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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편이 수정됐니다 ㅠ.ㅠ 꽤 많이 뜯어 고쳐서... 수정본을 안보신 분은 다시 정독하고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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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생전의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처참하게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선 어떤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 상실… 그 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박경, 결혼식, 기억, 친구, 사고, 병원……. 두서없는 단어가 폭풍처럼 뇌를 휘젓고 다녔다. 약을 먹었음에도 지끈지끈 두통이 번져온다. 또 다시 사물이 일그러졌다. 지호는 눈을 깜빡였다. 뜨거운 것이 뺨을 타고 흘러서 입술을 적시고 안으로 들어왔다. 짭조름하고 슬픈 맛이 난다.

 

“또 울어? 처음 봤을 때도 그러더니 울보네, 울보.”

 

남자가 당혹스럽다는 듯 지호를 응시했다. 기억이 안 나서 답답한 건 나인데 왜 네가 울어. 딱 그런 얼굴이다. 지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구잡이로 눈가를 문질렀다. 살과 살이 마찰되고 쓸리면서 따갑다. 창피하게 진짜. 그러나 눈물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아, 병원에 가서 눈물샘에 자물쇠라도 걸어달라고 할까봐. 지호는 울면서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기억상실증. 그렇게 흔하면서도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단어도 없을 거다. 멋대로 입이 열리면서 말이 튀어나왔다.

 

“왜, 왜 기억이 안나? 사랑하는 사람이… 널 그토록 찾을 지도 모르는데, 왜…….”

 

남자의 얼굴 위로 박경의 모습이 겹쳐졌다. 너무 많이 흘러서 닦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지호는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둔 채 따지듯이 말했다. 왜 기억을 못해? 누군가가 널 사랑하고 있는데, 이렇게나 마음이 찢어지도록 사랑하는데 왜 그걸 기억을 못해! 비명 같은 메아리가 목을 찢고 울려 퍼졌다.

 

“울지 마. 응?”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속삭이는 어조로 달래며 지호를 안았다. 실체가 없는 손은 지호를 쓰다듬어 줄 수도, 토닥여 줄 수도 없다. 그러나 남자는 지호를 껴안는 자세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려 등을 다독였다. 귀신은 감촉도 느낌도 없다. 허상이니까. 그런데도 지호는 이상하게 마음이 따듯해지는 걸 느꼈다. 단순한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날 위로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남자의 다정함이 손쓸 틈도 없이 마음의 벽을 부수고 스며든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점점 멎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잠잠해지자 지호는 머쓱해서 남자의 품에서 벗어났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눈은 괴물처럼 팅팅 붓고 코는 딸기코처럼 아주 새빨개졌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귀신보다 흉측한 몰골의 사람이라니. 자존심이 상했다. 지호는 우울해져서 시선을 바닥에 깔았다. 오늘 처음 본 사람, 아니 귀신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내비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제 좀 진정 돼?”

 

지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남자가 빙글 웃었다. 아아. 지호는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흥미롭게 두 눈을 반짝이는 남자를 마주했다. 천진난만한 그의 얼굴에 도리어 마음 한켠이 지끈거렸다.

 

“십오일.”

“응?”

“딱 십오일만이야. 승천할 때까지.”

 

홱 뒤돌아서서 방을 나가며 지호가 꽥 소리쳤다.

 

“우리 집에 살아도 된다고!”

 

어깨 너머로 남자의 웃음이 물결처럼 울려 퍼졌다.

 

 

 

***

 

 

 

남자는 긍정적인 건지, 냉정한 건지 금방 자신이 귀신이라는 사실에 적응했다. 허공에 누워 물 위를 배영 하는 사람처럼 둥둥 떠다니기도 했고 벽을 뚫고 나타나 지호를 놀래주기도 했다. 가끔씩 바깥을 쏘다니기도 했지만 남자는 늘 지호의 곁에 붙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지호는 최근 일 년간 했던 대화보다 남자와 한 이야기가 더 많을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귀신이 무서워 집안에 늘상 틀어박혀 사는 지호로서는 뉴스와 인터넷 외에 세상의 소식을 듣는 것이다.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군. 지호는 남자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쓰레기에서 귀찮은 짐덩이로 등급을 올려줬다.

 

“지호야, 지호야.”

 

이름을 알려준 뒤부터 맨날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한창 아침식사 중이었던 지호는 뚱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놨다. 왜. 퉁명스레 대답하는데 남자가 민망할 정도로 지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에 불나겠네. 지호는 우물우물 씹던 밥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무슨 용건이야.

 

“귀여워. 먹는 거 꼭 애기 강아지 같아.”

 

새끼 강아지도 아니고 애기 강아지는 뭐람. 잘도 낯 뜨거운 발언을 한다 싶었다. 지호는 무시하고 다시 수저를 들어 퍽퍽 밥을 퍼 입안에 우겨 넣었다. 남자는 팔짱을 끼고 둥둥 떠다니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나, 기억났어.”

 

풉. 지호는 먹던 음식을 그대로 뿜었다. 먹다만 음식찌꺼기가 더럽게 식탁에 흩어졌지만 신경도 안 쓴 채 남자를 올려봤다.

 

“기억이 돌아온 거야?”

“다는 아니고 아주 조금.”

“뭔데?”

“내 이름. 내 이름에 ‘ㅍ’이 들어가 있어. 너무 흐릿하게 생각나서 그 이상은 모르겠지만.”

 

‘ㅍ’이라… 기억이 다시 돌아오는구나. 정말 다행이야. 지호는 밥알을 꼭꼭 씹어 넘겼다. 이왕 돌아오는 거 빨리 돌아와서 하늘로 가기 전에 가족들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할 텐데. 측은한 마음이 차올랐다. 기억 상실은 본인도 주변 사람도 모두 피폐하게 한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누가?”

“널 사랑하는 사람이. 그니까 얼른 기억 찾아.”

 

다시 먹다 남은 밥을 푸는데 뚫어버릴 듯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밤 먹기 참 힘드네. 지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또 뭘 봐. 나 밥 좀 먹자.

 

“전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너 주변에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 있어?”

 

너무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귀신이 아니랄까봐 눈치가 구단이다. 지호는 홱 시선을 피했다. 입안에 있는 밥알이 모래가루처럼 껄끄럽기 그지없다. 싫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는데도 남자는 집요하게 물었다.

 

“사랑하는 애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렸…….”

“그만!”

“……”

“제발, 그만해.”

 

입맛이 뚝 떨어진다. 지호는 결국 절반이 넘도록 밥을 남긴 채 반창 뚜껑을 닫고 정리했다. 나 잘 거니까 냅둬. 짜증스럽게 일갈하고 침실로 들어왔다. 탁. 지호는 방문을 닫자마자 벽을 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사물이 어지럽게 흩어지면서 가장자리 부분의 색이 녹아내린다. 지호는 소매로 슥슥 눈을 닦았다.

 

소매 자락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

 

 

 

투명한 아파트 창문을 뚫고 하늘로 계속 날아올랐다. 남자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향해 팔을 뻗었다.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대기권? 성층권? 아니면 지구를 벗어나 우주까지? 호기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지만 멀리 벗어나선 안됐다. 남자는 방향을 틀어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장난감 같던 세상이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남자를 압도했다.

 

팔차선 도로에 착지한 남자는 쌩쌩 내달리는 자동차가 자신의 몸을 치고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며 주변을 둘러봤다. 마천루의 높은 빌딩이 경쟁하듯 서로 머리를 높이 치켜 올리고 있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여유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나도 살아있을 때 저랬을까. 저렇게 무엇에 쫓기듯 살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지독히 재미없는 삶을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ㅍ…아! ㅍ…ㅣ…ㅜ….’

 

가만히 눈을 감으면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아이인지 노인인지는 모른다. 다만 누군가의 푸른 목소리가 알싸한 어둠 속에서 애타게 번져왔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생의 기억. 물론 궁금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을 되찾아야겠다는 필사적인 사명감은 없었다. 이미 죽은 몸. 기억을 되찾는다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는가. 오히려 괴롭기만 할 거다. 그런데 왜 우지호 그는…….

 

남자는 사색에 잠긴 채 살아있을 때라면 감히 시도도 못할 무단횡단을 했다. 걷는 도중에 몇 번이고 차와 부딪혔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차 주인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 지호의 말대로 보름이 지나면 자신은 영영 이곳에서 사라질 존재. 차라리 기억이 없는 게 미련도 안 남고 속도 후련하니 편안하다. 그런데 자꾸 지호가 한 말이 걸린다. 지호는 계속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주장했다. 기억, 추억, 과거, 자아. 그런 것들이 정녕 소용이 있을까?

 

남자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무를 스치고 전깃줄을 통과해 지호가 사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14층까지 거뜬히 올라와 이중창문을 뚫고 지호네 집 거실로 내려왔다. 기계의 도움 없으면 땅에 발이 묶이는 인간들에 비하면 참으로 편리한 능력이다. 그러나 때로 이 능력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이를테면 무언가 간절히 만지고 싶을 때……. 남자는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던 지호를 떠올렸다. 눈물, 닦아주고 싶었는데. 씁쓸한 기분에 자조적으로 웃고는 콘크리트 벽을 넘어 지호의 방으로 들어왔다. 세상모르게 침대에 누워 색색 잠든 지호가 보였다. 볼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자국에 절로 눈이 간다. 또 울었나보군. 남자는 날아서 지호의 옆에 몸을 뉘었다. 오늘 아침에 심하게 닦달한 걸까. 그렇지만 너무나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온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는 건지. 남자는 단지 지호를 위해서 기억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기억을 찾아 지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었다. 비록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지호가 기억해주길 바랐다. 가끔씩 나를 그리워해주길.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작은 바람이 욕심과 얽히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진심으로 남자는 지호에게 자신이 누군지 알려주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지호의 눈물 자국을 따라 훑어 내린다. 울지 마. 잠든 지호의 귀에 속삭였다. 살짝 얼굴을 미끄러트려 지호의 뺨에 키스를 했다. 아무런 감촉도 없는 키스. 내가 뭐하는 거지. 남자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가 한 행동에 당황스러워 남자는 허둥지둥 침실에서 벗어났다.

 

만약 급하게 나오지 않았다면 남자는 볼 수 있었을까? 지호가 편안한 얼굴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는 걸.

 

 

 

***

 

 

 

“넌 심심하지도 않냐?”

“뭐가 또 불만인데.”

“벌써 일주일 째 집에만 틀어박혀 있잖아.”

 

남자의 말에 지호가 딱 입을 다물었다. 어쩌라고. 지호는 남자의 정수리를 향해 리모컨을 던졌다. 명중은 했지만 공기를 가로지른 것처럼 리모컨은 남자를 지나쳐 소파 저편으로 툭 떨어졌다.

 

“난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으니까!”

 

빽 소리친 지호는 활활 이글거리는 눈으로 TV를 봤다. 하하호호 재미난 토크쇼를 보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살벌한 얼굴이다. 남자는 현관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게 붙어있는 부적 쪼가리를 가리키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귀신이 무서워서 바깥에 나가지 않는 거야?”

 

정답이었다. 정곡에 찔렸지만 지호는 내색하지 않은 채 계속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가 말했다. 프로그램 끝났어. 광고가 재미있는 거야? 지호는 눈을 끔뻑였다. 언제 끝난 거지. 민망한 마음에 채널을 돌리려고 리모컨을 찾는데 남자를 맞추느라 던진 탓에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가지러가기 귀찮다. 무엇보다 남자의 앞을 지나가야한다는 게 못마땅했다. 너무 굴욕적이잖아.

 

“괜찮아.”

 

남자가 지호에게 말했다. 괜찮다고? 뭐가 괜찮다는 거야. 남자는 빨래처럼 소파에 널브러져있던 상체를 일으켜 지호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사람 보다도 더 진실된 남자의 눈빛에 심장이 움찔움찔 제 자리에서 이탈한다.

 

“정 두려우면 내가 네 옆에 있어줄게. 보디가드 겸. 어때?”

“참나.”

 

어이가 없었다. 지호는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크하게 남자를 내버려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냐오냐 하니까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 한다.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지호는 잔뜩 궁시렁 대며 옷장 문을 열었다. 기분이 나빠야 한다. 나빠야만 했다. 그런데 왜 자꾸 웃음이 튀어나오는 건지. 입 근육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지호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목이 늘어진 셔츠를 벗고 깔끔한 체크무늬 남방으로 갈아입은 뒤 다림질 잘 된 면바지에 다리를 집어넣었다. 벨트까지 매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었다. 생기발랄한 사람이 거울에서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지호는 다시 입 주변을 꾹꾹 눌렀다. 웃지 마라. 웃지 마라.

 

“어어?”

 

거실로 나오니까 남자가 괴상한 신음성을 냈다. 뭐, 왜. 지호는 뚱한 얼굴로 남자 앞에 섰다. 남자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지호가 놀라웠는지 안 그래도 큰 눈이 잔뜩 커져 있었다.

 

“네가 하도 떽떽대서 외출 좀 하려고 한다.”

“응.”

“응은 뭐가 응이야? 빨리…….”

 

주구장창 말하던 지호의 말문이 막혔다. 허리에 얹은 채 눈만 깜빡깜빡. 남자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다가와 지호 앞에 서서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빨리 뭐?”

“…….”

“아하. 나랑 같이 가자고?”

 

얼굴이 열로 확 쏠렸다. 지호는 붉어진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팩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음흉하게 웃었다. 아, 날 너무 좋아하지 마. 이놈의 인기는! 자아도취에 빠진 남자가 몹시 얄미웠다. 저 잘난 상판대기에 주먹을 한방 갈겨줬으면. 내, 내가 언제 같이 가자고 했어?! 지호는 빽 소리를 지르고 신발을 구겨 신었다. 보란 듯이 쾅 문을 닫았지만 남자는 두꺼운 철제문도 너무도 유연히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문전박대가 따로 없네. 왜 또 그러실까. 같이 가. 울보에다가 곱쟁이 지호는 내가 보호해주지 않음 안 되잖아.”

 

무시했다.

 

“삐친 거야?”

 

삐치긴 누가 삐쳐…! 속에서 발끈 뭐가 치고 올라왔지만 지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았다. 머리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만 같다. 더워서 셔츠 깃을 잡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알았어. 내가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거야. 응? 착한 지호님 불쌍한 귀신이랑 동행해주세요, 네에?”

 

공손한 말투인데 묘하게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속이 배배 꼬여서 그런 걸까. 지호는 쭉 무시로 일관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디 가는 건데?”

“…….”

“응?”

“……”

“자꾸 나 무시하면 이렇고 저런 거 해버린다?”

 

이렇고 저런 거? 그제야 지호가 반응을 보였다. 시큰둥한 얼굴로 툭 내뱉는다. 해보시지. 지호는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벽에 기댔다. 끽 해봐야 귀신인 주제에 뭘 할 수 있다고. 여유만만한 지호의 태도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하라고 한 거다? 원망하면 안 돼? 솔직히 코딱지만큼 불안하긴 했지만 지호는 거만하게 턱을 내밀었다. 무슨 큰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 안일한 지호의 믿음은 단 일분 만에 확 뒤집히고 말았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온다. 실체도 없는 귀신 주제에 묘한 중압감을 풍기며 지호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 다정한 키스라도 나눌 자세. 무슨 짓…! 지호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남자의 얼굴이 부딪히듯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순간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몇 초가 흐른 뒤에야 지호는 남자가 귀신이며 자신에게 어떠한 물리적인 해도 못 입힌다는 걸 깨달았다. 한마디로 쫄 필요가 없는 거다

 

지호가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남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어디 있어? ……라고 말하려 입을 열던 지호는 기묘한 울림을 느꼈다. 불쾌한 감각. 그것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이, 이게 뭐야!? 왜 내 몸이 마음대로?’

 

자신의 몸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층에 무사히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몸이 혼자서 척척 잘도 걸어 나갔다. 놀랍다 못해 무서웠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에 쫙 소름이 끼쳤다. 이거 왜이래. 왜 이러는 거야. 내 몸뚱어리인데 정작 주인인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다. 의식은 있는데 아무것도 못한 채 지켜 볼 수밖에 없다.

 

“놀랐어?”

 

자신의 입이 자신에게 놀랐냐며 묻는다. 무슨 이런 끔찍한 부조화가 다있을까. 지호는 멍하니 제 육체가 움직이는 꼴을 지켜봤다. 뇌에 브레이크를 걸어놓은 듯 정상적인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독한 무기력에 빠져있는데 뭔가가 속에서 쑤욱 빠져나왔다. 실제로 뭔가가 보인 건 아닌데 느낌이 그랬다. 그 순간 답답했던 가슴이 창이라도 열린 것처럼 탁 트이면서 한결 가뿐해진다. 흐읍. 지호는 신선한 산소를 들이켰다. 이제야 마음대로 몸이 움직였다. 덜덜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느새 사라졌던 남자가 나타나 지호에게 짓궂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어,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바, 방금 나…….”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지호가 채 말문을 잊지 못하고 눈을 글썽이는데 실실 쪼개는 남자가 심상치 않았다. 방금 전 일과 눈앞의 귀신과 묘한 상관관계가 그려진다.

 

“일종의 빙의지. 나도 터득한지 얼마 안됐어.”

 

빙의라고! 지호는 소리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경악으로 몸이 찰흙 덩어리처럼 굳었다. 심장이 벌렁거려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섬뜩한 경험이다. 지호가 경련하듯이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핑글. 눈에 이슬이 맺히자 남자가 삐뚜름하게 올렸던 입 꼬리를 내렸다.

 

“윽. 미안해. 장난이었는데. 울지 마. 응?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안절부절 못한 채 지호 주변을 둥둥 배회했지만 지호는 작게 흐느끼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없었다.

 

“다시 이딴 거 하기만 해봐. 죽여 버릴 거야, 흑, 진짜…….”

 

횡설수설 덜덜 떨며 말하니 남자가 죽을상을 지었다. 미안, 미안해.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사과를 받다보니 무섬증이 가시면서 점점 괜찮아진다. 괘씸했지만 어디 다친 곳도 없고 자신은 너그러운 사람이므로 이쯤해서 봐주기로 했다. 언제 울었냐는 듯 지호는 냉기가 폴폴 풍기는 얼음왕자로 돌아와 날카롭게 경고했다. 한 번만 더 빙의니 뭐니 이상한 짓거리를 하면 당장 집에서 내쫓길 줄 알아! 평소처럼 깐죽거리면 부적을 써서라도 한 대 두들겨 패주려고 했는데, 남자는 군말 않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기분 풀어. 응? 다시는 안 그럴게. 주인의 눈치를 보며 꼬리를 말고 깨갱거리는 강아지 같은 모습에 지호의 마음은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물론, ‘부드럽다’와 ‘드럽다’는 한 글자 차이였지만.

 

“지호야 어디 가?”

“마트.”

“장 보러?”

 

응. 지호는 대답했다. 사실 남자가 외출 안하냐고 박박 긁지 않았어도 오늘이나 내일 쯤 찬거리가 떨어져 마트에 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집에 처박혀 사는 지호라도 먹을 것은 필요했으니까. 좀 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지만 오늘따라 거리에 귀신도 없고ㅡ옆에 따라다니는 귀신을 제외하면ㅡ 날씨가 맑아서인지 금세 지호는 기분이 푸딩처럼 말랑말랑해졌다. 햇볕 잘 드는 날 빨랫줄에 걸린 뽀송뽀송한 이불 같은 느낌.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고양이처럼 갸르릉 기분 좋은 울음소리가 나올 것만 같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 공기에 머리가 한결 청정해진다.

 

가는 도중에 횡단보도가 나왔다. 마트에 가려면 필수적으로 이 길을 거쳐야 했기에 지호는 잠자코 서서 빨간 불이 파란 불이 되기를 기다렸다. 씽씽 내달리는 차를 멀거니 응시하는데 아까부터 재잘재잘 떠들던 옆이 조용했다. 수다쟁이가 침묵이라니.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잔뜩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지금껏 며칠간 남자와 같이 지냈지만 이렇게 무시무시한 표정은 또 처음이다. 혼란스러운 듯 빛이 엉켜있는 남자의 눈이 탁한 농색을 띄었다. 말 붙이기가 꺼려질 정도로 엄청난 분위기였다. 그 때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야, 안 건너? 지호가 신경질적으로 재촉하자 남자가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홱, 홱, 홱. 남자는 좌우로 눈을 굴리며 기묘하게 익숙한 거리를 샅샅이 살폈다. 내가 옛날에 여기 와본 적 있던가…?

 

전조등, 돌진하는 차, 컬렉션 소리, 사람들의 비명, 축 늘어진 손가락. 희미한 잔상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찌르는 듯해 남자는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이거 뭐지? 생의 기억? 수천 개의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 같은 깨질듯한 두통에 낮은 침음성을 흘리는데 어느새 길을 다 건넌 지호가 저 편에서 빨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깜빡깜빡 하는 초록색 신호등에 위화감이 든다. 기시감, 데자뷰. 남자는 상념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고 지호에게 다가갔다. 왜 이렇게 늦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툴툴대는 지호의 말투에 남자는 조용히 사과했다. 미안.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이 길을 벗어나기 전, 남자는 미련을 갖고 뒤돌았다. 어느새 빨간 불로 바뀐 도로는 질주하는 자동차로 정신없었다. 착각이었나. 머뭇거리던 남자는 이내 지호의 재촉에 못 이겨 서둘러 거리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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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이 왜 이렇게 힘들까요! 下편이 몹시 길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 -_-;;

 

여튼... 드디어 오늘 정오에 블락비 3집 미니앨범 음원 발매네요! 내 마음은 유후후 유후후~

 

요즘따라 블락비 컴백 시기가 가까워져서 그런지 덧글이 많이 달리네요 +_+ 항상 코멘트/피드백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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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좋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2
ㅋㅋㅋㅋㅋ저런거 드라마에서 보면 혼자 떠드는 것 처럼 나오던데 ㅋㅋㅋㅋ
지훈이에게 능력이 생겨서 막 만질수 있는 능력이.. 막...ㅋㅋㅋㅋㅋㅋㅋㅋ뽀뽀!!!!뽑..!뽀.....죄송함다

11년 전
독자3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다음편이 마지막이라니..... 하..... 너무 아쉬워요ㅠㅠㅠㅠㅠㅠㅠ지훈이가 빨리 기억찾았으면 좋겠어요 자까님 ㅅ...사랑해요S2
11년 전
독자4
지호와 지훈이가 드디어 외출을 ㅋㅋㅋ 헐 빙의는 정말 무서울것 같아요ㅠㅠ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니ㅜㅜ 다음편도 기다리고있을게요!
11년 전
독자5
ㅠㅠㅠㅠㅠ짱재미있어요!!!!
11년 전
독자6
지호 너무 귀여워ㅋㅋㅋㅋ 능글거리는 표는 사랑입니다ㅋㅋㅋ
11년 전
독자6
신알신 알림 받고 왔어요!
아 근데 빙의 실제로 내가 걸린다고 생각하니 좀 무섭네용.....
다음 하편이 마지막이겠네요ㅠㅠㅠ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요
이번편도 재밌게 잘 읽고가요!

11년 전
독자7
아 빙ㅇ의..... 얼마나무서웠을까요 ㅜㅠㅠ 그리고 두손다닳도록 비는 지훈ㄴ이가 너무 기여워 쥬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도대체무슨 기억일까요(덩달아심각
으읔읔ㅇㅋ틍ㅌ킁킄 ㅇ너무재밋ㅇ어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자까님 신알신하고가요!!

11년 전
독자8
신알신 받고 왔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진자너무재밌어요ㅠㅠㅠㅠ다음편이마지막이면안되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그래도다음편엄청기대하고있겠습니다!!!!
11년 전
독자9
ㅋㅋㅋㅋㅋㅋㅋ아 규ㅣ여워서 미칠 것 같아여 너머 귀여움 ㅜㅜㅜㅜ 혼잣말하는 거 웃길 것 같고 막 지호...으으으 조아해여 자까님
10년 전
독자10
다음편언제나와여!!!!!!!!!!!역주행중인데!!!으아아잉ᆞㄱ아재밌다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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