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는 어설프지만 나름의 정성을 쏟아 부어 리본까지 달아 곱게 포장한 선물을 보며 눈을 빛냈다. 물건에 발이 달린 게 아니니 어디 도망갈 일이 있겠냐만은, 삼십분 간격으로 가방을 열고 살펴보게 된다. 저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오늘 무슨 날이냐며 살갑게 물었다. 자신의 입이 귀에 걸린 탓이다. 지호는 아무 일 없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 없다고 정말 아무 일 없을 리 없다.
오늘은 지호와 지훈이 사귄지 22일이 된 날이다. 신세대 용어를 빌려 쓰자면, 투투데이. 기념일 챙기는 건 닭살 돋고 오그라드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지호였지만, 지훈은 특별하니까 좀 유치해도 괜찮다 생각했다. 백화점을 다섯 번 넘게 돌며 고민한 끝에 지포라이터를 샀다. 지호는 지훈이 담배 피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지만, 어차피 끊으라고 잔소리해도 지훈은 끊지 않을 성미였다. 어차피 피는 거 필 때마다 자신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 골랐다. 지호는 일하다 말고 또 가방 안을 들어다보며 흐흐 웃음을 흘렸다. 백금으로 섬세한 문양이 수놓아진 지포라이터는 백마탄 왕자님 같은 지훈의 이미지와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지호는 선물을 풀고 기뻐할 지훈의 얼굴을 마음속에 그려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언제 선물을 줘야할까. 타이밍을 잘 골라잡아야 하는데 말이야. 밥을 먹고 회사 밖을 거닐면서 턱을 쓸던 지호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태일이 일하는 커피점에 와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마다 놀러갔던 게 습관화 돼서 무의식중에 여기까지 왔다. 며칠 전에 있던 고백 사건 때문에 불편해서 본의 아니게 피했었는데……. 코앞까지 와서 돌아가는 것도 우습다. 지호는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갓 볶은 신선한 원두 향이 코를 찌른다. 커피를 주문하는 김에 겸사겸사 태일을 찾으러 눈을 도르르 굴리던 지호는 의외의 인물과, 의외의 조합에 놀랐다.
표지훈이랑 이태일이 한 테이블에 앉아 웃으며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심장이 덜컹 거리면서 싸한 기류가 손끝부터 번져왔다. 지호는 찌푸린 채 손바닥을 내려 보다가 안으로 말아 쥐었다. 마비가 온 건지 저릿저릿했다.
“표지훈, 태일 형.”
똑똑. 테이블을 두드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웃음을 터트리던 태일이 정색하고 일어섰다. 못 볼 걸 봤다는 태일의 얼굴에 지호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지훈은 팔짱을 낀 채 지호를 주시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겁니까? 나만 쏙 빼놓고. 서운 한데요 이거.”
“아, 안녕하세요 지호 씨.”
태일은 눈을 깔고 작게 웅얼댔다. 이제 시선도 마주치지 싫은 건가? 솔직히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이태일과 표지훈과 삼자대면을 하는 건. 지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있는데 지훈이 태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태일 형, 좋은 사람이더라.”
태일 형. 너무나도 친근한 어조에 지호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자신이 바보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도 전이었다. 지호는 말더듬이처럼 어버버 거리다가 대충 웃어 넘겼다. 지훈의 미려한 눈이 핥듯이 태일을 바라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지훈을 끌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태일은 지호의 사나운 시선을 감지했는지 목에 둘러진 지훈의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농땡이 피우다간 혼나겠네요. 들어가 보세요.”
“알았어. 다음에 또 올게.”
지훈은 못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태일에게 인사했다. 무언의 벽이 올라와 지훈과 태일 앞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지호는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직도 손이 뻑뻑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소외감. 이 알싸한 감정을 뭐라고 부르더라. 지호는 빠르게 머릿속 사전을 뒤적거렸다. 질투, 외로움, 고독감.
“가자가자.”
정신없이 머리 굴리는 지호의 손을 잡고 지훈이 걸음을 옮겼다. 주인에게 개목걸이라도 차인 개처럼 지호는 끌려갔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점이라 난방이 되지 않는 바깥은 제법 쌀쌀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귀신 머리카락 같은 바람이 엉켜든다. 지저분한 낙엽 부스러기가 허공을 부유한다. 북쪽 툰드라로부터 밀려오는 추위에 대지가 얼어가고 생물은 죽어간다. 지호는 폐로 찬 공기를 깊게 흡입하며 지훈의 등을 바라봤다.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인데도 너무나 멀리 있는 것만 같다. 지훈이 갑자기 멈췄다.
“왜 그래?”
“어?”
“아까부터 계속 똥 씹은 얼굴이잖아.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혼자서 짜증내지 말고 알려줘야지. 지호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아…….”
지호는 발끝을 툭툭 찼다. 좀 전까지만 해도 투투데이니 뭐니, 사춘기 소년처럼 핑크빛으로 설렜는데 이게 뭐람. 꽁해있는 자신이 못마땅했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건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지호는 찬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랑 태일이 형이 너무 다정하게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울컥했나 봐.”
낯이 뜨거웠지만 솔직하게 불었다. 지호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오늘 우리 투투데이인 거 알아? 라고 묻고 싶었지만 혓바닥 아래로 꼭꼭 감췄다. 보지 않아도 지훈이 자신을 뜨겁게 응시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침묵이 깔린 둘의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흔들며 지나갔다.
“…누구를……데?”
“뭐라구?”
작아서 듣지 못했다. 지호가 반문하자 지훈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야, 추우니까 들어가자. 찜찜했지만 지호는 토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이 손을 잡아줬으면 했는데 먼저 돌아서 건물로 들어간다. 에휴. 지호는 손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지훈이 굉장히 차가운 비소를 흘린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지호는 등줄기를 오싹하게 하는 불안감을 뒤로하고 지훈의 잔상을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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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기도 귀찮고 옷 벗기도 귀찮다. 지호는 현관에 신발을 대충 벗어두고 곧장 소파에 파묻혔다. 눈을 감고 넥타이를 풀어 집어 던졌다. 단추를 세 개쯤 풀자 꽉 막힌 속이 좀 나아진다. 지훈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선물꾸러미는 가방에 그대로 넣어진 채였다. 점심시간 이후로 지훈과 저 사이에 죽 찬바람이 씽씽 몰아쳤다. 어딘가 어색했다. 지훈이 자기를 피하는 걸까.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자기가 지훈을 피했다. 무늬 없는 하얀 천장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굼뜬 동작으로 눈을 깜빡인다. 쳇바퀴에 갇힌 햄스터처럼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 먹은 솜처럼 축축 몸이 늘어졌다. 피곤에 찌든 안면을 손으로 덮고 시체처럼 누워있던 지호는 별안간 좋은 아이디라도 떠올랐는지 반색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곧 그의 손에는 휴대폰이 나타났다. 전화번호부에 들어가 엄지손으로 한참을 내리니 찾던 이름이 나온다.
[이태일]
명랑하고 밝은 태일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가수를 해도 좋을 법한 미성의 목소리는 청량하고 심신을 다독여준다. 며칠 전 있던 태일의 고백을 곱씹으며 지호는 통화버튼을 누를지, 말지 고민에 빠졌다. 평소처럼 지내고 싶지만 태일에게 너무 부담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호는 끝내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밤이 늦었는데 태일이 받을까? 왠지 받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든다.
-지호 씨?
태일이다. 지호는 비집어 나오는 미소를 눌러 담으며 입을 뗐다.
“뭐해요 지금?”
-아… 자려고 잠옷 갈아입었어요.
잠옷이라? 지호는 잠옷을 입은 태일을 상상해봤다. 태일이라면 동물 잠옷을 입고 있을 것 같다, 토끼나 강아지 같은 거…… 귀를 잡아당기면 얼굴이 딸려 올라가려나. 귀엽겠다.
“잠옷 어떻게 생겼어요?”
지호의 물음이 너무나 뜬금없었는지 잠시 수화기 저편의 말이 끊겼다. 분명히 당황하고 있을 거다. 백설기 같은 두 뺨이 붉어졌겠지. 지호는 천천히 호흡했다.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새벽의 여명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 역시 태일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그냥… 티랑 추리닝 바지에요.
한참 후에야 태일이 조그맣게 공시랑댔다. 지호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며 소파 밖으로 삐져나온 다리를 굽혔다. 태일 형, 나 옷 갈아입기가 너무 귀찮아요. 그래서 그냥 정장차림으로 누워있어요. 태일이 종달새 같은 음색으로 지저귀었다. 불편하잖아요. 얼른 갈아입어요! 지호는 장난 끼가 동했다.
“형이 갈아입혀주면 좋을 텐데.”
느리게 덧붙였다. 손 하나 꼼짝 하기 싫거든요. 건전지 나간 로봇 알죠? 제가 딱 그 상태에요. 지호는 인정했다. 지금 그가 태일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걸, 어린애처럼 애교를 피운다는 걸. 지호는 비좁은 소파에서 몸을 뒤척였다.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지훈과 있으면 체면을 차리게 된다. 아무래도 이쪽이 한 살이나 더 많으니 본능적으로 형 노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마음을 감추고 페르소나처럼 얼굴에 가면을 쓰게 된다. 지호는 스스로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인간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면에 태일과 있으면 청정한 1급수 물처럼 투명해지고 솔직해진다. 할 말, 못할 말 구분 없이 막 던지는 게 문제지만.
-그, 그렇게 말해도…….
“장난이에요 형. 그냥 그만큼 피곤하다구요.”
-회사 일이 잘 안 풀려요?
“네에. 맨날 힘들지만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힘들었어요. 과장은 여전히 만만한 저를 갈구고 여사원들 모여서 뒷담화 하는 것도 질리고 표지훈도…….”
지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딱 다물었다. 아무리 태일이 친형 같고 착하다 해도, 애인 문제를 언급하면 안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건, 자신을 사랑해주는 태일에게 베푸는 기본적인 예의였다. 휴대폰을 들지 않는 손으로 바닥을 손톱으로 드드드 긁었다. 장판이 손톱 모양대로 찌부라지며 흔적을 남겼다.
-표지훈, 그 사람이 지호 씨 애인이죠?
어떻게 알았지? 지호는 한 번도 태일에게 자신이 사귀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없었다. 당황스러워 하는 지호의 심리를 눈치 챘는지 태일이 흐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늘 지훈 씨랑 지호 씨랑 같은 넥타이를 하고 있었잖아요? 단순히 겹친 것 같지 않았어요. 커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둘 분위기도 그렇구요.
지호는 수화기를 꽉 붙들었다. 표지훈과 나 사이의 분위기가 어떤데요? 라고 묻고 싶은 제 입술을 꽈악 깨물며 참았다. 지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방석에 비빈 탓에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빈손으로 나머지 단추도 다 따서 셔츠를 뱀 허물 벗듯 바닥에 던져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밀물처럼 갑자기 피곤이 쏟아진다. 지호는 수화기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졸리다, 자야겠어요. 태일 형도 잘 자요. 태일은 다정다감하게 답했다.
-잘 자요 지호 씨. 좋은 꿈 꿔요.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협탁에 내려놓고 침대에 애벌레처럼 기어 올라갔다. 힘 빠진 손으로 벨트를 풀고 바지를 아무렇게나 벗었다. 불을 꺼야할 텐데 움직이기 싫다. 베개에 깊숙이 얼굴을 박고 빛을 차단했다. 좋은 꿈이라. 좋은 꿈에는 좋은 사람이 나오겠지? 그렇다면 내게 좋은 사람은 누굴까……? 시답잖은 의문을 가슴에 품은 채 지호는 꿈나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