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배달을 마치고 나면 일곱 시 반 정도가 된다. 차가운 새벽 기운이 물러간 하늘을 바라보며 지호는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체력 고갈이 여실히 느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가 간질간질 한 것이 귀찮게 자꾸 기침이 터진다. 먼 옛날에 브레이크가 고장 난 형편없는 자전거를 기둥에 묶은 지호는 ‘천사의 유혹’이란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심히 표절성이 느껴지는 간판을 단 가게는 동네 구석에 붙박여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점이다. 딱히 눈에 띄지 않는, 특이할만한 점이 없는 가게였지만 워낙 오랫동안 있어서 친근함 하나로 동네 주민들이 심심찮게 잘 찾는 곳이었으며 또한 지호의 아르바이트 장소기도 했다.
“형, 나 왔어요.”
에에취! 이어서 지호는 요란한 기침을 덧붙였다. 막 오픈 하려던 참인 듯 대걸레로 가게를 닦던 태일이 고개를 돌렸다.
“감기 걸린 거야?”
“에, 에, 에취! 모르겠어요, 킁. 아 갑자기 이러네. 에취! 걸레 주세요. 제가 닦을게요.”
지호가 태일의 손에서 대걸레를 빼앗고 박박 바닥을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아침에 잠깐 비가 왔었는지 지호의 머리카락에 이슬처럼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너 열 나는 거 같은데? 정말 괜찮아?”
“예. 뭐 어디 다치지만 않으면 되요.”
“무슨 말이 그래? 너 진짜 아파 보여.”
태일이 사뭇 심각한 얼굴을 했지만 지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더 힘차게 손을 움직였다. 저 놈의 고집은. 태일은 요령 없이 무식하게 착하고 올곧은 지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지호에게 청소를 맡긴 태일은 창문 쪽에 있는 어항으로 걸어갔다. 커피 가게에 웬 어항이냐면 그건 아마 주인의 취향 탓이랄까?
“우지호. 너 또 아침 안 먹었지?”
물고기 밥을 챙기면서 생각났다는 듯 태일이 지호를 보자 열심히 청소하던 지호의 몸이 딱 굳는다. 헤헤- 지호가 다소 얼빵한 웃음을 흘리자 태일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아침밥 좀 먹으라고, 먹으라고 일러도 도무지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철없는 개구쟁이가 딱 이럴까.
“몸 관리 좀 제대로 하라고 내가 몇 번 말해, 응? 네 몸 네가 챙기지 아무도 대신 못해줘. 감기 걸리고 싶다고 대놓고 광고를 하는구나.”
쯧쯧 하며 태일이 혀를 차고 아침에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지호는 따끔한 잔소리에 쩔쩔 메다가 태일이 건넨 샌드위치를 받았다. 말은 이렇게 쏴붙여도 실은 누구보다 저를 생각한다는 걸 지호는 잘 알고 있었다.
“한창 팔팔한 나이인데 그걸로 식사가 제대로 되겠냐만은…… 젊음도 잠깐이야. 미리미리 챙겨둬야 한다, 너?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널 보면 아주 답답해 죽는다, 죽어.”
태일의 말처럼 지호는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하루라도 멍 자국이 없던 적이 없었다. 하얀 피부였기에 유난히 붉은 상처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헤헤.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나왔으니 어쩌겠어요.”
태일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찌릿 노려봤지만 지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태일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 겉보기엔 멀쩡한 지호는 사실 유전자 변이에 의한 혈우병을 앓고 있다는 걸. 평생 병실에 갇혀 지낼 수준은 아니었지만 살짝 베인 것도 한 시간에 걸려서야 피가 멈췄고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피멍이 들곤 했다. 한번 다치면 낫는데도 한참 걸렸고. 그래도 그 외에 다른 하자는 없었기에 지호는 저의 몸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지체장애인들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수준이라고. 그러나 뱀파이어 지훈과 동거하면서 그런 지호의 믿음에도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네 피에서는 향긋한 꽃향기가 나.’
지훈이 틈만 나면 하던 소리였다. 아카시아 향이였나, 히아신스 향이였나 그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지호는 지겹도록 자신의 피를 보았지만 그런 냄새가 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뱀파이어식 애정표현인 줄 알았다. 피와 꽃향기라니 무슨 조합이 이렇게 싸구려야. 차라리 달콤하다면 이해를 해줄 수 있겠다.
‘비릿한 혈향 밖에 안 맡아지는데?’
‘그건 네가 인간이라서 그런 거고.’
‘뭐야. 뱀파이어는 피에 더 민감하다는 거야? 냄새도 구별할 만큼?’
‘일단은 주식이니까. 인간은 호감의 척도가 외모라면 우리는 혈(血)이지. 피가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냄새가 좋은지, 얼마나 목 넘김에 좋은지에 따라서 관심의 레벨이 달라져. 인간이 잘생긴 사람에게 더 끌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하면 알아들을까?’
‘……이해가 안 돼.’
“우지호. 청소는 그만하면 됐고 곧 손님 올 시간이니까 앞치마나 얼른 입어.”
“네네.”
갑작스런 태일의 주문에 지호가 빳빳이 고개를 세웠다. 변두리 가게면서도 이런 면에서 태일은 꼼꼼했다. 상념 한 방울 까지도 털어낼 듯이 휙휙 지호는 머리를 흔들며 재빨리 앞치마를 걸쳐 입었다. 집중! 집중하자, 우지호. 짝 소리 나게 제 손으로 뺨을 친 지호는 빠릿 하게 일에 몰두했다.
§
‘으앗, 또 왔다.’
동네 PC방 주인의 딸인 유리는 재빨리 시계를 쳐다봤다. 9:00am. 오늘도 일분의 오차도 없이 칼 같은 시간에 등장한 그를 보며 유리는 헤벌쭉 웃었다. 비록 이곳에 있는 시간은 채 한 시간이 넘지 않지만 그는 유리의 팍팍한 하루를 촉촉하게 적셔줄 눈보신, 비타민, 엔돌핀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런 촌구석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초절정 꽃미남이었기 때문이다. 소장용으로 몰래 찍은 것도 꽤 된다.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유리를 아쉽게 하긴 했지만.
벌써 한달쯤 됐나? 대학교 졸업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백조로 놀고 먹냐면서 아빠는 PC방 알바생으로 유리를 강제로 떠밀었다. 꽃 같은 이십대 청춘을 쾌쾌한 PC방에서 썩어야 하다니! 유리는 만일 아침마다 찾아오는 그가 없었다면 때려 쳐도 진작에 때려 쳤을 거라며 이를 갈았다. 물론 불곰처럼 노하신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기도 했지만.
“한 시간이요.”
천원을 건네는 그의 손을 유리가 너무 뚫어지게 봤을까,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가씨. 안 받아요?”
“아, 아, 네!”
꺄악. 오늘은 두 마디 이상 말해봤다며 기뻐 죽는 유리를 두고 그는 늘 가던 지정석에 앉았다.
“흐음.”
유리가 사모해 마지않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는 그, 표지훈은 컴퓨터를 켜자마자 증권으로 들어갔다. 9시를 넘긴 터라 벌써 주식시장은 주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강 눈으로 여기저기 살피던 지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조짐이 좋은 걸 보니 필시 상승할 노선이다. 몇 가지를 더 훑어보던 지훈은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겨우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아, 안녕히 가세요!”
알바생의 인사에 지훈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휴대폰을 꺼낸 지훈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막 3번 정도 갈 참이었다. 지훈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나 찾아?”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노랗게 탈색한 머리를 한 남자가 지훈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이다.
“뭘 여기까지 왔어.”
“지훈님의 호출이신데 뭔들 못할까요~?”
상대방이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지훈에게 흔들며 서글서글한 미소를 흘렸다. 쯧. 지훈은 낮게 혀를 차며 종료버튼을 눌렀다. 바지에 손을 넣고 걷는 지훈의 뒤로 상대가 어미 새를 쫓는 병아리인 양 졸졸 따라왔다.
“음, 어디로 갈래요? 우리집 아니면 근처 호텔? 모텔? 여관방?”
“…….”
노래하는 듯 신나게 종알대던 상대는 짙게 흐려진 지훈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쿡, 웃음을 삼켰다. 노골적인 갈증이 확 느껴져서 입에 침이 고였다.
“뭐, 정 급하면 골목길이라도 상관없고.”
양 검지 손가락을 툭툭 치며 말하자 지훈이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선다. 싸늘한 지훈의 얼굴에 상대가 아차 싶었는지 혀를 쏙 내밀었다. 오랜만의 호출에 기분이 붕 떠있었다. 나, 너무 나섰나봐.
“쿡. 그렇게 해줘?”
“…….”
“김유권.”
으스스한 지훈의 음성에 유권이 어색하게 볼을 긁었다. 체크무늬 남방에 물 빠진 반바지, 삐뚤삐뚤하게 눌러 쓴 비니 덕에 원래의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보이는 유권은 지훈의 기분을 가늠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고른 치아의 밑으로 짓겨진 입술에서 피가 송글 맺혔다. 순식간에 깊은 혈향이 주변으로 확 퍼진다. 피에 반응한 지훈의 동공이 붉게 부풀었다.
“지훈씨가 원한다면요.”
입술을 할짝이며 유권이 윙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