 생각해 보겠다, 라고 대꾸했다.
그날 밤이 될 때까지도 나는 지호가 우리 집에 머문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뭐, 하루쯤이야 불쌍한 살쾡이를 위해 비를 피할 작은 은신처정도는 마련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밀한 개인 생활공간에 낯선 타인과 장기간 부대껴 사는 건 다소 부담이었다. 더구나 지호와 나는 어떤 친분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이바에서 만나 하룻밤 같이 침대에서 뒹굴긴 했지만 그것은 소변을 보는 것과 같은 생리적 욕망의 해결을 위한 일이었지 하하호호 웃으며 친분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랬다. 내게 섹스는 일종의 배변 행위였다. 마려우면 싸고 치워버려야 할.
성적 욕망은 동물들의 발정기나, 여자들의 달거리처럼 일정 주기를 두고 계속 반복해서 찾아왔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네 번 정도가 평균이었다. 일주일에 두, 세 번 충동을 느낄 때도 있고 한 달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대개가 그랬다. 그 때마다 나는 유흥업소를 가거나, 여자를 사거나, 게이바를 찾았다.
바이섹슈얼. 그러니까 나는 양성애자였는데 굳이 우선순위를 매기자면 여자보다는 남자가 좋았다. 신체조건만 따지면 체지방 비율부터 압도적으로 높은 여자가 부드럽기론 훨씬 부드러웠지만 나는 여자들이 뿌려대는 인공 향수와 역한 화장품 냄새를 꺼려했다. 코가 예민해서인지 체취를 굉장히 중요시하곤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담백한 남자의 몸을 더 선호했다. 그들의 땀 냄새, 살 고유에서 풍기는 향이 좋았다. 어쩌면 나의 섹스는 하반신이 아니라 상반신에서 이뤄지는지도 모른다.
타자기를 치던 손이 멎었다. 머리가 복잡하니 일이 잘 될 턱이 없지. 나라 별로 정리한 주요 품목별 수출 그래프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이 칼칼한 것이 인스턴트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할 성 싶다. 털레털레 주방으로 향하던 나는 지호가 머문 방에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멈칫했다. 시계는 이제 겨우 여덟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자나? 요즘 애들은 밤늦게 자던데. 살짝만 훔쳐 볼 요량으로 방문을 열었던 나는, 엇저녁 불쑥 지호가 찾아왔을 때만큼이나 당황하고 말았다.
지호가 살쾡이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훌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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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단편만 지르고 있네요...-ㅇ- 얼른 장편에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ㅠ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