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삼, 삼키로나 찌다니…….”
남자는 살면서 3번 울어야 한다고 한다. 태어날 때, 부모님 돌아가실 때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 그러나 나는 체중계를 보며 눈물을 삼킨다. 정말 한심하고 쪽팔리고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래 가끔가다 기계도 실수를 할 수 있는거야…….”
하며 스스로 위로해 봐도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시 체중계 위로 올라갈 용기도 없어서 나는 쓸쓸하게 돌아서 나간다. 문득, 인터넷 웹사이트 등에 흔하게 돌아다니는 짤방 하나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와, 정말, 아, 씹, 어떻게 하루에 4시간을 꼬박 일주일동안 운동했는데 도리어 몸무게가 늘어날 수 있을까! 지방들이 지 맘대로 세포분열을 하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나, 표지훈은 우울크리에 빠져 재생 불가 상태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친구들이랑 수영장 가기로 했는데… 그냥 가지 말까. 나는 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말랑말랑한 뱃살을 주물럭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만해도 이렇게 살이 찌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꽤 몸이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 아이였을 때니까 식스팩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키도 컸고 남자 놈들도 말은 안했지만 신체검사 날이면 근사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봤었…던 거 같으니. 운동을 좋아했고 물론 맛있는 음식도 좋아하긴 했지만 딱히 식(食)에는 취미가 없었기에 이렇게까지 몸이 불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다소 살이 붙어있었고, 또 어느 날 거울을 보니 통통한 내가 들어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곰 같기도 하고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영……. 내가 여자라도 나 같은 남자와는 사귀고 싶지 않을 거 같다. 그래서 그런가? 난 여태까지 모태 솔로였다. 젠장. 나도 연애가 하고 싶어!
일의 심각성을 느끼고 살을 빼려고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오히려 운동을 시작하니까 더 살이 찌지 않는가. 날씬 하기만한 부모님을 보면 절대 유전적인 이유는 아닐 텐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원인이란 말인지.
머리를 싸잡고 곰곰이 고민하다보면 그 대답의 귀결은 항상 같은 곳이었다.
ㅡ우지호.
그래, 우지호. 그 새끼가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
우지호는 나보다는 한 살 위인 형인데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옆집으로 이사 와서 아직까지 이웃으로 지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우리 부모님과 그쪽 부모님들끼리는 사이가 좋은데 정작 그들의 자식은 철천지한의 원수나 다름없다. 아, 생각만해도 지긋지긋하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새끼가 첫 만남 때 내게 한 말을 잊지 못한다.
“너, 너무 잘생겼어.”
칭찬이라고 하기에는 잔뜩 얼굴을 찡그려서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질투라고 보자니 그건 더 아닌 것 같았다. 우지호의 그 미묘한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쩔쩔매다가 겨우 한 말이 고마워, 였던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존나 후회된다. 미친. 내가 왜 그런 착한 짓을 했지? 아, 나는 너무 순해 빠졌다.
우지호는 악마다, 사악한 악마.
본인은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있지만 살이 찐 이유는 필시 그 새끼 탓일 거다. 왜냐면…….
“지훈아~ 프렌치 토스트 먹어야지.”
호랑이도 말하면 온다더니 쾅 하고 방문이 열리며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토스트를 들고 우지호가 등장했다. 몸무게에 충격을 약 200%정도 받고 그 후로 계속 굶었더니 냄새가 가히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 그래도 안 돼. 난 살 빼야 한다구.
“네가 좋아하는 베이컨 잔뜩 올렸어.”
“형, 저 이제 아무것도 안 먹을 거예요.”
내가 어떤 결심으로 한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놈이 유유히 내 앞에 쟁반을 올려놓는다. 바나나에 생크림 시럽까지…… 아, 안 돼. 보면 안 돼 표지훈!
“한참 성장기에 그게 무슨 소리야. 자, 어서 먹어.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건데.”
이 양반이 안 먹는다니까 자꾸 그러네. 나는 생글생글 웃는 지호를 뒤로하고 푸욱 한숨을 쉬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칼로리 높은 음식들만 줄줄이 내놓는데 내가 살이 안찌고 배기겠냐고. 도대체 장래희망이 요리사도 아니면서 이런 걸 먹이는 이유가 뭔지. 어릴 적에는 그저 착한 형이구나, 하며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좋아했지만 머리가 좀 큰 지금은 다르다. 이것저것 맛난 걸 잔뜩 해들고 찾아오는 이유가 단지 귀여운 옆집 동생을 챙겨주고 싶은 순수한 호의가 아닌 다른 음험한 꿍꿍이라고 유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르겠다만…….
“저 진짜 안 먹어요. 차라리 먹느니 콱 죽어버릴 겁니다.”
이제 내 결의가 얼마나 비장한지 알겠지? 나는 우지호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손도 안대겠다는 의사를 강경히 밝혔다. 우지호는 그런 나를 멀뚱히 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우, 웃는게 저렇게 무서울 수 있다니! 과연 우지호답다.
“우리 지훈이 왜 또 그렇게 퉁퉁해있어. 자꾸 그러면 나 화낼 거야.”
화낼 거야- 라는 말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으면 과장일까. 지금이야 방긋방긋 웃고 있지만 놈의 본색을 아는 나로서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우지호는 이중인격자로 금세 손바닥 뒤집듯 자아를 뒤집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안 먹는다니…….”
“아~”
거절하니까 손수 떠서 주신다. 적당히 노릇하게 익어있는 토스트를 보며 나는 꿀꺽 침을 삼키다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표지훈.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지?”
서서히 저음으로 내려가는 게 심상치가 않다. 나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자, 자꾸 이것저것 먹이지 말란 말이에요! 저 운동했는데 삼키로나 쪘다구요. 형이 그런 내 심정을 코딱지만큼이나 알아요?”
나는 봤다. 내가 살쪘다고 하니까 만족스럽게 웃음 짓던 놈의 얼굴을. 물론 0.07초 만에 빠르게 사라졌지만 워낙 어릴 적부터 놈과 부대끼고 살아온 나, 표지훈이 아니던가. 저 정도쯤은 금방 캐치해낼 수 있었다.
“흐음, 그래? 안됐네.”
전혀 안 그런 얼굴로 그런 소리 하지마. 속으로는 놈에 대한 욕으로 책 한권을 쓰면서 겉으로는 어설프게 웃는 나를 보더니 우지호가 꼬추 달린 남자지만 정말, 정말 예쁘게 웃으며 일침을 가했다.
“그래도 먹. 어.”
02
친구들이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우지호를 보면 꼭 한 번씩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육년 넘게 알았다면서 왜 존댓말 해? 나이 차이도 하나밖에 안 나잖아.”
그럼 나는 분노에 떨며, 그러나 친절히 경고해준다.
“네놈들이 겪어봐라. 그 새끼가 얼마나 무서운 공포의 대상인지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군가 우지호에게 호의를 갖고 접근하면 그 사람의 바짓단을 붙잡고 말릴 준비가 되있는 사람이었다. 그 새끼가 얼마나 약았고 치졸하고 무자비한데. 그러나 더러운 외모주의가 만연한 사회는 아무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려하지 않았다.
우지호. 믿을 수 없겠지만 그놈은 겉보기에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지만 대학에서도 인기 폭발이라고, 줄 서있는 여자들이 어찌나 긴지 끝이 안 보인다고, 심지어는 같은 남자끼리도 끌린다고. 내가 대놓고 우지호에게 너 때문에 살쪘어! 하며 엉엉 떼쓸 수 없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놈이 한 음식을 똑같이 먹는데 그 새끼는 안찌고 나만 뒤룩뒤룩 찐다는 건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세상에 대고 맹세하건데 현재의 내가 된 건 분명히, 백퍼센트! 우지호 그놈 탓이다.
쾅쾅쾅쾅, 쾅쾅쾅쾅
입맛도 없고, 체중계 사건 이후로 운동도 내키지 않아서 침대에 뒹굴뒹굴 구르며 만화책이나 보는데 노크 치고는 굉장한 소음이 들렸다. 무시하고 만화책이나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호 새끼의 집 같아서 궁금증을 못 이겨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 경이 형?”
“오, 표지훈. 오랜만이야~”
노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박경, 경이 형이었다. 경이 형은 지호 새끼와 친하게 지내는 무리 중 한명이었다. 우, 우지호랑 어울릴 생각을 하다니. 착하고 순해 보이는 경이 형에게 대체 어디서 그런 담력이 나오는지 8대 미스테리다. 어쨌든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과 맞지 않게 경이 형은 착하고 다정다감했다.
“살 더 찐 거 같네?”
저렇게 대놓고 솔직한 거만 빼면. 나쁜 의도가 아닌 걸 알지만 거 참 듣는 입장에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저런 소리는 하도 들어서 크게 데미지 먹을 것도 없다. 대신 살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지호에 대한 원망을 차곡차곡 키워나가는 중이다. 언젠간 이 모욕, 치욕 전부 몰아서 갚아주겠어.
“그런데 우지호 찾는 거예요?”
“아, 응. 뭐 돌려받을 게 있어서.”
“지금 아마 없을 거예요. 이 시간대에는 과외 하러 가거든요.”
으헉! 그런 거야? 경이 형이 푸욱 한숨을 쉬는 걸 보며 나는 등을 토닥여줬다. 헛걸음 하셨네요.
“아우, 이 새낀 왜 휴대폰을 꺼놓고 지랄이야? 휴대폰이 뭐야. 연락할 때 쓰라고 있는 거잖아? 연락 안할 거면 뭐하러 통신비 따박따박 물고 있냐. 이 멍청한 새끼.”
“제가 돌아오면 형이 찾는다고 말씀드릴게요.”
“진짜? 아싸. 고마워, 지훈아. 역시 넌 좀 짱이야!”
빵야- 하고 총 쏘는 자세를 하며 경이 형이 좋아라 하자 나도 따라 씩 미소를 그렸다. 참 좋은 사람인데 어쩌다가 우지호랑 엵혀서… 쯧쯧.
“그런데 역시구나.”
“네?”
뭐가 역시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경이 형에게 궁금하다는 눈빛을 마구마구 던지자 경이 형이 조금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우지호가 널…….”
“박경. 여기서 뭐해?”
진지하게 듣고 있는데 갑자기 우지호가 나타났다. 으악! 놀래라. 대체 이놈은 어디서 이렇게 불쑥불쑥 솟아나는 거야. 도청기라도 붙인 건 아닐까 의심된다.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경이 형은 못 볼 거라는 걸 봤다는 듯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서 우지호를 손가락질한다.
“뭐, 뭐야 과외 갔다면서!”
“아, 오늘 학생이 스케쥴이 안맞다고 다음에 하자고 했거든. 지금 편의점 다녀오는 길. 근데 뭐 내 얘기하는거 같던데?”
“어, 어, 어? 그, 그, 그, 그랬나? 아닌데. 지훈아! 아니지? 우리 다, 다른 얘기 했는데.”
그렇게 말을 더듬으면 유치원생도 거짓말인거 알겠어요, 형…….
“네.”
“그, 그봐! 어우 오늘 날씨가 왜이렇게 좋담? 아하하하하, 지호야 나 먼저 가볼게. 여기저기서 어찌나 러브 콜이 들어오는지. 그럼 굿바이! 사요나라~”
경이 형은 자기 할 말만 다다다 내뱉더니 재빨리 퇴장했다. 저 새끼한테 뭐 받을 거 있다고 하지 않았나? 경이 형이 온 목적을 곱씹고 있는데 갑자기 뺨에 따듯 야릇한 게 느껴졌다.
“뭐, 뭐에요!”
뭔가 싶어서 보니 저 미친놈이 내 볼에 뽀, 뽀, 뽀뽀를 한 것이다! 가끔 이러는데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익숙해지면 더 안 되지. 이거 성희롱이라고. 대체 의도가 뭐냐, 뺨을 부여잡고 당황해하는데 놈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한다.
“뭐 묻어 있어서.”
……그럼 말로 해줘도 될 거 아냐! 그보다 정상이라면 손으로 떼어주는 거 아냐? 더럽게 무슨 입으로 닦아! 으아아!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것들을 속으로 고래고래 외치는데 놈이 귀엽다는 듯 내 볼을 검지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눈을 찡긋했다.
“맛있는 거 해가지고 갈게. 기다려.”
소원인데 제발 오지 말아줘.
03
지호 새끼와 한바탕 하다 보니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거 참 상종하기도 싫은 놈인데 막상 같이 있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갓 샤워를 한 터라 물기가 뚝뚝 흐르는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며 내 방으로 걸어왔다. 옷을 입으려 서랍에 손을 뻗는데 문득 선반에 놓인 휴대폰에 시선이 미쳤다.
으음…….
왜 오늘 낮에 경이 형이 한 말이 궁금해지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뭐 크게 대단한 거라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집었다.
[형 아까 저한테 하려던 말이 뭐였어요? 우지호 나타나기 전에요]
옷을 다 입고 보니 1이 사라지고 답장이 와있었다.
[그거?어...꼭알아야할까?]
그렇게 말하면 궁금해지는 게 당연하잖아. 나는 더 흥미로워졌다. 대체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낮에 경이 형의 태도를 봤을 때는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있는 거 같은데. 잘하면 우지호의 약점도 캐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신나게 타자를 쳤다.
[네! 네!!!!!! 궁금해서 잠도 안와요!!]
[으...지호가알면죽이려들텐데 ㅜㅜ]
[괜차나염ㅎ 지가 신도 아니고ㅋㅋ 암소리도 안할게여!]
오오, 뭔가 감이 좋다. 드디어 이번에야 말로 놈의 약점을 알아내는 건가! 놈이 이사 온 5년 동안 당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흘러간다. 이제 나, 표지훈 시대다. 나는 야동볼 때보다도 더 흥분해서 눈이 빠져라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그럼..그럼진짜비밀이야??ㅠㅠ]
[당근ㅎㅎㅎㅎ]
뭐지? 뭘까? 뭔데 그런 걸까?
수백, 수천, 수만 가지를 상상했다. 우지호 그 싸이코, 악의 화신이 나에게 꽁꽁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미 볼장 다 본 사이에 숨기려 드는 거라면 분명히 내게는 들키고 싶지 않을 거라는 뜻이고 그걸 알아낸다면 이렇게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대체 얼마나 굉장한 콤플렉스 길래 부모님도 모르는 본성도 내게 보인 주제에 감추고 다녔던 걸까. 드디어 복수의 탐임이 시작되는가 싶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어졌다. 으하하하하.
우지호를 닮은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경이 형의 답을 봤을 때, 그러나 전혀 내가 예상치 않았던, 원하지도 않던 글이 쓰여 있었다.
[지호가 너 키워서잡아먹을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