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다.
지훈은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운명이란 건 믿지 않았다. 운명은 잠시 사랑에 눈 먼 자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지껄이는 헛소리라고 치부했다. 화학 작용이 선사하는 유통기한이 끝나면 깨지는 유한한 사랑 따위가 도대체 무슨 운명인가. 모든 커플들이 끝을 보고 시작하진 않지만 결론적으로는 대다수가 끝을 보기 마련이었다. 하늘이 사람을 점 찍어준다? 그런 구시대적 발상은 신세대를 살아가는 도시남자 표지훈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과 섹스는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아무리 신일지언정 인간의 감정까지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게 지훈의 이론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이 있고, 주관이 있으며, 나름의 이상형도 존재한다. 지훈의 이상형은 찢어진 눈에 앙탈부리는 성격, 여리여리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섹시한 연상의 남자였다. 세 음절로 줄여 말하면 우지호였다. 그래서 지훈은 첫눈에 우지호에게 반했다.
지훈은 스스로가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와 별개로 우지호의 성적 취향은 큰 걱정거리였다. 아무리 자신이 근사한들 지호가 여자에게밖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림의 떡이었으니까. 며칠을 지호 주변에서 맴돌며 밑밥을 깔았다. 다행히 지호가 게이이고 또 자신에게 관심이 많았기에 지훈은 지호와 별 무리 없이 사귈 수 있었다. …오히려 그 뒤가 더 문제라면 문제였다.
갈수록 지호에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섹스를 스포츠로 아는 지훈에게 있어서 이건 꽤 심각한 일이었다. 지호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누가 지호에게 추파를 던지면 자제가 안 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호가 별 생각 없이 남에게 호의를 베풀 때도 쫌생이처럼 질투가 났다. 지호의 눈길, 손길, 숨결 모두 자기만 알고 싶었고 자기만 알아야 했다. 남들에게는 우지호의 발가락의 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확 납치해서 지하실에 감금해놓고 자기만 볼까- 하는 엄한 생각도 해본 것 같았다. 지훈은 이렇듯 누군가에게 구속된다는 느낌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렇게 지호와 사귄지 2주차에 접어들었을 때 지훈은 인정했다. 자기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것을, 구 애인들을 찰 때 했던 짓을 똑같이 되풀이한다고.
지훈은 소유욕이 없기로 이 바닥에선 나름 유명했다. 그의 애인이 친구과 침대에서 구르고 있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사내였다. 그만큼의 관용을 베푸는 대신 지훈도 철저히 자유분방한 섹스를 즐겼다. 구속되지 않는 연애는 없었기에 지훈은 제대로 된 애인보다는 욕구 해소용의 섹스파트너가 더 많았고 원나잇은 일상이었다. 깊지도 얕지도 않은 관계가 지훈은 좋았다.
질투만큼 추악한 인간의 감정도 없을 거다. 그로 인해 느껴야하는 배신감은 또 얼마나 더러운 일인가. 서로에게 속박되고 얽힐수록 제 얼굴에 침 뱉기와 다름없다- 고 지훈은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지호에게는 전부 예외라는 딱지를 붙였다. 너만 바라볼게. 너만을 사랑할게. 너에게 내 전부를 줄게. 그러나 세상만사 새옹지사. 지훈이 어떤 각오를 먹든 지호에게 지훈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회사 건너편에 있는 커피점을 지나가면서 유리창 저편으로 이태일과 함께 있는 우지호를 봤을 때 느꼈던 그 감각.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끔찍한 통각. 아무리 자신이 지호에게 모든 것을 투자 한다고 해도 지호가 지훈에게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건 단순히 관계에 끼어든 제 3자 이태일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리는 것으로 해결 될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직접 마주한 이태일은 요부보다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 같았고.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우지호가 표지훈에게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꽉 매여 있을 만한 어떤 것.
“왜 보자고 한 거에요?”
약속 시간이 되기 10분 전인데도 태일은 벌써 나와 있었다. 부지런하네. 지훈은 차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 창만 내려 추위에 으슬으슬 떨고 있는 태일을 지켜봤다. 살짝 시선을 비틀어 가로등 빛에 드러난 태일의 하얀 귀를 응시했다. 오늘 낮에 뜯어놨던 귓불에 루비 같은 피딱지가 달랑달랑 붙어있었다. 귀걸이 같군. 지훈은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일단 타죠.”
“……어, 어딜 가려구요?”
잔뜩 경계한 태세로 물러선다.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나? 잡아먹기 싫다며 창백하게 질려있는 태일을 보며 지훈은 차문을 열고 나왔다. 180cm가 훌쩍 넘는 지훈이 위협적으로 내리자 태일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주변에 야구방망이라도 있으면 휘두를 기세다.
“타요. 호텔에 갈 겁니다.”
“호, 호텔이요?!”
친절히 차 문을 열어주는데도 태일은 망설이는 눈치다. 태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들여다보여서 지훈은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호텔이라고 무조건 섹스만 하는 곳은 아닙니다. 비즈니스나 사업차 모이기도 하니까요.”
그제야 의심을 접고 순순히 차에 탄다. 지훈은 이왕 베풀 친절 끝까지 베풀기로 했는지 차문도 닫아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태일은 계속 엉덩이를 들썩였다.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태일이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훈은 입에 발린 말 하나 없이 호텔까지 느긋하게 차를 운전했다. 침묵이 싸하게 내려앉은 차 안에서 태일은 소름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온풍이 나오는 차안이 오히려 바깥보다 더 춥다면서.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한 지훈이 태일을 이끌고 1204호로 들어갔다. 도대체 지훈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차를 타고 오면서, 아니 그 전에 지훈이 11시에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끊임없이 고민을 거듭해 왔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지훈을 예측하는 건 차라리 시간 낭비였다. 후우. 태일은 침대 한 귀퉁이에 엉덩이를 붙이면서 한숨을 내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제 난 어떻게 될까? 고급스런 룸에서 한없이 겉도는 기분이었다.
“아시겠지만 우지호에 대한 일입니다.”
지훈은 불편했는지 정장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셔츠도 접어서 팔꿈치까지 밀어붙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일은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 위로 가지런히 올려 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우지호 앞에서 꺼져달라는 걸까?
“그렇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말했잖아요, 태일 형 잘못이 아니라고.”
느슨하게 넥타이를 푸르며 지훈은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통유리로 다가갔다. 밖은 깜깜하고 안은 밝기 때문에 겨울의 한기가 묻어나는 얼음 같은 유리 위로 방 안이 환히 비친다. 유리에 들어있는 태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훈이 흐트러진 깃을 매만졌다.
“우지호 때문이죠. 전부.”
꿀꺽. 태일은 침을 삼켰다. 지훈 쪽을 바라보지 않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직감 상으로 굉장히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태일은 손톱이 살에 파고들 정도로 꽉 주먹을 쥐면서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빨리 본론을 불으라는 무언의 재촉. 지훈은 빙글 돌아 침대에 걸쳐 앉은 태일을 응시했다. 태일도 지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지훈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면대면한 지훈의 얼굴은 의외로 고요했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이 약간은 경직 돼 있었지만.
“태일 형은 우지호와 사귀고 싶죠?”
“…그건 갑자기 왜…….”
“예 아니오로 대답해 봐요. 사귀고 싶습니까?”
“아… 사귀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사귀고 싶지 않는다는 뻔한 거짓말을 입에 올릴 순 없었다. 이미 지훈은 자신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니까. 태일은 조심스럽게 지훈의 반응을 살폈다. 표정 관리를 워낙 잘해서인지 그다지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진 않다.
“눈이 뒤통수에 달려있지 않다면 태일 형도 알거에요. 우지호가 그쪽에게 꽤 관심이 많다는 걸. 아니 관심 이상으로 좋아하죠.”
“…….”
“하지만 우지호는 현재 제 애인이고, 뭐… 아직까지는 당신보단 제게 더 사랑의 저울추가 기울어져있죠. 앞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
태일은 대굴대굴 눈을 굴렸다. 무슨 꿍꿍이일까, 저 남자.
“우지호 정말 깜찍하지 않습니까?”
비틀어져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저렇게 소름 돋는 반어법도 있던가. 태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심기 불편한 지훈이 어떤 깽판을 칠지 몰라 긴장됐다. 척추를 타고 식은땀이 구슬처럼 흘렀다.
“우리 둘을 데리고 그런 재미없는 장난을 치다니. 양 손에 떡을 주물러보겠다는 심산이 아니고 뭡니까.”
긍정도 부정도 않는 태일이었지만 지훈은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장기판의 말처럼 우리가 순순히 우지호의 장단에 맞춰줄 의무는 없죠.”
“그럼요?”
“우지호에게 보여주자는 겁니다.”
“뭘 보여줘요?”
지훈이 너무나도 즐겁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여태껏 태일이 봤던 지훈의 미소 중에서 가장 뚜렷한 미소였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는 그 표정에는 기괴할 만큼 음영이 짙게 드리워졌다.
“우리 둘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태일이 여전히 못 알아듣는다는 얼굴을 하니까 지훈이 쯧 혀를 찼다.
“태평하게 저울질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자는 겁니다. 즉, 우리 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빌빌 기게 만들자는 뜻이죠. 한 눈 팔지 못하도록.”
확실히 그렇다. 태일은 꽉 쥐었던 주먹에 힘을 풀고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 보면 지호는 이런 어정쩡한 삼각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선택권은 늘 지호에게 있었다. 표지훈이냐 이태일이냐를 정하는 건 지호였고 그 둘은 잠자코 지호의 결정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관계가 역전이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머리털이 곤두 설 정도로 아찔하다.
“…어, 어떻게요?”
균형이 어그러져 있다는 건 태일도 아는 바였다. 하지만 형평성을 맞추자고 지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자면 되죠.”
“네?”
“태일 형은 반복해서 듣는 게 특기입니까?”
호랑이처럼 어슬렁 어슬렁 걸어온 지훈이 태일 앞에 섰다.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태일은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버텼지만, 솔직히 버거웠다. 지훈의 사고를 도무지 쫓아갈 수 없었다. 자신이 한 발자국 따라잡으면 지훈은 두, 세발자국은 더 멀리 가버렸다.
“태일이가 더 듣길 원한다면 기꺼이 그래야지. 내 좆을 네 뒷구멍에 박아버리자고. 우지호 보는 앞에서.”
뭐!? 화들짝 놀라 고무줄 튕기듯 태일이 벌떡 일어섰다. 제대로 충격 받았는지 태일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물고기처럼 입을 뻥긋거릴 뿐이다. 그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핏기가 싹 가신 태일의 얼굴을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며 지훈이 턱을 움직였다.
“장난입니다. 꼭 관계를 직접 맺을 필요는 없죠. 그냥 우리 둘이 잤다는 걸 간접적으로 우지호가 알게 하면 됩니다.”
“……아.”
모르겠다. 태일은 떨리는 시선을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반말을 하다니,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어. 게다가 그렇게 워, 원색적인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금욕적인 정장을 입은 화이트칼라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이상하게 더 화끈거린다. 태일은 주먹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표지훈의 제안은 삼류 로맨스 소설에서도 안 쓰는 막장 스토리였다. 진짜 살다 살다 별 해괴한 일도 다 겪는구나. 태일이 볼을 씰룩였다.
“상상해 봐요. 우지호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로 우리를 보는 것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발밑에서 구걸하겠죠. 버리지 말아주세요, 하면서.”
지훈이 태일의 귀에 입바람을 불어 넣으며 은근히 부추겼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잔뜩 상처받아서 떠는 우지호라. 태일이 얼굴을 붉혔다. 나쁘지는 않은 거 같다… 라니! 지금 내가 뭐하는 거람. 미쳤어, 미쳤어! 태일은 지훈이 더 수작부리지 못하게 밀어냈다.
“유, 유혹 하지 마세요! 제가 지호가 상처받는 꼴을 태연히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너무나 교과서적인 태일의 언변에 지훈이 심드렁히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태일 형, 당신이 상처 받습니다. 제가 한 달 동안 우지호랑 사귀어봐서 대충 패턴이 그려지는데 걘 끝까지 우리 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간만 보다 끝날 걸요. 뭐, 저야 지호와 섹스라도 하니까 좀 낫다만 태일 형은요? 그런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감정싸움을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우지호는 너무 건방져요. 우리 둘을 너무도 쉽게 휘두르려고 하죠.”
“세, 섹스요? 지호랑 벌써 그런 걸 했나요?”
“엄연히 우리도 성인인데 못할 거 없죠.”
“…….”
지훈이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물처럼 태일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지훈은 움찔거리는 태일의 입술을 빤히 내려다봤다. 분명히 갈등하고 있어. 표지훈은 한쪽 입꼬리를 시니컬하게 올렸다. 마음이 약한 탓에 구워삶기도 쉽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일만 잘 끝내면 지호는 감히 우리 둘 사이를 갈팡질팡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겁니다. 그래야 게임이 공평해지죠. 우지호도 불안감이 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어처구니없이 들렸던 지훈의 계획이 점점 타당성 있게 들렸다. 아마 지훈의 교활한 혀가 뱀처럼 날름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저와 관계를 맺지 않아도 좋아요. 우지호에게 우리 둘 사이에서도 충분히 사랑이 가능하다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자는 겁니다.”
“…….”
“어떻습니까?”
“…조, 좋아요.”
질끈 눈을 감고 이를 악문 채 태일이 답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단 한 가지, 그동안 지호를 생각하며 넌더리가 난 이 마음의 상처들을 그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지훈의 홍채가 사납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거래는 성립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긴 밤을 때워야할 텐데요.”
“카드놀이라도 하게요?”
태일이 입술을 삐죽였다. 카드놀이 좋죠. 눈웃음 친 지훈이 콘솔에 있는 서랍을 열어 무언가 꺼냈다. 뭐지? 채찍이라도 꺼내는 건가싶어 태일이 긴장한 채로 주시하는데 지훈이 혀로 입술을 훑으며 뒤를 돌았다.
“원카드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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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완결은 다음편으로...쿡... 사실 다음편에도 완결 낼 자신이 없긴 합니다만은 ㅠㅠㅠㅠ 이번화 덧글 수 대로 다음화의 씬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