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닥의 냉기와 소란스러움에 당신은 퉁퉁 부은 눈을 꾸역꾸역 뜹니다. 허벅지의 주인은 당신을 보더니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당신의 양 뺨을 감쌉니다. 따뜻한 온기가 볼에 느껴집니다. 당신이 얼떨떨하게 낯선 남자를 바라보자, 그는 다정한 눈빛을 합니다.
"일어났어요?"
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전부 입을 다물고 당신을 우르르 바라봅니다. 당신에게 따갑게 꽂히는 여러 쌍의 시선. 눈을 몇 번 깜빡인 당신은 낯선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납니다. 하지만 남자는 부드럽게 손깍지를 껴옵니다. 당신이 도망갈까, 애타는 몸짓. 그의 눈빛에 걱정이 어립니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순수하고도 어딘지 처량한 어조. 그에 되려 당신이 당황하고 맙니다. 가느다란 손길로 당신의 손을 어루만지는 그는 이내 당신과 시선을 맞춥니다. 당신은 그를 향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죠. 당신의 물음에 모인 남자들의 눈매가 동질감으로 일순 유해집니다. 그 사이 당신은 일어나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슬쩍 훑어봐도 남자들은 직업도 나이도 제각각인 듯, 옷도 생김새도 각자 다릅니다.
"너야말로 뭐야?"
당신이 눈으로 남자들을 파악하는데, 갑자기 한 명이 잔뜩 화난 어투로 당신을 압도하려 듭니다. 유해지긴 했어도 꽤나 다부지고 화난 얼굴을 한 남자. 그의 새카맣고 진한 눈썹이 분노를 표현하듯 꿈틀거립니다. 당신 역시 남자의 말에 톡 쏘아붙입니다. 나도 잘 모르겠으니 설명을 먼저 해달라고요. 그러자 여전히 당신의 손을 조물대고 있던 남자가 당신을 부드럽게 품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러지 마요. 다들 예민할 거예요. 당신도 방에 갇혀있었죠?"
당신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 둘씩, 자기들도 마찬가지라며 입을 엽니다. 그 중 제일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는 아예 통명성까지 합니다. 눈이 특히 아름다운 그는 팔짱을 끼며 당신을 내려봅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가시 돋힌 장미, 남자는 그것을 의인화 해둔 것만 같은 사람입니다.
"난 이성종이야.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물어봐."
"…어……, 그럼 우리… 는 왜 여기 있나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성종. 큼, 그 말에 목을 가다듬은 당신은 곧바로 질문을 던집니다. 형편 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부끄러워 당신은 살짝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자 거만하게 픽 웃은 성종을 입을 열려는 듯 자리에 앉습니다. 그 사이, 눈이 커다란 남자가 성종 대신 답하며 대화에 끼어듭니다.
"우리도 몰라. 일어나보니 여기였어. 벽을 뚫고 나온 건 네가 처음이지만? 나가려면 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나봐."
남자는 손을 뻗어 방 한 켠의 문을 가리킵니다. 당신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저 한 켠에 있는 문으로 다가갑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니까요. 저들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왠지 오랫 동안 같이 있는 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잘 세공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꽤 화려한 무늬의 문, 그 가운데에는 큼지막하게 수수께끼가 붙어있습니다. 내용은 꽤나 어렵습니다. 당신이 수수께끼 푸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 더 그런 듯 합니다. 당신은 다시 7명이 있는 원으로 돌아가 앉습니다. 당신이 가서 앉자, 남자들은 나름 경계를 풀었는지 하나둘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인원수가 적지만은 않아 꽤나 장황하기도 한 자기소개는 한참 후에야 겨우 끝납니다.
이를 간단히 특징과 함께 정리하자면,
거만한 얼굴을 한 남자는 성종, 묘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주변을 살펴대는 사람은 명수, 연신 사탕을 오독오독 씹고 있는 건 동우, 남들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꼭 한 마디씩 덧붙이는 이는 성열, 여전히 화난 얼굴로 앉아있는 사람은 호원, 나른한 얼굴로 눕다시피 늘어져 앉아있는 남자는 우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과 떨어질 세라 찰싹 붙어 앉아 손을 잡는 사람은 성규.
대충 통성명이 끝나자 당신도 이름을 터놓습니다. 그러자 우현이 몸에 두르고 있던 두터운 이불 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당신 쪽으로 던집니다.
"이거 봤어, 아가?"
당신은 성열에게 뺏기기 직전 겨우 종이를 낚아챕니다. 씨근덕거리는 성열을 뒤로 한 당신은 재빠르게 양피지를 펼쳐 읽어내려갑니다. 안에 쓰인 내용은 아까 본 것과 똑같습니다. 유려한 필기체의, 외국어 문장.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당신은 보긴 보았지만, 뜻을 모른다고 답하며 고개를 젓습니다. 그러자 성열이 놓칠 세라 버럭 외칩니다. 자기가 그 문장의 뜻을 안다면서요. 성열의 당찬 고함에 눌린 당신이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자, 그는 아까의 기세와는 달리 우물대다가 입을 엽니다.
문장은,
'모든 희망을 버려라,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라는 뜻이랍니다. 희망을 버리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요. 기분 나쁜 말에 당신은 내심 충격받지만 이내 일어섭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당췌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신은 당신 발로 들어온 것도,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문장에 쓰인 내용과는 전혀 다른 입장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이 곳을 벗어나기 위해 나아가기로 합니다. 일단 이 곳에서 나갈 길은 나아가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당신은 문으로 다가가 다시 수수께끼를 살펴봅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만, 형태나 크기가 모두 다른 것. 다들 그 사람은 틀림없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고, 이 사람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오늘 손에 넣었다고 생각해도 다음 날에 사라지기도 하는 그런 것은?"
당신은 문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며 문장을 천천히 곱씹습니다. 마치 요리를 맛보는 것처럼 혀에서 한참 문장을 굴리던 당신은 문득 '행복', 이라고 중얼거립니다. 그 순간 ,성열이 당신을 확 밀쳐내고 먼저 답을 입력합니다. 별안간 밀쳐진 당신은 바닥에 구르고, 당신의 답은 정답인지 문은 삐-, 하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립니다. 성열은 쓰러진 당신을 보며 보일락 말락한 승리의 미소를 짓죠.
무슨 저리 무례한 사람이 다 있을까요. 성규가 다가와 바닥에 나동그라진 당신을 일으켜줍니다. 그 사이 성열은 이미 넘어가버리고 없네요. 성규에게 안기듯 부축을 받아 다음 방으로 넘어간 당신은 부딪힌 곳을 슬슬 문지릅니다. 그 때, 어느새 쫓아온 명수가 당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습니다. 어깨도 아까 넘어질 때 부딪혔는지 욱신거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 방보다 이 곳이 훨씬 쾌적하고 깔끔하며, 화려하다는 점입니다. 저 쪽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다 넘어오자 뒷편의 문이 쾅 소리와 함께 닫혀버립니다. 모두 뒤를 돌아보지만, 이내 신경 쓰지 않기로 합니다.
당신을 졸졸 따라오던 명수는 어느새 화려한 모습에 이끌려 어디론가로 사라집니다. 사탕을 오독오독 먹고 있던 동우 역시 사라집니다. 배고파……. 동우가 남긴 중얼거림은 홀 내부에서 조용히 메아리 치다가 가라앉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커다란 문으로 다가가 수수께끼를 살피죠.
'모두들 엄청 많이 가지고 있는 것. 필요한 때에는 빠르게 없어지고 필요 없을 때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없어지는 것. 그러나 부족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남아돈다고 하는 사람도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은?'
뭘까. 알쏭달쏭한 문장에 당신은 긴가민가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저쪽에서 명수와 동우가 나옵니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잔뜩 걸친 명수와, 다양한 음식을 한 아름 안은 동우. 마침 시장했던 터라 모두 그 쪽으로 가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방 한 켠을 가득 채운 커다란 벽시계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똑딱거리며 계속 흘러갑니다…….
이윽고 배를 가득 채운 이들은 명수가 하나씩 던져준 열쇠를 가지고 각자 방으로 흩어집니다. 당신도 손에 들린 황금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죠. 당신의 방은 평범하지만 넓고 쾌적합니다. 당신은 곧장 침대로 직행해 너른 침대에 풀썩 눕습니다. 씻지 못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꿉꿉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곧 나갈 거니까요. 스스로 위로와 불안을 오가던 당신이 까무룩 잠이 들 무렵, 조금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유리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 발길질과 고함을 지르는 소리.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아 당신은 문으로 다가가 문을 빼꼼히 열어봅니다. 복도에는 화려한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명수와 작은 스낵류를 연신 집어먹는 동우, 여전히 나른한 눈의 우현이 나란히 서서 불같이 화를 내는 호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종은 소란에도 한껏 거만한 얼굴로 지나치고요.
그 때, 당신의 문 앞으로 얼굴이 불쑥 다가옵니다.
악, 당신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성규가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와 당신을 일으켜줍니다. 당신은 얼떨떨하게 그의 부축을 받습니다. 성규는 놀란 눈의 당신을 다정하게 다독이죠. 그보다 한 발 앞선 그의 체취가 당신을 훅 덮쳐옵니다. 진득한, 화이트 머스크향.
"쉿. 많이 놀랐죠? 지금은 나가지 말아요, 위험해."
얼결에 당신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규는 햇살 같이 온화하게 웃으며 당신을 안아듭니다.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아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그. 성규는 당신을 침대에 눕혀줍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침대로 올라온 성규가 당신의 옆에 눕습니다. 폭신한 흰 이불이 당신과 성규의 몸에 눌려 바스락, 마른 소리를 냅니다.
"푹 자요. 힘들었을 텐데."
당신은 다정한 그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상황의 파훼법을 찾죠. 단순한 호의라기엔 왠지 끈적한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당신 바로 앞에 있는 인물, 성규. 당신은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얼른 돌아눕습니다……, 만 여전히 끈적한 시선과 분위기는 당신을 음습하게 잠식해옵니다. 침묵, 그리고 부담스러운 분위기가 팽팽하게 이어집니다. 결국 견디지 못한 당신은 어색하게 고개를 뒤로 돌리고, 마침 눈이 마주친 성규가 홀릴 듯 나른한 눈을 한 채 당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돌려 눕힙니다.
훅 닿아오는 그의 호흡이, 공중에서 맞부딪힌 시선이, 달큰할 정도로 뜨겁습니다. 저항할 틈도 없이 빙글 돌려눕혀진 당신은 눈 앞으로 다가오는 성규에 모든 사고를 정지하고 맙니다. 아,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가 사람이라면 이런 모습일까요.
당신과 성규는, 어떠한 사이도 아닙니다. 하다못해 친구 사이도 아닌, 오늘 만난 잘 모르는 사이. 평소였다면 쌩 지나쳐버렸을, 그런 인연. 그럼에도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이 정염적인 그의 눈빛, 제스쳐에 당신은 멍해집니다. 이 남자라면, 오늘 하룻밤을…….
작가의 말 :) |
안녕하세요, 달밤의 꽃구름입니다!
전 글보다는 분량을 조금 늘려봤어요. 브금도 바꿔볼까 고민했었는데 아무래도 하나의 시리즈인데 계속 브금이 바뀌면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브금 바꾸는 건 미뤘습니다.
그냥 시리즈마다 바꾸는 게 몰입에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번 글 올리고 나서 떨려가지고 댓글 제대로 보지도 못 했는데 의외로 제 똥글에 많은 독자님들이 괜찮다고 해주셔서 너무 기뻤어요 하나하나 댓 달아드리고 싶었는데 자까가 미친 놈인 줄 알고 다들 도망가실까봐 못 달아드렸어여...ㅠ.^ 하지만 댓글 다 읽어보았답니다...! 대신 이 자리를 빌어 한 번 더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사랑 받으세여 여러분. 두 번 받으세여.
오늘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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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온 나무 째인 낑깡 민트 여리 콩떡 구름 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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