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이 스물스물 밀려오는 게 심상치 않다 싶더니 기어코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죽기 싫다고 악악 고함치는 소리가 창문을 때리며 스쳐갔다. 오전인데도 깜깜해서 허연 형광등이 오늘따라 더 창백히 질려있다. 종이 인쇄되는 소리, 분주히 오가는 발걸음 소리, 시시콜콜 떠드는 말소리,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물들어 우울하게 변했다. 엎친 데 덮친 격 지훈이 지방으로 출장을 간 탓에 안 그래도 멜랑꼴리한 지호의 기분이 더 축축 늘어진다.
일이 좀 남았지만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지호는 내일로 미루고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할 준비를 했다. 준비해둔 장우산을 막 피고 나오려는데 청승맞게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슬비도 아니고 앞이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사납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가다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우산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뛰어가는 것도 아니고 늪에 빠진 것처럼 아주 느리게 떼는 발걸음이라니. 보는 사람의 속이 답답해진다. 별 희한한 사람을 다보겠네- 하며 지나치려던 지호는 불현듯 깜짝 놀라 서둘러 우산을 펴고 뛰어갔다. 웅덩이를 제대로 밟은 탓에 구두와 바짓단에 비가 튀겼지만 무시했다.
“태일 형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우지호……?”
하얀 입김이 번진다. 지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태일의 어깨를 잡고 우산 안으로 끌어 당겼다. 강아지 같이 작은 몸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온다. 오랫동안 빗길에 서있었는지 머리카락과 몸이 바다에라도 빠진 듯 흠뻑 젖어있었다.
“조금만 가면 우리 집이니까, 일단 따라와요.”
지호는 말도 없고 상태도 상한 생선처럼 나쁜 태일의 몸에 정장자켓을 벗어 걸쳐 준 뒤 손을 잡고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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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있으면 감기 걸리니까 샤워하고 나오세요. 속옷이랑 입을 옷은 문 앞에 둘 테니 갈아입으시고요.”
태일은 입에 빗장이라도 걸어 잠갔는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한다. 후우. 지호는 한숨을 쉬고 태일의 동그란 머리 곡선을 따라 쓸어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태일 형…. 반강제로 태일을 욕실로 떠민 지호는 몸을 따듯하게 데워주려면 차라도 끓어야겠다싶어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오늘 일찍 퇴근하지 않았더라면 태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져서 지호는 인상을 그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지호는 짜면 물이 뚝뚝 나올 만큼 질펀한 태일의 옷을 세탁기에 넣고 보일러를 최대치까지 틀어 올렸다. 조금 있으면 찜질방 못지않게 후끈후끈해지리라. 좀 있으니 태일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옷이 좀… 크네요.”
엄밀히 말하면 좀이 아니라 엄청 많이 크다. 머리 하나 차이나는 체격 때문에 지호의 옷을 입은 태일은 어린아이가 몰래 아빠의 옷을 주워 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그나마 제일 작은 옷으로 골랐는데도 길어서 바짓단을 몇 번이나 접어 올렸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티를 보며 웃음을 참던 지호는 멍하니 서있는 태일에게 홍차를 대접했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마시고 진정해요.”
“…….”
태일은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있다. 부담이 될까봐 물어보지도 못하겠는데, 태일은 먹구름이 낀 하늘보다도 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머리부터 말리죠.”
결국 홍차는 포기. 지호는 태일을 잡아끌고 거실로 데려왔다. 마른 수건을 챙기고 드라이기를 가져와 코드를 꼽는다. 복슬복슬한 태일의 머리카락이 물을 머금고 풀잎처럼 잔뜩 짙어져 있었다.
지호는 말없이 따듯한 바람으로 태일의 머릿결 사이사이 허투루 넘기지 않고 말렸다. 두피가 자극받지 않는 선에서 부드럽게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저도 모르게 머리 말리기에 초 집중해있던 지호는 문득 태일이 애완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꼼짝 않고 주인님에게 제 몸을 무방비로 맡긴 강아지. 머리가 다 마르자 드라이기를 내려놓으면서 지호는 무심결에 태일의 뒤통수에 뽀뽀를 했다.
“!”
귀신 같이 알아채고 태일이 뒤를 돌아 지호를 본다. 화가 난 건지, 좋은 건지 경계선이 모호한 얼굴이다. 저녁 먹었어요? 머쓱해져서 자리를 피해 일어나려는데 태일이 지호의 손목을 붙들었다.
“지호 씨… 지호 씨는 왜 그렇게 저에게 잘 대해 주시는 거예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지호는 일어나려던 몸을 도로 앉아 태일의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쥐었다.
“형이 좋으니까요.”
사실이다. 어딘지 맹해 보이고, 귀엽고, 순수한 태일은 지호의 포근한 안식처였다.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복잡한 계산을 요하지 않는 태일과의 인간관계는 지호에게 너무나 신선하고 새로웠다. 그러나 지호의 말을 들은 태일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그건 ‘신뢰하는 형’으로서… 겠죠?”
떨리는 태일의 음성. 지호는 크게 눈을 떴다. 좀 전만해도 의식하지 않았던 심장이 거세게 뛰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다.
“태일 형…….”
“틀렸어. 모른 척하고 숨기려 했는데 그게 안 돼요. 미안해요 지호 씨. 전 지호 씨를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봐요.”
비는 아직까지도 지겹게 내리고 있었다. 번개가 집을 번쩍 치고 가더니 곧 시끄러운 천둥이 성을 내며 쫓아온다.
지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태일 형이 나를 좋아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데 요즘 지훈에게 온 정신을 뺏기고 있다 보니 예상을 못한 것이다. 아. 지호는 숨을 들이쉬었다. 큰 티셔츠 때문에 하얀 어깨가 들어난 태일이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위험해. 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 잡숴- 하고 앉아있는 태일은 입만 대면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은 생크림 케익이었다.
꿀꺽. 지호는 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끌고 가 이렇고 저런 엉큼한 짓을 해버리고 싶다. 저 예쁜 분홍빛 입술에 거칠게 자신의 것을 넣고 피스톤 질을 하면 고양이 같은 섹시한 울음소리를 흘리겠지. 젠장, 상상만으로도 쌀 것 같다.
하지만 지호에게는 지훈이 있었다. 사귀는 사람이 없었으면 몰라도 지호에게는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매너 좋은 연인이 있는 것이다. 마음에 멍이 생길 것 같다. 지호는 버림받은 얼굴을 하고 떨고 있는 태일을 다정하게 어르며 위로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침통한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한숨을 귀찮다는 의미로 해석했는지 태일의 작은 몸이 움츠러들었다.
“미안해요 형.”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역시 그렇구나. 태일은 상처받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초조해져서 물었다.
“그래도 우리 좋은 형, 동생 사이죠? 절 피한다거나 하지는…….”
“안 그래요.”
태일이 쓰게 웃었다. 아, 다행이야. 지호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이기적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태일 역시 지훈 만큼이나 지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언제부터 태일이 이렇게 자신의 마음 속 깊이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대로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같이 밥 먹게 일어나요.”
지호는 태일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일어났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하는 스킨십, 배려, 다정함이 태일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태일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저렇게 애처롭게 몸을 떠는데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잖아. 지호는 몰려오는 죄책감을 무시하려 애쓰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비가 심장에서도 쏴아아 내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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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교외 밖으로 나와 지훈과 근사한 한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지호는 지글지글 불판에서 익는 고기를 입에 넣으며, 오늘도 완벽한 동작으로 음식을 먹는 지훈을 응시했다. 그동안 서로 스케줄이 겹치고 이런저런 일 때문에 많이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지훈이 평소보다도 훨씬 더 멋있어 보인다. 미용실에 가지 못했는지 머리가 제법 자라 지훈의 이마에 흘러내린다. 지호가 손을 올려 앞머리를 잡아당기자 지훈이 웃으며 잘 익은 고기를 지호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무슨 과장은 너한테만 그렇게 잔뜩 일을 몰아서 주는 거야? 유치하게 네가 인기 많으니까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지훈의 잦은 출장 때문에 지호가 꽁시랑 거리자 지훈이 어른스럽게 답했다. 당연히 할 일인데 뭐. 순간 지호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정말, 연하라고는 생각 할 수 없다니까.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
밥을 다 먹어가자 지호가 슬슬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그동안 지훈만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다. 물론 지훈이 본인의 입으로 돈이 많다고 했지만, 친절도 한 두 번이지 식충이도 아니고 말이야. 월급도 받았겠다, 연인 앞에서 멋있게 카드를 긁으려했던 지호의 계획은 지훈이 긴 다리로 먼저 카운터에서 도착하는 바람에 깔끔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표지훈! 내가 한다고 했잖아, 나도 돈 있는데 왜…….”
“알아. 그냥 내가 내고 싶었어. 다음에 내주라.”
지훈이 씩씩거리는 지호의 입술에 가볍게 저의 입술을 비볐다. 누가 봤나싶어 후다닥 주위를 둘러본 뒤 지호는 미워 죽겠다는 듯 눈꼬리를 세우며 탄식했다. 저렇게 황홀하게 구는데 어떻게 내가 화를 내. 다음번에는 반드시 자신이 계산한다고, 단단히 어르고 확답을 받아낸 뒤에야 지호는 지훈의 볼에 보답으로 뽀뽀를 했다. 도둑질이라도 하는 듯 조심스럽고 재빠른 동작이다. 지훈은 귀여운 연인의 행동에 나른하게 웃으며 차로 돌아가는 동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몸에 안 좋은데.”
지호가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음에 지훈이 흡연자라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더랬다. 담배 특유의 매캐한 냄새를 싫어해서 당연히 지훈도 멀리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는데. 지훈은 엄지손으로 입이 삐죽 튀어나온 지호의 뒷목을 꾹꾹 눌렀다.
“식후 담배는 괜찮아. 위의 연동 운동을 도와서 소화하는데 좋거든.”
“어?”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다. 담배가 백해무익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
“식후빵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그러고 보니 그렇다. 담배는 밥 먹고 나서 피는 게 제일 맛있다던데……. 지호의 얼굴은 여전히 의심에 가득 차있었지만 지훈은 담담히 담배 연기를 흡입했다.
“커피점에서 너랑 친하다던 종업원 이름이 이태일이었지.”
“그건 왜?”
갑자기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오는 건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켕기는 구석이 있어 지호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지훈은 더 필 수 있는데도 긴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기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지훈의 옆모습은 가로등의 불빛으로 의미심장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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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에 얼마나 써야하는지 고민되네요 ㅠ.ㅠ.... 끊는 타이밍을 못잡겠어서 애매하게 끊어봅니다 ;;
p.s. 오늘 블락비 티저 대~~박 ㅠㅡㅠ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