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에 안들어서 上 편 전면적으로 다시 수정했습니다 ㅠ,.ㅠ 귀찮더라도 다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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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세상이 커다란 젤리 속에 갇힌 듯 불투명하게 일렁여서 몇 번이고 보도블럭 위로 꺼꾸러질 뻔했다. 지호는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비틀대며 걷고 있었다. 속이 새까맣게 타는 것 같아. 숨을 헐떡인 채 지호는 투둑 눈물을 쏟았다. 길 한복판에서 다 큰 남자가 우는 것만큼 꼴불견인 것도 없는데 도무지 절제가 안됐다. 빨리 집으로 가야해. 지호는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쓸었다.
“교통사고 났나봐.”
“어머 어떡해!”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쫑알대는 여자들의 대화가 귀에 꽂혔다. 아닌 게 아니라 엠뷸런스와 구급대원으로 일차선 하나가 꽉 막혀있었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국인의 종특이성 때문에 구경꾼으로 더 번잡스러웠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낭자하게 흩어진 붉은 피.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환자의 다리가 지호의 눈에 스쳤다. 그러나 시야는 이내 차오르는 눈물로 뿌옇게 흐려졌다. 대한민국에서 교통사고는 하루에 600건도 넘게 일어난다. 이렇게 특별할 것 없는 사고에 더 이상 신경을 뺏길 틈이 없다. 당장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지호는 눈물방울 털어내고 발에 힘을 주며 걸었다.
“흑… 죄송해요.”
땅만 보고 걸은 탓에 앞에 사람이 떡 하니 서있는지도 몰랐다. 지호는 훌쩍이는 울음소리로 사과를 읊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세상이 도는 건지, 내가 도는 건지, 아니면 지구가 오늘따라 자전운동을 격하게 하는 건지… 눈앞이 핑글핑글 돈다.
위태롭게 걷던 지호는 결국 땅바닥에 요란하게 넘어졌다. 손바닥이 까끌한 면에 쓸려 살갗이 벌어지고 피가 송글 맺혔다. 부딪힌 무릎은 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너무나 아팠다. 피멍이 들었을 거야. 사무치게 서럽고 또 고통스러웠다. 진짜 죽을 것만 같았다. 지호는 사람들의 이목 따위는 신경도 안 쓴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수도꼭지처럼 물이 줄줄 흘러내려 얼굴 전체를 흥건히 적셨다.
생각보다, 실연의 아픔은 컸다.
[피코] 미스터 고스터
Written by 검백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며 엄마 뱃속에서 나온 지 횟수로 23년이 되는 XY 염색체 우지호는 평범함과 꽤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남자 주제에 여자보다 더 흘러 넘치는 색기나, 지독하게 서투른 대인관계 말고 더 근본적인 면에서 말이다.
지호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기억이 닿는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봤던 건 확실하다. 지호는 눈물 때문에 퉁퉁 부은 눈가를 매만졌다. 가끔은 이 눈을 뽑고 싶은 섬뜩한 충동이 치밀어 오른다. 도어락을 여는데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가 소방전 앞에 물구나무로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끔찍해. 진절머리가 났다. 지호는 아무것도 안보이는 척 태연하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부적으로 진이 쳐져있으므로 더 이상 놈들은 접근할 수 없다. 그나마 상처투성이 마음에 위안이 찾아온다.
영안. 지호는 귀신을 보는 눈을 갖고 있었다.
신 끼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빌어먹을. 지호는 욕을 삼키며 쥐어뜯을 듯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뇌수를 흘리거나 눈알이 빠져있는 건 다반사였다. 팔다리 하나가 없는 건 그나마 양호한 축에 속했다. 사지가 멀쩡하면 얼굴이 부패 되서 썩어있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귀신의 몰골을 보고도 태연함을 가장하는 건 정말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때문에 지호는 히키코모리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처박혀서 살아야만 했다. 의무교육인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때웠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지호가 대인기피증(對人忌避症)에 걸렸다고 떠들어댔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신기피증(對神忌避症)에 가까웠다.
한 달만의 외출이었다… 크게 마음먹고 없는 용기를 싹싹 긁어모아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렇다. 이런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지호는 주머니에 쑤셔놓았던 청첩장을 꺼내 멍하니 응시했다. 금박으로 새겨진 ‘박 경’이란 글자를 손끝으로 애절하게 더듬는다. 그렇게 질질 짜고도 또 눈에 물이 고였다. 씨발. 지호는 욕을 뇌까리며 청첩장을 구겨 바닥에 내팽겨 쳤다. 자자, 그냥 푹 자버리자. 이대로 잠들어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지호는 절실하게 푹신한 잠자리가 그리웠다. 감당 못할 현실에서 벗어나 꿈속으로 달콤하게 잠기고 싶다. 그러나 발을 질질 끌며 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지호는 턱이 빠져라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너, 너, 너 뭐야!!”
길쭉길쭉한 팔다리와 늠름한 어깨, 솥뚜껑만한 손발이 차례차례 시야각에 잡혔다. 꿀꺽. 지호는 침을 삼켰다. 웬 호랑이 같은 남정네가 자신의 침대에 떡하니 누워있었던 것이다. 혼자 사는 집에 어떻게……. 혼란스러웠다. 도둑? 강도? 지랄스럽게도 재수 없는 날이다 싶었다. 사랑도 쫑났는데 이제 돈까지 탈탈 털리고 완전범죄를 위해 죽어 줘야하는 건가. 그럴 수는 없다. 지호는 표독스럽게 눈을 치뜨고 꽉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당하더라도 곱게 당해주지는 않을 테다. 10년 넘은 외사랑도 끝났다, 지호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이판사판이었다.
“역시. 넌 내가 보이는구나?”
당연하지. 안 보일 리가 있……. 털을 곤두세우고 잔뜩 긴장해있던 지호는 남자의 물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내 짐작이 맞다면, 설마…….
“귀신?”
“아마도.”
하아아아아. 맥아리가 확 풀린다. 뭐야, 괜히 놀랬잖아. 지호는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짚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십년감수했네.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지호는 이내 한 가지 의문점 때문에 눈썹을 역 팔자로 휘었다.
“근데 너 뭐야?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어?”
“뒤를 밟아서 왔지.”
아니 내 뜻은…… 지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염라대왕 급이 아닌 이상 우리 집은 귀신들은 문턱도 넘지 못하는 철옹산성이다. 생글생글 웃는 남자의 상판대기가 갑자기 얄미웠다. 귀신인지 몰라 볼만큼 뚜렷하고 생기 넘치는 육체와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옷, 골골대는 병자가 아닌 건강한 눈빛이 다소 신선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지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서 몸을 웅크리고 남들 눈치 보지 않은 채 실컷 슬퍼 하고 싶었다.
“됐으니까 여기서 꺼져. 안 그래도 열 받아 죽을 지경이니까.”
똑바로 현관문을 향해 삿대질 했다. 여차하면 창문으로 사라져줘도 상관없다. 귀신은 중력과 같은 물리법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으니.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깨물며 다리를 떠는데 남자가 끈적끈적한 눈길로 자신을 훑었다.
“뭐해? 안 나가고.”
“나 여기서 살 건데.”
켁. 순간 사례가 들렸다. 저 자식이 뭐라 지껄이는 거야? 뚫린 입이라고 막 지르면 다 말소리인줄 아네! 보아하니 때깔도 고운 것이 잘 먹고 죽은듯한데 이왕 죽었으면 승천할 때까지 곱게 지낼 것이지 지금 누구 속을 홀랑 뒤집어 놓는 거야. 부글부글 속이 끓고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젠 내 집구석도 내 맘대로 못한다 이거지. 성대를 긁는 뾰족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겁을 주려고 주먹을 휘두른다는 것이 그만 중심을 잃고 남자를 통과해 침대위로 철푸덕 쓰러졌다. 전정감각에 문제가 생겼는지 오늘따라 균형 감각이 형편없다. 끄응. 지호는 굴욕감에 치를 떨며 침대매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욕을 한바가지 쏟아줘야겠다 싶어 육두문자를 종류별로 장전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유리조각처럼 깨진 남자의 슬픈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볼품없이 떠는 남자의 동공이 작살처럼 지호의 가슴을 콱 찔렀다.
“아아… 나 진짜로 죽은 거구나.”
남자는 지호가 자신을 투과했다는 사실에 몹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 화가 누그러지고 마음이 약해진다. 젠장. 어쩐지 이상타 싶었더니 죽은 지 얼마 안됐었구나. 남 입장은 손톱만큼도 생각지 않고 모질기 그지없는 지호였지만 그도 고인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갖추고 있었다. 석연치 않았지만 지호는 남자가 처한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동안 지호는 등 뒤로 팔을 뻗어 몸을 지탱하면서 남자를 관찰했다. 백옥 같이 하얗고 투명한 피부, 남자답게 늠름히 뻗은 콧대, 풍성한 속눈썹 아래 맑게 개인 밤하늘을 닮은 눈, 조각을 빚은 듯 날카로운 턱 선이 그야말로 로맨스 소설 남주인공의 전형적인 생김새였다.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새삼 남자가 준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예인하면 딱 좋을 얼굴. 모르긴 몰라도 살았을 때 오빠부대나 팬클럽 회원을 끌고 다녔을 거다. 나이는 스물 초반? 안타까웠다. 귀신은 죽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말은 즉슨, 저 남자가 한창 꽃다운 시기에 요절했다는 뜻이니까.
“이제 좀 진정 돼?”
시간이 지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눈빛에 지호가 물었다.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래서야 당장 내쫓을 수도 없고. 지호는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 침대에서 내려왔다.
“보통 귀신은 보름 정도 구천을 떠돌다가 승천하는 게 일반적이야. 억울한 누명에 씌웠다거나 독한 한이 맺히지 않는 이상 말이지. 죽은 뒤 남겨진 15일, 알차게 써. 후회 없이. 가족한테 한 번 다녀오고. 나와 달리 일반인은 귀신을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거든. 늦기 전에 가족한테 작별 인사라도 해야지.”
남자를 등진 채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지호가 다다다 내뱉었다. 이제 됐어. 지호는 입술을 깨물고 털레털레 부엌으로 갔다. 서랍을 열어 두통약을 찾아 찬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겼다. 띵하게 머리를 강타하던 이명이 좀 희미해지는 것 같다. 방금 삼켰으므로 아직 약효가 돌기도 전인데, 플라세보 효과 덕분인지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지호는 사뿐한 걸음걸이로 침실로 돌아왔다. 남자는 여전히 우두커니 서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뭐야? 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편의는 이게 전부다. 이만큼만 해도 엄청난 호의를 베풀어 준 거다. 더 바라는 건 사치였다. 이쪽 사정도 복잡한데 그깟 귀신 하나 때문에 일정을 망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호가 한마디 하려 입을 벌렸을 때였다.
“깜깜해.”
“?”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 친구도, 가족도, 나도…….”
“…….”
오직 어둠뿐이야. 남자가 공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