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거기 말고, 그 쪽. 예, 두 번째 서랍을 열면 서류가방 나오는데 앞주머니에 지갑이 있을 겁니다. 십만 원 정도? 신용카드는 손 안대는 게 좋아요. 돈 뽑으려고 은행 들어가면 백퍼 CCTV에 기록 남으니까.”
손이 묶인 채 침대에 태연히 기대서 말하니까 사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본다. 마스크에 가려져있지만 눈빛만으로도 그가 충분히 어이없어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친절히 웃으면서 턱짓했다. 뭐해요 안 뒤지고? 물결처럼 흔들리는 사내의 눈동자에 그만 웃음이 튀어나왔다. 허리를 젖히고 낄낄 폭소하자 사내의 하얀 목덜미가 딸기처럼 붉어졌다. 이걸 두고 주객전도라고 하는 건가.
……애초에 병아리 같은 노란 후드티를 입고 온 그쪽 과실이라고. 나는 도둑치고는 너무도 서툴기 그지없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손에 묶인 끈을 만지작거렸다. 하얀 피부와 강아지 같이 유순한 눈, 가느다란 팔다리로 미루어 짐작컨대 미성년자가 아닐까 싶은데. 나는 묘한 색기가 흐르는 도둑을 마음껏 감상하며 눈을 빛냈다.
정리하자면… 우리 집에 도둑이 쳐들어왔다.
그것도 꽤 사랑스러운.
[피코] 사랑스러운 도둑
Written by 검백
나는 강력계 형사로 살인·강도·강간 등 흉악범과의 몸싸움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형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리 높은 계급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바닥에선 꽤 유명했다. 왜냐? 한 번 일을 맡으면 100% 완벽한 성공률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국가 대표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무도 실력과 IQ150의 탁월한 두뇌회전 덕분에 날고 기는 조폭들도 ‘표지훈’ 이란 세 글자를 들으면 그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친다고. 뭐, 입소문을 타면서 과장되긴 했지만 여하튼 내가 유능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최근 실적으로는 11명의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을 한 뒤 토막 살인을 한 희대의 연쇄살인범을 잡은 것이 있다. 얼마나 미꾸라지 같은 놈인지 이 새끼를 잡기 위해 근 보름을 차속에 처박혀 살았다. 컵라면 식사도 삼시세끼를 맞춰 먹기 힘들었고 샤워할 시간이 없어 몸에 썩어가는 구정물 냄새를 달고 살았다. 핏줄이 터지도록 눈을 시뻘겋게 뜨고 밤낮을 잠복한 결과 드디어 흔적을 발견했고,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경찰차 추격전 끝에 무사히 놈에게 콩밥을 먹일 수 있었다. 선배들과 주위 동료들이 혀를 내두르고는 백이면 백의 적중률을 보이는 나의 능력에 칭찬을 하며 영웅놀이를 시전 했지만 나는 만사가 귀찮았다. 특히 이번 일은 고돼서 더 그랬다. 차라리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단순무식 조폭 싸움에 껴드는 것이 편했지 이런 지겨운 술래잡기는 딱 질색이다. 취조와 심문은 다른 동료에게 맡긴 채 멋대로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신이 지쳤다. 당분간은 지긋지긋한 형사 일을 벗고 평범한 일생상활로 돌아가 푹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주차를 하고 집으로 오는데 새삼 가족이 없는 내 처지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허구한 날 살인범 뒤꽁무니 쫓느라 휴일도 없이 서에 나가있는데 세상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가정에 충실한 걸 바라느니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 달라고 하는 게 더 미더웠다. 남들은 사지 멀쩡한 내가 왜 아직도 총각 딱지를 안 떼었냐며 선이라도 좀 보라며 닦달이었지만 나는 혼자가 편했다. 진짜 이유는 여자에게 안서기 때문인데… 쓸데없는 말은 이만 기각하고.
한 달 만에 온 집구석은 여전히 쓸데없이 큰 평수와 지나치게 없는 가구들로 허허롭고 적요했다. 뱀허물처럼 바닥에 던져진 옷가지와 개수대가 막히도록 싱크대에 쌓인 그릇과 먼지가 내려앉은 가구 상태가 꽤나 심상치 않았지만 우선은 샤워와 달콤한 숙면이 일 순위다.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은 몸에 끼얹었다. 얼마나 머리가 떡 졌는지 거품이 안 나서 다섯 번이나 샴푸를 칠했다. 국수 가락처럼 줄줄이 나오는 때를 박멸하고 침대에 누우니 바로 여기가 도원경이요, 알짜배기 천국이었다. 솔솔 봄바람처럼 밀려오는 잠에 내 한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철저한 나답지 않게 현관문을 잠그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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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뭐지, 손을 올리려는데 뭐에 묶인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꿈인지 현실인지 애매한 상태로 가만히 있자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것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벌레는 아닌데 꼭 사람 온기처럼…… 이상한 느낌에 잽싸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꼼짝 마!”
앳되고 허스키한 미성이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젖에 시퍼러니 둥둥한 식칼이 겨누어졌지만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눈동자만 굴려 상대를 확인해보니, 흰 마스크를 쓰고 샛노란 후드티를 뒤집어쓴… 으음, 강도인가? 강도 맞겠지. 그래 강도가 보였다. 보통 강도하면 검은 비니에, 검은 자켓, 검은 셔츠, 검은 바지 등등 시커먼 옷이 정석인데 이 사내는 어찌된 게 만화 캐릭터가 떡하니…… 지나치게 유아틱하다. 패션 참 독특하네. 떨떠름한 얼굴로 사내를 올려보니 그가 내 시선을 눈치 채고 옷을 가리며 홱 몸을 비틀었다. 저거, 부끄러워하는 거 맞지?
“아파.”
칼에 목이 닿지도 않았는데 괜히 엄살을 부리니까 사내가 깜짝 놀라며 칼을 치웠다. 허겁지겁 내 턱에 머리통을 들이밀며 목을 살폈다.
“괘, 괜찮아요? 찔린 거예요? 어디 다쳤어요?”
도둑놈 주제에 속편하게 피해자 생각도 다해주는군. 나는 후드 사이로 드러난 사내의 까만 머릿결 냄새를 맡았다. 좋은 향이 났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됐습니다.”
짐짓 불편하다는 듯 뒤로 몸을 빼니 사내가 물러선다. 맑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툭 건들면 눈물이라도 쏟을 듯 너무나도 순진한 눈망울이다. 우락부락한 덩치들만 상대하다보니 내 앞에 있는 말라깽이 집도둑 쯤은 애교요, 아주 귀엽게 보였다. 딱 봐도 서투르기 그지없는 것이 초범이라는 견적이 그려진다.
쯧. 천성이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왜 사서 민증에 빨간줄 그을 짓을 하려는 걸까. 동정심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사내가 딱했다. 하필 골라도 형사, 그것도 강력계 형사가 사는 집을 쳐들어오다니 운도 지지리도 없지. 대범하다 못해 무모한 사내의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손만 묶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반항할 기미가 없자 사내는 내게서 눈을 떼고 집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근데 그 꼴도 상당히 우스웠다. 옷을 꺼내 살펴보고 돈 될 만한 걸 건지지 못하자 다시 곱게 개켜서 넣어두는 것이다. 무슨 도둑이 참……. 이거 몰래 카메라가 아니야?
허술하게도 묶어놨군. 나는 손목을 묶은 끈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이 정도는 삼십초면 혼자서 풀 수 있다. 무슨 신발 끈 같은 걸 가져와선… 설마? 나는 끈이 없는 사내의 왼쪽 운동화를 빤히 응시했다.
“저기요 도둑님.”
한참 분주히 집을 뒤지는 사내를 불렀다.
“목이 마른데 물 좀 마시면 안 됩니까. 아, 걱정 말아요. 전 당신이 생각하는 허튼 짓 안합니다. 바지주머니에 휴대폰 있는데 혹시 모르니 가져가세요.”
사내가 한 대 얻어맞은 사람 마냥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더 잘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라. 나는 폰을 침대에 내려놓고 사내를 스쳐 부엌으로 들어섰다. 손이 묶인 채로 냉장고를 열고 물병을 꺼내 유리컵에 따랐다. 찬물을 찬찬히 음미하며 물건 하나 어지르지 않는 귀여운 도둑을 관찰했다.
하, 이거 미치겠군. 현관문이 열려있으니까 혹해서 들어온 충동 범죄라는 걸 이렇게 티내서야 내 마음이 약해지잖아. 나는 손을 등 뒤로 가져가서 가구 모서리로 빠르게 끈을 긁어 내렸다. 나야 이렇게 여유롭게 굴어도 저런 허술한 놈은 눈감고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지만, 어리버리한 도둑님은 무슨 자신감으로 칼을 내려놓고 내게 등을 보이나요.
나는 여리여리한 사내의 허리를 유심히 뜯어봤다. 한 손에 들어올 만큼 가녀리기 짝이 없다. 그러다 문득 나는 사내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마스크를 벗기고 싶었다. 펑퍼짐한 옷 때문에 몸의 윤곽이 잘 잡히지는 않았지만 팔다리가 마르고 허리가 S자로 예쁘게 굴곡져 있음에 틀림없었다. 자꾸 보니 내 취향이다 싶다. 어느새 자유로워진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내가 오는지도 모른 채 형식적으로 서랍을 열고 닫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집 구경이라도 하는지 조급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나는 스윽 식칼을 발로 밟고 입을 뗐다.
“아무리 그래도 흉기는 고이 품고 계셔야죠.”
기척을 죽이긴 했지만 이렇게 놀랄 줄이야. 사내는 지척에 있는 나를 보고 휘둥그레 빠질 듯이 눈을 떴다. 그 선량하고 순진한 동그라미에 음흉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비쳤다. 이거이거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모르겠는 걸. 내 발 밑에 있는 칼과 끈이 풀린 두 손을 번갈아 보던 사내가 낮게 욕을 중얼대더니 확 몸을 날렸다. 도망가려고? 어림도 없지. 이 몸은 말이야, 500m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도 맨몸으로 추적해 범인을 잡는다고. 개구리처럼 폴짝 도망가려던 사내는 내가 후드를 낚아챔으로써 깨끗하게 상황 종료가 됐다.
콧노래를 부르며 사내를 침대에 쓰러뜨리고 그의 허리에 올라타 팔을 꺾어 등 뒤에 붙였다. 일 초 만에 제압 끝.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폼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사내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강홍철 알죠? 지금 뉴스에서 한창 떠들어대는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범 말이에요. 그 놈 이번에 잡혔잖아요. 누가 그랬을 까요?”
“…….”
“접니다.”
“…….”
“형사 집에 느긋하게 도둑질 하러 오시다니, 간도 크군요.”
제법 충격적이었는지 사내가 나비처럼 속눈썹을 떨며 바르작댔다. 뭐라고 말하려 했는지 한참을 뻥긋대던 사내가 이윽고 체념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하하, 세상에 무슨 이런 도둑놈이 다 있을까. 동요하는 사내의 예쁜 갈색 눈망울 때문에 나는 또다시 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멋대로 손을 뻗어 마스크를 벗겼다.
“아아.”
나도 모르게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새하얀 우유빛 피부와 고양이 발바닥처럼 푹신해 보이는 입술, 콧잔등부터 인중을 내려오는 완벽한 라인이 나를 압도했다. 까만 머릿결이 이리저리 이마에 흐트러져있는데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다. 쿵쿵 심장이 시끄럽게 뛴다. 진짜 내 취향. 나는 홀린듯이 물었다.
“이름이 뭐에요?”
“…….”
“어차피 그쪽 장갑 안 껴서 지문 남았어요. 채취하면 인적사항 알아내는 거, 일도 아니니까 좋은 말 할 때 알려주세요. 네?”
“…우지호.”
우지호라. 예쁜 상판과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갑자기 폐가 간지러워져서 웃음이 비실 흘러나왔다. 장난스럽게 지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애교 피우듯이 얼굴을 비볐다. 딱딱하게 굳는 솔직한 몸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경찰서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제가 그쪽이 꽤 마음에 들었거든요.”
당혹스러워하는 우지호에게 몸을 밀착하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저랑 사귄다면 눈감아 줄 의향 있는데. 어떠십니까?”
하나 밖에 없는 대답을 강요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나는 당혹스러워 하는 지호의 볼에 뽀뽀를 하고 단단히 허리를 감아 올렸다.
사랑스러운 도둑님, 당신은 딱 걸렸습니다. 이 유능한 표지훈 형사에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