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이름은 우지윤. 방년 12세 꽃다운 나이…….
“우지호 나가 죽어!”
“아, 내가 뭐! 야, 박경!”
우당탕탕 ㅡ! 쾅ㅡ!
어휴. 우리 집은 매일 매일이 전쟁이라니까요. 거참 두 마디 이상을 말하기 힘드네요. 다시 이어서 말하자면 전 우지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뭘 잘못했느냐구?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하! 정말 네 이기적인 성격, 이제 질렸어! 꼴도 보기 싫어!”
……우지호 아빠의 예쁘고 귀엽고 착한 딸입니다.
“밥은 어떡하고!”
“혼자 다아 처먹어라, 돼지야!”
쾅-!
그리고 방금 문을 부서져라 닫고 뛰쳐나간 저 분은 박경. 제 엄마에요. 하지만 성별이 여자는 아니랍니다. 네? 무슨 소리냐구요? 아아. 우리 집 엄마는 남자에요.
아주아주 예쁜 남자요.
[직경] 아빠는 엄마를 좋아해
w.검백
“지윤아, 이제부터 내가 네 엄마가 돼줄게.”
기억에 남는, 박경 아저씨의 첫 만남은 바로 이것입니다. 소처럼 큰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코까지 빨개져서는 말했지요. 아저씨 아니, 경 엄마의 첫 손길은 굉장히 따듯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굵직굵직한 아빠의 손마디와 달리 엄마의 손가락은 백지장처럼 얇고, 하얗게 투명했어요.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예쁜 사람이었죠. 이런 예쁜 사람이라면 남자라도 엄마로 대환영이었습니다.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 손에 이끌려 나와 엄마랑 대면하게 되었어요. 엄마는 그립고 애틋한 눈길로 제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봤습니다. 마치 제 얼굴에서 어떤 과거의 추억을 상기하는 듯한, 흔적을 발견하려는 눈치였어요. 분명히 눈은 제게 고정이 되어있었는데도 그 너머를 바라보는 듯했으니까요.
눈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바람에 따라 몹시도 나부꼈습니다. 제 머리카락에도 엉켜들었고 엄마의 콧잔등에도 내려앉았어요. 꽃을 닮은 눈송이의 감촉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연히 느껴집니다.
그 날은 6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가 생긴,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
“아빠. 난 왜 엄마가 없어?”
“아, 그건… 엄마가 지윤이를 낳다가 그만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이야.”
“하늘나라? 거긴 어디인데?”
“아주 먼 곳. 너무나 멀어서 다시는 여기에 올 수가 없어.”
친엄마는 저를 낳자마자 하늘나라로 갔다고, 제가 엄마를 찾을 때마다 아빠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 제 나이는 엄연히 두 자리로 접어들었고, 그래서 하늘나라가 저승세계인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친엄마가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빠 혼자서도 사랑은 충분했고 이제는 박경이란 예쁜 새엄마도 생겼으니까요. 그래도 궁금하긴 합니다. 제 친엄마는 어땠을까요? 지금 엄마보다 예뻤을지, 또 나랑은 얼마나 닮았을지.
직접 만날 수는 없어도 앨범에 있는 사진을 통해서라면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말을 걸 수는 없지만 전 친엄마를 이렇게 사진 위로 만질 수도 있고 눈을 크게 뜨고 볼 수도 있습니다. 친엄마의 독사진도 있었지만 대개는 아빠와 같이 있는 사진입니다. 그리고 아빠와 함께 찍은 친엄마 사진엔 항상 지금의 엄마, 박경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빠와 하늘나라고 간 친엄마와 지금의 엄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였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에서 알아주는 삼총사였다나 뭐래나. 가족보다도 더 가까웠던 세 사람은 아빠와 엄마가 유학을 가면서 사이가 소원해졌다는데, 제가 보기엔 이거 분명히 쌩 구라입니다. 분명히 치정싸움일 거예요. 왜,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심심찮게 등장하잖아요? 삼각관계.
아빠와 엄마는 쉬쉬하지만 제 시나리오 상으로는 틀림없습니다. 친엄마도, 새엄마도 모두 아빠를 사랑했다는 걸요. 정말 헷갈리는 건 아빠의 태도입니다. 아빠는 과연 누구를 좋아했을까요? 아빠는 정말 결혼했던 제 친엄마를 사랑하긴 했을까요? 휴, 어렵네요. 진짜 이유는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어찌됐든 어른들의 세계란 참으로 복잡한 것 같습니다.
자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현재 벌어진 상황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싸웠고,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엄마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갔습니다-가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네요. 처음에 두 분이 으르렁대며 싸웠을 때는 너무도 무서워 침대 밑에 꼭꼭 숨었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합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이렇게 대판 싸워대거든요. 도대체 이렇게 자주 싸우는 부부는 세상에 우리 집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도 걱정은 없어요.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 자주 싸우는 만큼 금방금방 화해하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좀 심각해 보입니다. 워낙 사소한 것으로도 자주 다투긴 하지만 이렇게 엄마가 집을 뛰쳐나간 건 흔치 않거든요.
“아빠, 괜찮아?”
“응.”
“엄마 찾으러 나가야 하는 거 아냐?”
“됐어. 알아서 들어오겠지. 집처럼 등 따시고 좋은 곳이 어디 있다고.”
아빠는 미간을 와락 구기면서 투덜댔습니다. 도대체가 말이야, 툭하면 삐지고 성질내고, 생리하는 여자보다 더 심해… 궁시렁 궁시렁. 말은 저렇게 밉게 하면서도 걱정이 되는지 힐끗힐끗 대문을 바라봅니다. 에휴, 아빠도 참. 남자는 다들 이렇게 솔직하지 않나요? 이럴 땐 자존심이고 뭐고 멋지게 뛰쳐나가서 타악- 하고 손목을 낚아채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백허그! 음, 제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요?
어쩔 수 없어요. 제가 나이에 맞지 않게 순수함을 잃고 이렇게 애늙은이가 된 것엔 우리 엄마 아빠가 톡톡히 영향을 줬거든요.
제가 이제 갓 2차 성장 문턱에 들어온 어린애라는 걸 알고 있기나 한 건지, 위험한 애정행각까지 서슴지 않는 우리 엄마 아빠. 뽀뽀는 일상이고 키스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하는 것 같습니다. 무려 제가 6살부터 그 꼴사나운 행각을 지켜봐왔다니까요? 심지어 작년에는…
…엄마랑 아빠가 침대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것까지 대번에 목격하고 말았어요.
충격 받지 않았단 거짓말은 않겠습니다. 야동도 보기 전에 실물로 보게 되다니. 더더구나 우리 엄마는 여자가 아닌 남자란 말입니다. 성교육 시간에는 늘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대해서 배우지 남자와 남자에 대해선 배우지 않았습니다. 정말 쇼크였죠. 다시 그 기억을 회상하려자니 머리에서 쥐가 나려고 하네요. 저처럼 선량한 소녀들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학교 건의함에 ‘성교육 시간에 동성애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세요’란 쪽지를 넣었는데 과연 선생님들이 제가 심사숙고 고뇌한 의견을 받아드렸을련지요.
아무튼. 그 날 이후로 둘의 애정행각이 우물처럼 더 깊어진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한테 볼 장 다 봤으니 나 몰라라 하는 건지, 도무지 우리 부모님 속내를 모르겠다니까요.
“아빠.”
“어.”
“벌써 열두시야.”
“그래.”
“…아직도 엄마 안 들어왔는데.”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진 비가 창문을 투두둑 치고 지나갔습니다. 저는 스탠드 불만 켜놓고 책상에 앉아 고뇌에 빠진 아빠 옆에서 벌 받는 아이처럼 가지런히 손을 모았지요. 혼잣말처럼 작게, 엄마 우산 안 들고 나갔는데… 큰일이다… 라고 중얼거렸어요. 물론 음악 하는 사람답게 예민한 아빠의 귀가 쫑긋 움직였습니다.
“엄마 안 찾아도 돼? 진짜루? 응?”
하얀 불빛을 쬔 탓에 유난히 아빠의 얼굴은 창백하고 또 심란해 보였습니다. 저는 아빠의 팔뚝에 손을 올리면서 치밀한 계산속에 이루어진 아양을 떨어댔습니다.
“엄마 지금 비 맞고 있을 지도 몰라. 아빠가 구해줘야 한단 말야. 엄마 보기보다 속도 여린데…….”
아아, 저는 왜 허구한 날 엄마 아빠 관계 개선에 이토록 힘을 쏟아야 하는 걸까요. 제 3자라고 생각하고 쏙 빠지고 싶은데, 가족이라고 또 그게 잘 안됩니다. 게다가 세 식구가 전부인 우리 집에서 둘이 싸우면 히말라야 산맥에 온 듯 아주 냉랭해지거든요. 가운데에 낀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목불인견이 따로 없다니까요.
결국 아빠는 제 설득에 밀려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서랍에서 우산을 찾아 나가는 아빠의 등 뒤를 쪼르르 따라갔지요.
“지윤아, 넌 집에 있어. 밤도 늦었고…….”
“아냐, 아냐! 나도 엄마 찾을 거야. 백짓장도 맞들면 낫댔어!”
아빠는 제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네가 그런 말도 다 알아? 제법이네.”
“응. 방과 후 수업으로 사자성어랑 속담 배우고 있거든.”
아빠는 아마 제가 얼마나 똑똑하고, 무섭고, 겁 없는 말괄량이인지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네, 그렇구말구요. 제가 BL(Boy's love)라는 장르에 빠져있고, 팬픽을 쓰고 있다는 것도. 휴. 여기에 이렇게 고백하니 스스로가 정말로 꼴사납네요. 어쨌든, 저는 엄마를 찾아야 합니다.
아빠와 엄마가 자주 들르는 카페에도 가보고, 집 근처 골목길도 샅샅이 뒤져봤습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별도 없는 세상은 그림자에 얽혀들어 이렇게 깜깜한데 엄마는 도대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홧김에 뛰쳐나간 것이기에 휴대전화는 집에 고스란히 있고요. 도대체 어디 간 것일까요?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찾아 다녔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안일하게 생각했던 아빠의 얼굴이 심각성을 느꼈는지 목각인형처럼 경직됐습니다. 저도 덩달아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지요. 어디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산을 잡고 있는 손이 추위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덜덜 떨립니다.
“지윤아. 밤이 너무 늦었다. 집까지 바래다 줄 테니까 얼른 자. 내일 학교도 가야지.”
“아냐 하나도 안 졸려, 엄마 찾기 전 까지……, 어?”
학교? 아빠의 말에 갑자기 머릿속이 번쩍! 합니다. 아빠와 깜빡깜빡 거리는 눈을 빤히 마주봤습니다. 저는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빛내며 아빠의 옷깃을 흔들었습니다.
“학교 운동장! 우리 아직 거긴 안 가봤잖아. 지금 가 봐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아빠와 나는 서로 진지하게 쳐다보다가 두말할 것 없이 단숨에 운동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거리. 아스팔트 위로 뒤뚱뒤뚱 뛰어가는 부녀의 모습이 네온사인 가로등 그림자에 길게 흘러내립니다.
학교 운동장에는 정글짐과, 시소, 미끄럼틀, 그네 등등이 있습니다. 거기 어디에 숨지는 않았을까 아빠와 저는 부리나케 살펴봤지요. 그러다가 비를 피해 미끄럼틀 밑에 있는 공간에 숨어 앉아있는 엄마를 찾아냈습니다. 비에 젖은 엄마의 어깨는 나비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봄이라지만 비 내리는 새벽. 많이 추웠을 거예요.
“박경. 가지가지 한다. 후딱 일어나. 집에 가야 하니까.”
“…싫어.”
“고집 부리지 마. 지금 너 때문에 지윤이가 잠도 못자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애 얼굴 좀 봐라. 너 걱정한다고 아주 흙빛이다. 어? 이만 하면 충분해.”
뻘줌하게 서있는 제 얼굴을 아빠가 가리켰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엄마 편도, 아빠 편도 들 수 없었던 저는 어정쩡하게 뒤로 물러났어요. 단호하게 딱 다물어져 있는 엄마의 입술이 씰룩였습니다. 아아, 이러다가 또 한바탕 싸우겠구나. 벌써부터 예감이 확 꽂히네요.
“늘 이런 식이지. 지윤이한테는 정말… 정말 미안해. 하지만 우지호, 너! 절대로 용서 안 할거야. 아니, 못해! 천하의 개자식.”
“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쩌라구! 그럼 열한 살짜리 앞에서 섹스하는 건 뭐, 정상이냐!”
쨍쨍 하고 울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운동장 밤공기를 가로 지릅니다. 괜히 제가 민망해져서 획획 주변을 살폈는데, 다행이 지나가는 사람은 없네요. 아빠는 한심하단 눈빛으로 목까지 벌게진 엄마를 훑어봅니다. 그런 시선이 엄마를 더 열 받게 한다는 걸, 아빠는 진짜 모르는 걸까요.
“만날 자기 멋대로야, 우지호… 흑, 내 입장은 손톱만큼도 생각 안 해주고… 무관심하고… 내 마음도 몰라주고…….”
기어코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한 엄마는 곧잘 눈물을 쏟곤 했습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센 편이어서 앞에서는 잘 안 울고 몰래 뒤에서 훌쩍훌쩍 거리는데, 오늘은 많이 서운했나 봅니다. 어떡해, 아빠? 저는 이런 얼굴로 당황해하는 아빠를 올려다봤습니다. 아빠는 어린애처럼 갈팡질팡 하다가 우산을 내려놓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알았어. 항복.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얼른 집에 가자.”
“흐으윽… 흐어어엉!”
“미안해, 미안.”
결국 엄마는 아빠 품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맙니다. 자식 입장에서… 엄마가 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썩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어떨 때는 저보다도 더 눈물이 많은 것 같다니까요? 차라리 엄마가 제 아들, 딸 같습니다.
태평양처럼 넓은 아빠의 어깨에 엄마는 얼굴을 파묻고 흥건히 눈물을 흘립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엄마의 눈물은 아빠의 옷자락을 적십니다. 저는 우산을 들고 멀뚱히 서서 얼른 엄마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립니다.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저를 토닥였던 것처럼, 엄마의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줍니다. 사랑 가득한 손길이 어두운 밤을 물리치고 주변을 환하게 밝힙니다.
“지윤아.”
“네?”
“네 엄마 잔다.”
말 그대로였습니다. 펑펑 울던 엄마는 어느새 지쳐 잠들어 아빠의 어깨를 베개 삼아 곤히 잠들어 있었거든요. 눈물 자국이 가득하지만 근심 걱정은 덜었는지 편안하기만 한 엄마의 옆얼굴을 보다가 그만 베실, 웃어버렸습니다. 참으로 대책 없는 엄마입니다. 첫 이미지도 지금도 늘 허당입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의 엄마를 하겠단 건지요.
결국 아빠는 엄마를 업었습니다. 때마침 비도 그쳤기에 다행히 우산을 드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어요. 저는 아빠 우산까지 같이 챙겨 두 개를 아스팔트에 대고 죽죽 그으며 집까지 돌아왔습니다. 도착하니 벌써 새벽 3시네요. 몰랐었는데 저, 상당히 피곤했나 봅니다. 너무 졸음이… 쏟아져서… 옷도 갈아 입기가… 귀찮아요…….
쓰러지듯 침대에 푹 몸을 파묻는 순간,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저의 레이더에 팟! 잡혔습니다. 스르륵 꿈나라로 들어가기 전, 까무룩 눈을 감고 잠에게 몸을 맡기기 전,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일 우리 엄마 허리 얼음찜질 해줘야겠다, 하고요.
(+) 8년 후 |
나이가 들어도 앵꼬 커플은 앵꼬 커플인가 보다. 지윤은 가게 문을 열자마자 마주보는 곳에 바로 앉아 서로 음식을 먹여주는 저의 부모님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풀풀 날리는 닭털에 괜히 살거죽에 오소소 소름이 올라왔다. 남들은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동안,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며 큰 지윤이였다. 그건 지윤이 대학생이 되고도 변함없었다. 지윤은 또각또각 걸어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 같이 편한 부모님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미리 주문하셨네요?” “그래. 네 엄마가 배고프다는데 어쩌겠냐.”
벌써 중년에 접어든 박경이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생글탱글한 이십대와 다름없었다. 이대로 밖에 나가면 모두들 지윤의 오빠라 생각하지, 절대로 부모라 생각지 않을 터였다. 신기하게 박경은 나이가 들수록 윤기가 나고 젊어지고 있었다. 아마 남편인 정력 왕, 21세기의 변강쇠 우지호 영향 때문일 것이다.
“지윤아. 네가 좋아하는 돈가스도 시켰어.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거야.” “네에.”
손재주가 지독하게도 없는 경이었지만, 그래도 엄마로서 요리는 기본이라며 매일 음식을 태우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도 지윤에게 꾸준히 음식을 갖다 만들어 바쳤다. 지윤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식사 당번은 경에게서 지윤으로 바뀌었는데, 아마 그때쯤 가족 모두가 경의 경악할만한 음식 솜씨에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여하간 경은 지윤이 좋아하는 요리 코스 만큼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래, 대학생활은 좀 어떠냐?” “뭐, 그냥 그렇죠.”
시골구석에서 상경해 시작한 서울 생활을 기대만큼 다채롭지는 않았다. 기죽을 것도 없었고 서울사람이라고 뭐 특별히 잘난 것도 없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에요. 지윤은 물 컵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오히려 ‘우지호’란 세 글자의 위엄만 똑똑히 맛본 터였다.
자신의 아빠이자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우지호’. 지호는 지윤이 태어나기 전까지 무대에 나간 인기 절정의 S급 가수였다. 뛰어난 랩 솜씨가 일품인 지호는 시인 뺨치는 작사 솜씨와 베토벤이 울고 갈(?) 작곡 실력으로 이미 정평 나있었다. 훗날 결혼을 해 가수 생활에서 은퇴하고 작사, 작곡가로 활동했을 때도 내는 노래마다 히트곡을 치며 그 입지를 견고하게 다졌더랬다. 어릴 적부터 촌구석에서 자란 지윤은 회사도 안다니고 집에만 콕 박혀 엄마만 물고 빠는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랐으나, 사람 많은 곳에 와보니 새삼 자신의 아빠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요즘에는 안 싸우시죠?” “싸우고 말 것도. 늙어서 그럴 기운도 없다.”
지호가 피식 웃으며 경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윤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지호는 정말 아름답게 늙었다. 멋있는 중년.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몸에서 흘러나오는 아우라는 점점 더 기품을 더해갔다. 부모님에게 열등감 폭발을 느끼는 자식이라니. 지윤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때 마침 종업원이 요리를 가져왔다.
“우선 먹고. 다음에 연극 보러 가요. 제가 아는 선배가 나오는 거라 표를 꽁으로 얻었거든요.” “이 나이에 젊은이들이 득시들 대는 곳에 가야겠냐.” “왜요. 아빠 아직도 팔팔한 청춘인데.”
지윤은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순수하게 말했다. 정말 지호는 아직도 청춘이었다. 적어도 박경과 하는 행동에 있어선 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난 사이라면 벌써 몇 십년은 훌쩍 지났는데 질리지도 않나보다. 지호에겐 사랑의 유통기한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박경을 생각하며 지은 자작곡 러브송을 쌓으면 한 트럭 쯤 될 거야. 지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빠.” “왜.” “엄마가 그렇게 좋으세요?”
식사가 끝나갈 무렵, 미리 주문해서 이미 그릇을 깨끗이 비운 지호와 경이 유치한 장난을 치는 것을 보며 지윤이 물었다. 물론 물으나 마나한 질문이었다.
“지윤아. 아빠처럼 멋진 사람이 저렇게 못난 엄마를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 “잠깐, 우지호 뭐? 내가 못나?” “말 끊지 말고.”
이렇게 사이가 좋다가도 금새 티격태격 모드다. 지윤은 몰래 끌끌 혀를 차다가 얼른 중재에 들어섰다.
“뭐라고 쑥덕대는 데요? 아빠가 아깝다고요?” “아니.” “그럼요?” “아, 정말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나 보다고, 그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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