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에~ | 첫번째, 두번째 글은 팬픽, 세번째 글은 빙의글입니다. 읽으시는 데에 착오 없으시길 바라요! 반응보기용 글이라 짧습니다. 반응 괜찮으면 데려오고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힐 글들이니 편하게 읽어주세요 ^.< 마지막 글은 암호닉분들께만 보내드릴 텍파용 특전입니다, 노잼이죠? 헤헿... (할말하않) 그냥 참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인피니트/현성/??] 안개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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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퍽, 내딛는 발걸음마다 하필 진흙탕이다. 소년이 메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소년의 맨발은 흙범벅이다 못해 피가 맺히고 있었다. 숨은 턱끝까지 차올랐고, 좁은 철창에 갇혀만 있어 연약해진 몸은 이미 한계를 지났다. 눈알까지 뜨끈한 게 이대로 터질 것만 같아 소년은 정신 없는 와중에도 눈을 비볐다.
소년이 나타난 나무뿌리를 헐떡이며 건너뛰어 마른 땅을 골라 밟았다. 늦은 밤, 뿌연 달빛 아래서 우수수 소리를 내는 아름드리 나무들. 그 사이로 짐승의 헐떡임과 인간의 욕지거리들이 간간이 들려온다. 숲을 뒤흔드는 불청객의 소음은 소년의 긴 머리칼을 휘어잡다 못해 숲의 바닥에 동댕이치는 것 같았다. 소년은 몸서리를 쳤다.
"젠장, 약삭빠른 놈! 어디 갔어, 빨리 개들을 보내!" "개들도 한계입니다, 후발대를 기다리는 편이……." "닥쳐! 다 같이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
숲의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그 끔찍한 목소리에 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쩍, 하고 울려퍼지는 살과 살의 마찰소리는 아프게 그의 고막을 찔렀다. 이어서 깽! 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들짐승 소리도 들렸다. 진절머리나는 소리에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무거워진 다리를 꾸역꾸역 놀렸다. 입에는 비릿한 피맛이 가득했다.
제발 돌아가. 나를 놓아줘, 포기해줘…….
소년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힘이 빠진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기괴하게 털레털레 달리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귀신의 모습이었다. 다행인 건 주변에 그나마 사람이 없다는 점일까. 뒤에서 추격자들끼리 싸움이 붙어 투닥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소년은 제발 그들이 조금만 더 싸워주길 바랐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의 경계였다. 그는 그 곳에서 죽고 싶었다. '그 날'에 죽든 '그 곳'에서 죽든 죽는 건 피차일반이지만 그래도 그 날 죽는 건 어떠한 죽음보다, 지금까지의 세월보다 끔찍했다.
"그르르르……."
소년이 파뜩 놀라 길 옆의 수풀을 바라보았다.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 그 낯선 소리에 소년은 어린 토끼처럼 날을 세웠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두 인광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억. 숨을 삼킨 소년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이 절로 개의 주둥이 쪽을 향했다. 어두워서 보이질 않았다. 소년이 공포에 질려 눈을 고정한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맹견이다. 도망가야한다. 옛날, 도망가려던 어린 그의 팔뚝을 살점 째로 물어뜯어냈던 게 저놈이다. 소년은 빈 손으로 아직도 흉이 남아있는 한쪽 팔뚝을 감쌌다.
소년의 눈이 금수를 따라 움직였다. 공포 때문에 다리가 뻣뻣했다. 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늑대처럼 거대한 사냥개는 이미 다 잡은 사냥감이라는 걸 아는지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소년의 걸음걸이에 맞춰 느리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어둔 밤, 수풀 사이로 개의 주둥이에 뿌연 달빛이 와닿았다.
그러자마자 소년은 빙글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다. 주둥이에 아무 것도 없어. 굳어있던 다리에 순간 힘이 들어가 추하게 비틀댔다. 익, 이익……! 소년의 잇새로 공포에 질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미친 사람처럼 달리는 와중에도 소년은 아랫니가 내려앉을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뒤에서 본격적으로 도망가는 사냥감을 잡으려 노련한 사냥꾼이 추격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헉!"
첨벙! 소년이 제 몸을 사정 없이 덮쳐오는 거센 물살에 팔을 허우적댔다. 숲의 경계를 알리는 계곡은 생각보다 깊고 빨랐다. 게다가 전날의 폭우로 불어날 대로 잔뜩 불어나 바닥조차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허우적대며 움직일 때마다 물방울들이 통통 튀어올랐다. 아직 춘삼월, 물의 서늘함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소년은 정신력으로 물살을 가르며 건너기 시작했다. 여기서 잡히면 끝이다. 돌아가면 산 채로 심장이 꿰뚫려 죽어가야 할텐데, 그건 죽어도 싫었다.
풍덩, 뒤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느새 쫓아온 추격자들 중 하나가 빽 비명을 질렀다. 안개숲 방향이잖아! 잡아, 웰럿, 어서! 히스테릭하게 터져나오는 명령에 개가 컹컹 짖어 응답했다. 웰럿이라 불리운 사냥개는 맹렬히 그의 뒤를 따랐다. 하얗게 질린 소년은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며 미끄러운 돌바닥을 향해 다시 발을 내딛었다.
이번에 잡히면 팔뚝의 살점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리라도 물어뜯기는 건 아닐까. 정말 도망도 못 가게. 끔찍한 생각에 다다른 소년이 팔을 좀 더 맹렬히 허우적댔다. 뒤에서 들리는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확연히 가까워졌다. 소년이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 아파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돌 하나가 따끔하게 발바닥을 파고들었다. 뒤에서의 물장구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입으로 흙탕물이 들이찰까봐 입술을 앙다문 소년이 허둥허둥 발을 내딛었다. 잡히고 싶지 않았다.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익사하고 말지, 처참하게 사냥개에게 물려 돌아가기는 싫었다.
그리 생각한 소년이 둥근 돌 하나를 밟았을 때였다.
"악ㅡ…!"
밟자마자 기우뚱하며 기울어진 돌은 소년으로 하여금 물에 처박히게 했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어버린 소년의 몸이 물살을 이겨내지 못하고 급격히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개가 다급하게 짖었으나 그의 마른 몸은 이미 물살에 휩쓸린지 오래였다. 추격자들이 물가를 쫓아오며 뒤늦게 던지는 로프가 소년의 가까이 떨어졌다 도로 끌려가길 반복했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그는 본능처럼 로프를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기를 잠시, 추격자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물살이 더욱 거세졌다. 겨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소년이 앞을 바라보았다. 폭포였다. 놀란 그가 옆에 있는 돌을 잡아봤지만 빠른 유속에 놓치고 말았다. 추격자들의 고함이 커져갔다. 소년은 자조하는 웃음을 띄며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차라리 잘 됐다, 그리 생각한 소년의 몸이 이내 공중으로 붕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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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트/현성/??] 소유욕 (가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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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스산한 바람이 앞머리를 휙 넘기고 지나갔다. 아직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던 성규가 찌뿌둥한 어깨를 가볍게 한 번 돌렸다. 묵직한 책가방과 함께 매달려있던 화구가 절그럭, 하는 소리를 냈다. 흐아암. 서늘한 밤공기에도 쉬이 떨쳐지지 않는 졸음에 성규가 하품을 쩌억 했다. 피곤하지만 보람찬 하루였다. 그래서 얼굴은 보일듯 말듯한 뿌듯함으로 젖어있었지만, 발은 물 위에 뜬 백조처럼 바쁘게 놀려지고 있었다.
그의 발이 향한 곳은 대부분 불이 꺼진 신축 아파트였다. 그 곳에 다다르자, 성규는 스며들듯 재빠르게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현재 시각은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으로, 보통 집이라면 소등을 하거나 잠에 들 시간이었다. 그러나 성규를 유독 아끼는 가족은 잠들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아, 고리타분한 자식 차별 따윈 절대 아니었다. 가족들 모두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터벅터벅. 마른 복도에 정갈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머지 않아 멈춰선 걸음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다시 움직였다.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누르는 화구통의 끈을 꾹 말아쥔 채, 성규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몇 개의 버튼을 조작하자 엘리베이터는 그의 집이 있는 층으로 부상해 그를 토해내었다. 이어서 그것은 육식동물의 그르렁거림과 같은 쇠붙이의 마찰 소리를 내며 문을 쿵 닫았다. 잠깐 켜진 센서등만이 쥐죽은 듯 고요한 아파트에 사람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 했다.
옅은 센서등의 빛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던 성규가 어른거리는 제 그림자를 보고 픽 웃었다. 차가운 추상… 조형물에 딱 어울릴 피사체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 자연스럽게 생각을 중얼거린 성규가 발을 재게 놀렸다. 최근 그는 입시미술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뭐든 습관적으로 분석하고 영감을 수집하곤 했다. 그의 친구들은 이것도 병이라고 놀려댔지만, 글쎄, 그 때마다 성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부정하지 못 했다.
코너를 빙글 돈 성규가 집 현관문에 달린 도어락 뚜껑을 쭉 올렸다. 삐삐삐삐삐삐. 일정한 박자로 여섯 글자가 눌리고, 곧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아파트는 낮에도, 밤에도 무서웠다. 어쩐지 스산하다고 해야하나. 그간의 '일' 때문에 그리 느끼는 심리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뭔가 찝찝했다.
"다녀왔습니다아."
딸랑. 문의 여닫힘에 달려있던 풍경이 조금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성규는 문을 다 열기도 전에 사이로 몸을 욱여넣으며 잘 프로그래밍 된 로봇처럼 신발을 훌렁훌렁 벗었다. 뒤에서 문이 쿵 닫히며 삣- 하는 기계음을 냈다. 엄마, 다녀왔어요ㅡ. 습관적으로 무감각하게 소리치던 성규가, 어느 순간 생경한 감각에 멈칫했다. 잠시 후 그의 움직임에 반응하던 센서등마저 여지 없이 픽 꺼지자 암흑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그러나 성규는 꼼짝도 않고 그대로 서있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위화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온 몸의 감각은 이미 정신 없이 적신호를 울려대고 있었다. 스산한 집이 마치 지옥 입구처럼 보여 그는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비된 다리, 이성과 달리 이 스산함에도 코는 동물적으로 반응했다. 한껏 예민해진 후각이 낯선 냄새를 뇌에 알렸다.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아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맡았던 비릿한 철 냄새……, 그래, 다수의 수혈팩을 가져다가 통째로 집 안에서 터뜨린 것 같은 심한 혈내였다. 굳은 뇌가 겨우 내린 결론에 성규가 숨을 들이키며 몸을 움츠렸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설마, 그럴 리가. 제 가슴팍을 스스로 토닥인 성규가 신발을 마저 정리하고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괜찮아."
자기자신을 달래듯, 어둠 속에서 애써 차분히 속삭인 성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분명 별 일 아닐 거다. 거실, 가족들은 졸리더라도 매일 거실에 모여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러니 오늘도 어김 없이 그 곳에 둘러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다. 성규는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느리게, 느리게 거실로 나아갔다. 한 줌의 희망만을 손에 쥔 채.
겁 많은 그의 손에 쥐여진 희망은 예전의 경험이었다. 성규가 겨우 더듬거려 벽을 짚었다. 고기를 이용해 요리를 하던 부모님이 요리법을 착각해 실수하는 바람에 집안 전체에서 피비린내가 심하게 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때처럼 요리를 하다 실수했고, 그래서 이런 냄새가 나는 것 뿐일 거다. 엄마를 보면, 가족을 보면… 그냥 웃고 넘어가야지. 그간 있었던 해프닝 중 하나처럼.
간절한 바람에 억지 근거 한 스푼을 더하며 성규는 길고 긴 복도 끝의 거실문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쿵쿵, 가슴이 아플 정도로 두 방망이질 쳤다. 흐읍ㅡ. 심호흡을 하고 잡은 손을 당기자 마침내 문이 열렸다. 엄마! 성규가 부러 힘차게 문을 열며 가족을 부르다가, 우뚝 멈춰섰다. 그의 작고 길쭉한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으……." "……." "윽, 으아악……."
문을 열자마자 봇물 터지듯 왈칵 쏟아지는 신선한 피 내음, 어둠 속에서도 한가득 붉게 고인 핏물. 무심코 소매로 코를 막았던 성규의 입에서 나지막히 흘러나오던 신음이 어느새 짐승의 낑낑거림처럼 바뀌었다. 어, 엄마. 아빠, 누나……. 성규가 힘이 풀려 비틀대려는 다리로 주춤주춤 들어섰다. 탁 트인 거실에, 연못처럼 고인 핏물 위 널부러진 살점들, 화풀이를 하듯 다져진 고깃덩이는 더이상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어깨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화통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흰 양말에 스르르, 핏물이 물들기 시작했다.
열지 말 걸. 차라리 열지 말 걸. 아니야, 말도 안 돼. 성규가 미친 사람처럼 온갖 말을 주워섬기다가 주머니를 허겁지겁 뒤적였다. 신고, 신고를……. 핸드폰과 함께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후두둑, 마른 소리가 고요한 집안에 울려퍼졌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바람에 성규는 패턴 잠금조차 풀지 못하고 맹인 마냥 계속 더듬거렸다.
"아!"
추락한 핸드폰이 퉁 튕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충격으로 화면까지 꺼졌는지 앞이 캄캄했다. 성규가 무릎걸음으로 더듬더듬 움직이며 주변을 짚었다. 철벅철벅, 손을 내딛을 때마다 생경하게 울려퍼지는 웅덩이 소리에 눈은 질끈 감은 지 오래였다. 그의 손이 닿은 방바닥은 이상하리만큼 뜨거웠다.
통.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히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 손으로 더듬어본 그것은 거실 한 켠의 장식장이었다. 으으……. 성규가 작게 신음하며 눈을 뜨고는 바닥을 샅샅히 짚었다. 분명 이 부근에 있을 것이다. 이 쪽으로 튕긴 것이 분명하니까 핸드폰은 장식장 근처에 널부러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성규가 결심한 듯 손을 아예 넓게 펴고 주변을 쓸듯이 끌어모았다. 질척하게 고인 핏물이 슬슬 굳기 시작하며 손에 엉겨왔다. 이내 툭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밀려왔다. 허겁지겁 쓸려온 핸드폰을 집어든 성규가 도망치기 위해 손을 내저어 장식장을 붙들었다. 그러나 잡은 곳이 손잡이였는지 장식장 문이 왈칵 열리며 무언가 후드득 쏟아졌다.
"아악!"
놀란 성규가 벌떡 일어나며 쏟아진 것을 향해 핸드폰 불빛을 비췄다. 흰 불빛이 확하고 팔랑이는 물체에 가닿았다. 떨어진 것들은 다름 아닌 사진들이었다. 그것도 꽤나 최근에 찍힌 듯한. 성규가 떨리는 손으로 사진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사진은 전부 그가 피사체로, 모르는 새에 찍힌 파파라치 컷들이었다.
구역질이 치솟아 성규는 보던 사진들을 저멀리 팽겨쳐버렸다. 아직도 사진이 가득한 장식장을 뻥 찼다. 누가 한 짓인지 이제 감이 잡혔다. 개자식, 망할 자식. 공포와 분노에 휩싸여 몸을 벌벌 떨며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붓는 그의 발에 단단한 것이 순간 툭 채였다. 어렴풋한 핸드폰 불빛에 비친 것은 녹음기였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본디 그의 집에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즉 '누군가'가 일부러 두고간 물건임이 분명했다. 성규가 주춤거리면서도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지직거리며 괴상한 언어가 터져나왔다.
"익……!"
음성 변조된 남성이 괴랄맞게 웅얼거리는 소리. 성규가 몸을 움츠리며 새어나오는 녹음기를 저멀리 던져버렸다. 이젠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그는 112를 누르며 거실문을 향해 기어갔다. 네, 112입니다. 이내 또랑한 경찰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왈칵 울음이 터졌다. 사, 살……. 그러나 말을 마저 하기도 전에 녹음기에서 제대로 된 말이 흘러나왔다.
'아아, 성규야.' "사, 살려, 살려주세요. 여기, 울림 아파……." '…신고하지 마!!!'
지직거리는 낡은 녹음기 너머 변조된 음성이 소리친 말은 분명한 협박이었다. 성규는 제 행동을 꿰뚫어본 듯한 고함에 덜컥 놀라, 그것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집 밖으로 달려나갔다. 으으윽, 짓씹힌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핏물이 가득 배인 양말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가 내딯는 바닥마다 피로 찍힌 발도장이 고스란히 낙인처럼 남았다. 성규가 완전히 사라지자 계속 돌아가던 녹음기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는 틱 꺼졌다. 성규에겐 악몽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사랑해, 성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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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트/이호원] 아가씨, 나의 아가씨 |
上편
우리 아가씨는 개나리꽃 같은 계집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작달만했던 고 말괄량이는 나이를 홀랑 집어먹어도 늘 앙증맞고 조그마했다. 생긴 것도 어찌나 어린지 열아홉은 넉넉히 되었음에도 이방인들은, 애가 몇 살이오? 열댓살은 먹었나? 하고 묻곤 했다.
그리고 일개 의례와도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늘 내 몫이었다. 불치병 수준의 수줍음을 가진 아가씨 때문이었다. 아가씨는 낯선 것이 다가오면 언제나 내 뒤로 뽀르르 숨곤 하였다. 그녀는 생소한 것, 낯선 이만 보면 어린 아이처럼 두 눈을 별처럼 빛냈다. 그러나 유독 수줍음이 많아 눈은 빛내면서도 사냥꾼을 피해 땅에 대가리를 처박는 꿩처럼 내 뒤로 사삭 숨어들곤 하였다.
하루는 이래서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갈까 하여, 크게 혼을 내보려 하였다. 일부러 엄한 얼굴까지 해보이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 날, 결국 화는 내지도 못 하고 괜히 진달래처럼 붉게 물든 귀만 벅벅 긁으며 물러나고 말았다. 만개한 꽃밭에 폭 묻혀 앉아있다가, 내가 부르니 쪼르르 달려와선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는 그녀를 내가 혼낼 방도는 없었다. 그동안 말은 못 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 작달만한 아가씨를…….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꽃을 따러, 돌을 주우러 가자는 아가씨의 말에 산으로 개울로 쏘다니다 느지막히 들어오는데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한아름 꽃송이에 폭 파묻힌 채 졸졸 따라오는 그녀를 내 뒤로 슬쩍 밀어내듯 감추었지만 이미 꽂힌 어른들의 시선은 끈덕지게 떨어지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파도처럼 엄습해왔다. 도화랑이 활개치는 봄임에도 불구하고 뼛 속까지 파고드는 이유 모를 한기에 이유가 생기려는 찰나였다.
제발 나쁜 일만은 아니길. 뉘엿뉘엿 해가 지고 하늘에 별이 수없이 총총 박힐 때까지 바라고 바랐다. 어른들 손에 끌려간 아가씨는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한 품 가득 안고 있던 벚나무는 어찌했는지 터덜터덜 빈 손으로 돌아온 그녀는 툇마루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볼에는 눈물자욱이 얼룩진 채였다.
“호야." "…예." "나 이제 너랑 꽃 따러 못 가.” “…….” “나 시집 가, 호야."
호야, 그 잔잔한 마지막 울림이 이상하게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괴상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입꼬리가 보였다. 입꼬리는 겨우내 눈발에 떠는 마당의 닭 마냥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아, 맙소사.
며칠 전 심부름으로 저잣거리를 누비다 언뜻 들은 왕명이 생각났다. 국가의 화합을 위해 각 지방 권세가의 규수들과 혼례를 올리겠다는 왕명이. 말이 좋아 혼인이지, 왕권 안정을 꾀하는 계산된 정치적 노략에 불과했다. 보아하니 종래에는 다들 수많은 후궁들 중 하나가 되어 독수공방하다 쓸쓸하게 홀로 늙어죽을텐데, 그 운명에 왜 하필 네가. 어째서 나의 아가씨가. 치밀어오르는 갈 길 잃은 분노에 괜히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칠칠치 못한 아가씨가 왜? 나도 모르게 뾰족한 말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내가 말하고도 내가 아파 숙인 고개의 시선 끝에 흙 묻은 꽃신 앞코가 보였다. 빙글 돌아가며 꽃처럼 퍼진 치맛자락이 툇마루에 와닿았다.
"와, 호야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
풀썩, 툇마루에 얌전치 못 하게 주저앉은 아가씨는 애써 대답을 피하며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나, 왕님한테 시집 가는 거래. 가면 궁궐에서 살고, 그리고… 내가 가면 모두 안전하게 살 수 있대. 고개를 돌린 아가씨의 눈에 내가 담겼다. 가슴 한 켠이 아프게 저려왔다.
아가씨, 설마 진짜 간다고……. 했어. 당연히 했지, 호야. 아가씨는 눈물자욱 얼룩진 뺨을 문지르며 배시시 웃었다. 궁궐이니 꽃은 많겠지, 따위의 속 편한 소리를 하며. 바보같이 내 속은 덜컥 소리를 내며 저 마당보다 아래로 굴러떨어진 줄도 모르고.
그날 밤 이후 말괄량이는 개울물에 봄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옛날엔 일상이었던 '어른들 몰래 꽃을 따러가자'는 말은 커녕, 방에 틀어박혀선 난을 치거나 수 따위를 놓기 일쑤였다. 어른들은 말괄량이가 사람 되었다고, 드디어 한시름 놨다며 웃곤 하였으나, 늦은 밤 별채에선 때때로 숨죽여 훌쩍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이 아가씨가 어둔 밤에 달을 벗 삼아 수를 놓다 바늘에 찔린 것인지 떠나기 싫어 눈물 삼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내 마음은 후자 쪽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난 그런 아가씨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도.
처음으로 하루하루 흐르는 것이 무서웠다. 그 당찼던 아가씨가 옛 모습을 잃어갈수록 나는 심장 한 켠이 쿵, 쿵, 곤두박질 치었다. '그 날'은 여느 날보다 빨리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화살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젠 사라져버린 고 말괄량이 대신 짬을 내어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꽃잎보다 나뭇잎이 더 많이 붙기 시작하는 꽃가지를 최대한 골라 꺾어 별채 문 앞에 두곤 했다. 그런 날이면 별채에선 아가씨의 눈물방울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지만, 다음날 저녁이면 내가 꺾어온 꽃이 서투르게 수놓아진 그림이나 천조각이 문 앞에 놓여있었다. 나는 사양 않고 기꺼이 그녀의 솜씨를 주워 간직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려오는 마음 한구석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나는 이 불편한 소통 자체에서 한 줄기 위안을 얻었다. 옛날과 너무나 달라진 우리가 유일하게 서로 소통하고,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건만, 그 아이가 그렇게 꾸민 모습은 처음 봤다. 거추장스러우리만큼 치렁치렁한 복식에, 목이 꺾어져라 꽂은 머리장식들. 그것들은 용케 중심을 잡으며 어른들께 인사 올리는 그녀의 목만 되려 가냘프고 위태로워 보이게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사를 마친 그녀는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 하고 비틀거리며 가마에 올라탔다. 아가씨를 향해 박수치며 덕담이랍시고 한 마디씩 더러운 언사를 일삼는 어른들이 새삼 추악했다. 덕담은 왕의 씨앗을 품어야 한다는 둥, 승은을 입으라는 둥 역겨운 말 투성이였다. 아가씨가 가면 나 혼자 이 더러운 집안에 남게 될 거란 이기적인 생각도 떠올랐으나, 말 한 마디 하지 못 하는 내 자신도 끔찍해 곧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수도로 향하는 길은 평탄했다. 때때로 들뜬 그녀가 가마 밖으로 손을 내밀어 수양버들 가지를 만져대느라 가마꾼들의 걸음이 느려지곤 하였으나 예상대로라면 딱 맞춰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만 수도는 고향에서부터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은 더 가야 했으므로 곧 밤을 맞아야만 했다. 다행히 수도 근방이었기에 궁에서 온 가마꾼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들과 교대하며 가마를 잠시 내려두고 휴식을 취하였다. 호위를 맡은 나도 같이 다리를 쉬게 되었다. 얼결에 가마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 짧은 휴식을 취하는데 드르륵, 소리를 내며 가마의 자그마한 창이 열렸다.
“호야!”
좁은 가마의 창 사이로 보이는 아가씨의 눈 안에 내가 가득 담겨있었다. 왜… 요. 내가 뚱하게 밍기적거리자 가마꾼들은 아가씨 심기를 건드릴 세라 속삭여대었다. 여봐, 마마님이 시킬 일이 있나보오. 어서 가보시게. 어서! 가마꾼들의 호들갑스러운 등쌀에 못 이겨 결국 그녀에게 비척비척 다가갔다. 호위 목적으로 뽑힌 나와 달리 가마꾼들은 그녀와 이야기를 해서도, 접촉을 해서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잡배 같은 놈, 얼굴도 모르는 왕을 향해 울컥 치밀어오르는 속이 뜨거웠다. 표정 관리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설프게 존대를 하기 시작한 나를 보는 그녀의 뺨에는 볼우물이 예쁘게 패여있었다.
호야, 벌써 존대해주는 거야? 왕님 부인이라는 거 좋네. 호야한테 존대도 듣고.
아가씨의 순진한 말에 바람 빠진 소리가 나왔다. 실없는 그녀의 말이 웃긴 건 아니었다. 자조였다. 내 스스로에 대한. 그러게, 그동안 존대도 안 해주고 뭘 했을까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일렁이는 목울대 사이로 새어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키고는 최대한 얼굴 근육을 자연스럽게 이완시켰다. 왜 부르…, 셨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가 팔랑팔랑 가볍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살짝 가마꾼들을 보자 그들은 서로 교대하며 농담 따먹기를 하느라 바빴다. 이 쪽에는 관심도 없으니 아마 지금은 좀 가까이 가도 될 듯 하였다. 하여 아가씨에게 좀 더 다가가자 그녀는 옛날처럼 장난스레 씩 웃으며 조막만한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뭐게?”
뜬금 없는 질문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반짝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불과 수 달 전의 그 보름밤 달덩이 같은 얼굴. 응? 호야. 그녀가 조바심 내어 재차 물었으나 나는 대답은 생각도 못 하고 그 옥안에 홀려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아가씨는 내가 몰라서 빤히 보는 것으로 알았는지 치, 재미없기는, 하고 장난스레 툴툴거리었다. 말할 때마다 쫑긋거리는 입꼬리가 달빛 아래서 꽃잎처럼 말렸다. 이내 아가씨는 꼭 쥐여져있던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 위에는 앙증맞은 마른 꽃잎이 하나 올라있었다.
“있지, 호야.” "예." “봄날에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그리고는 다시 방긋. 다 펴도 내 손보다 훨 자그마한 손바닥, 그 위에 놓여있던 꽃잎이 내 손바닥 위로 옮겨졌다. 쿵쿵, 방망이질 치는 심장소리 사이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호야, 꼭 좋은 사람 만나. 나는 괜찮으니까.
“아가…….” “형씨, 인쟈 다 되었소! 출발헙시다잉.”
교대 과정이 끝났는지, 가마꾼들 중 오야로 보이는 이가 외쳤다. 벌써 가마꾼 중 몇 명은 가마를 둘러매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급하게 도로 뒤를 돌았으나 탁, 소리와 함께 가마의 창문은 닫혀버리고 말았다. 가마 창문의 손잡이를 얼른 잡아채었지만 우르르 쏠린 주변 눈길에 하는 수 없이 놓아야만 했다. 응어리가 맺힌 것처럼 단단해진 목울대가 아파 괜시리 마른 침만 삼켜대었다. 욱신, 하는 통증이 저릿하게 가슴까지 번졌다. 이미 만났습니다, 말 한 마디 내뱉지 못한 것이 내게는 쏟아지는 별빛 한 줌에도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은 억겹의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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