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달 전
“아아, 죽겠다.”
지호는 기가 쪽 빨린 얼굴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향긋하게 번지는 커피 향에 위로를 받으며 발을 질질 끌고 카운터로 다가간다. 빈속에 독한 커피를 쏟으면 위가 꽤 쓰리겠지만 스트레스로 과열된 머리를 먼저 식히는 게 우선순위다.
지옥의 취업난을 뚫고 전망 좋은 회사에 턱걸이로 입사한 지호는 요즘 까다로운 상사 때문에 문자 그대로 딱 죽을 맛이었다.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는 며느리의 심정이 이러할까? 자신이 정리한 자료를 사소한 핑계로 번번이 퇴짜 놓는 배불뚝이 대머리 부장이 무슨 앙심을 품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자신을 말려 죽일 셈이었다면 그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블랙으로 주세요.”
꺼질듯한 한숨을 쉬고 기대선 지호가 별안간 눈을 반짝였다. 검은 앞치마를 두른 한 알바생 때문이었다. 웨이브 펌을 넣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푸들 같다. 터질듯한 복숭아 빛 두 뺨은 사랑스러웠고, 앙 다물어있는 입술은 립글로즈를 바른 것도 아닌데 유난히 윤기가 돌았다. 하얀 눈꺼풀 밑에 새초롬하게 숨어있는 눈동자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다.
“이태일?”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을 따라 읽자 알바생이 교육받은 티가 나는 미소로 대답했다.
“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 친구 있습니까?”
초면에 너무 단도직입적이었을까. 알바생이 멍청한 얼굴을 했다. 아, 귀여워. 지호는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으로 생글생글 웃었다. 뒤에서 사람이 줄 서서 기다리는 것 같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아, 아니요.”
시커먼 남자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을지 몰랐다는 듯 잔뜩 곤혹스러워 한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손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지호는 멋대로 상상에 빠졌다. 음, 이 강아지 같은 사내가 게이이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끈덕진 지호의 눈길에 알바생이 바르작대더니 작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지호가 안 들린다는 듯이 상체를 펴고 거북이처럼 머리를 쭉 빼자 알바생이 지호의 귀에 속삭였다.
“그쪽은요 여, 여자 친구 있나요?”
아주 중요한 기밀이라는 듯 두 손을 입게 가져다대고 비밀스럽게 묻는 알바생 덕분에 지호는 그 자리에서 폭소해야만 했다. 아, 어쩐지 이 커피가게에 자주 들릴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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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지훈씨 웬일로 이 시간에 퇴근해요?”
“나 오늘 야근인데 지훈씨 마저 없음 삭막해서 어떡해에.”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느라 뻐근해진 어깨를 돌리고 있는데 사람 다니는 문 앞을 가로막고 시시덕거리는 무리들이 보였다. 지호는 관심 없는 척 곁눈질로 오늘도 근사한 남자를 엿봤다. 아, 손을 가져다 대면 생채기가 날 것 같은 오뚝한 콧날이며 저 이지적인 눈매를 보아라. 우리 부서 뿐 아니라 회사 전체적으로 왕자님으로 소문난 그는 여자 뿐 아니라 남자까지 홀리는 마성의 페로몬을 뿌리고 다녔다.
에잇! 코감기야, 비음이야 무슨 콧소리를 저리 내? 여자들의 내숭이 똥보다도 더 고약하다. 지호는 코를 쥐어 잡으며 계속 지훈을 힐끔거렸다. 같은 신입사원인데 그는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 같고, 구질구질한 자신과 달리 세상 걱정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턱을 괴고 몽롱한 망상을 즐기던 지호는 별안간 지훈이 이쪽을 보더니 환한 얼굴로 다가오자 흠칫 몸을 떨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선 어떤 좋은 향기가 났다. 여자들이 과할 정도로 뿌려대는 인공적인 향수가 아닌, 몸에서 자연적으로 나는 체취…….
“우지호씨.”
“예?”
접점이라고는 사무적인 일 외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볼일이 있어 내게 오는 걸까. 지호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설마 내가 몰래 쳐다보는 걸 들킨 건 아니겠지? 제발 몰라야 할 텐데.
“오늘 언제 퇴근하십니까?”
“아, 이것만 하면 끝나는데 왜죠?”
지호는 허둥지둥 책상에 있는 아무 파일이나 집어 들며 말했다.
“오늘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같이 저녁식사나 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제가 괜찮은 레스토랑을 알고 있거든요.”
이건 데이트 신청이렸다?! 지호는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 못한 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책맞은 심장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쿵쾅거린다. 다, 단순한 이야기라잖아. 김칫국 마시지 말자 우지호. 하지만 지호는 벌써 지훈과 러브샷하며 와인을 마시는 상상에 도취돼 있었다.
“그럼 여섯시에 일 층에서 뵙죠.”
침착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린 것 같다. 좋습니다. 지훈이 그리 말하고 뒤돌아 나가려는데 갑자기 한쪽 입가를 올리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뭐지? 지호가 지훈의 시선을 따라가자 자신이 들고 있는 파일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파일 귀퉁이에는 열 받아서 잔뜩 적어놓은 부장의 욕이 있었다. 부장에게 자료를 내밀자마자 일처리를 어떻게 하나며 세 번째 면박을 받고 빠꾸당했을 때 홧김에 분풀이로 적어 놓은 것이었다.
화르르륵! 불타는 고구마가 된 지호를 뒤로 한 채 지훈은 긴 기럭지를 내뻗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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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괜찮다. 지호는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 앉아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전부 유리로 된 벽 덕분에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치페이를 하더라도 돈이 꽤 깨질 텐데, 지훈은 미리 예약도 하고 계산도 알아서 했다. 왠지 거머리처럼 붙어서 얻어먹는 기분이 들었지만 통장에서 돈을 찾지 않아 지갑이 홀쭉해 있었으므로 지호는 얌전히 호의를 받아먹었다. 다음번에 내가 쏜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지 뭐.
보면 볼수록 아까웠다. 이렇게 근사한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지호는 꿀꺽꿀꺽 물을 들이키며, 음식을 먹는 지훈을 응시했다. 역시 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화보고, 영화다. 부드럽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목울대도, 음식을 씹느라 꿈틀거리는 뺨 근육도 미치도록 매력적이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것저것 신변잡기식의 잡담은 나눴지만 아직 본론의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지호는 다소 긴장한 채로 물었다. 저 완벽한 사람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나에게 접근한 걸까.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그쪽이 저를 너무 열렬하게 쳐다보셔서 말이지요.”
툭- 하고 손에 들린 나이프가 요란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뻐끔거리며 지훈을 봤다. 지훈은 태연하게 요리를 잘라 입안에 넣으며 지호에게 뭐가 잘못됐냐는 듯이 빙그레 웃는다. 아, 알고 있었던 거야!? 소리 없는 절규를 하며 지호가 하하하 떨떠름하게 웃었다. 미치도록 어색한 웃음이었다.
“궁금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너무 잘나서, 부러워서 그런가 싶었는데 보름 내내 제게 향한 시선이 도무지 거둬지지 않는 걸 보고 흔한 시기심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쪽은 꽤…….”
지훈이 느긋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행동은 전부 가식이었나? 가면이라도 벗은 것처럼 백팔십도 돌변한 지훈 때문에 지호의 머릿속은 난장판이 되었다.
“제 취향이거든요.”
지훈의 말이 끝났을 때 지호는 숨도 내쉴 수 없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지훈이 게이라니! 아니, 바이인가? 어쨌든 상관없다. 지훈은 지호에 잔에 와인을 따르며 신호등처럼 빨개졌다, 노래졌다, 파래졌다 하는 지호의 얼굴색을 유유히 관찰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 마냥 편안하고 느긋한 태도다. 지호는 일단 오리발 작전을 쓰기로 했다.
“저는 무슨 소리인지 잘…….”
“잡아 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게이인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무렇지 않은 말로 지호에게 카운터를 먹여준다. 지호는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을 했다. 지훈은 큭큭 낮게 웃으며 허공에서 길 잃은 어린애 마냥 방황하는 지호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그쪽은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 그렇게 다짜고짜 물어봐도…! 지호는 금방이라도 꼴까닥 숨이 넘어 갈 것 같고 얼굴도 푹푹 익었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주신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찰 수는 없었다. 아, 꿈이라면 제발 깨지마라! 지호는 반쯤 풀린 눈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하늘에서 별이라도 쏟아진 듯 유리창 너머의 도시 풍경은 아찔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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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저녁식사를 끝낸 뒤 지훈은 집까지 지호를 자신의 차로 바래다줬다. 이제 겨우 스물 중반인, 그것도 자기보다 한 살 어린 그가 벌써부터 외제차를 몰고 다닌다는 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괜히 지훈 앞에서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몸가짐이 신경 쓰인다.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설 때 쯤 지훈이 물었다. 지호는 흔쾌히 지갑에 껴두었던 명함을 내밀었다. 지훈은 우아한 손동작으로 명함을 가져가더니 윗주머니에 고이 넣어둔다. 명함에 신경조직이라도 달렸는지 괜히 지호는 지훈의 품 안에 들어간 것처럼 수줍어했다.
“연락할게요.”
“예, 지훈씨. 오늘 정말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지훈은 풍선처럼 둥둥 날아가는 지호를 보며 백만 볼짜리 미소를 그렸다. 지호는 그 황홀한 미소에 명치가 아파져서 끙끙거리며 집으로 올라갔다. 아, 믿을 수 없다. 저런 완벽한 사람이 내게 관심이 있다니! 지훈은 행복에 겨워하는 지호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없어질 때야 비로소 차를 후진하며 미끄럽게 도로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