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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윤슬] 우리의 노래를 들으면 그때로 돌아가는 - (전)남자친구입니다 | 인스티즈

“도윤아…. 나 너무 아파. 도와줘.”


슬이의 한 마디에 나는 기다리던 버스 대신 택시를 불러 슬이네 집으로 갔다. 슬이가 사는 오피스텔에 택시가 도착했을 무렵 슬이는 아픈 배를 쥐어 잡고 입구 앞 벤치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택시에 태워 가까운 응급실로 향했다. 택시에서 끙끙 앓고 있는 슬이에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먹는 약은 없는지, 병원은 갔다 왔는지 물어봤지만 그녀는 고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택시 아저씨께 빨리 가달라고 말했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로 올라온 나의 아픈 감정들은 그녀의 위급상황에서 무용지물로 변했다는 걸 느끼곤 다행이라고 느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녀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거니까.


택시 아저씨께 카드를 빠르게 건넨 후 슬이를 부축해 응급실로 들어갔다. 정신없이 접수를 하고 간호사 선생님의 안내로 남아있는 침대에 배정받아 슬이를 눕혔다. 슬이는 고통에 정신이 없는 듯 배를 움켜쥐고 누웠다.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듯 간호사 선생님은 차트를 들고 와 슬이의 상태를 체크했다. 


“보호자분 되시죠? 환자분이랑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남자친구요.”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바보 같게 남자친구라니. 이미 헤어진 지 10년이 넘은 (전)남자친구입니다 해버리지. 나는 나의 바보 같음을 케이윌의 노래 때문이라고 탓하며 슬이의 옆 자리를 지켰다. 곧 응급실을 담당하는 의사 선생님이 오시더니 여기저기 검사를 했다. 간간히 슬이에게 질문을 했고 슬이는 또한 곧잘 대답했다(혹시 나와 간호사 선생님의 대화를 들었을까 제 발이 저렸다). 의사 선생님은 위경련이 심하게 온 것 같다며 통증 완화를 위한 수액을 응급처방해 주셨다. 다행히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환자분 남자친구분이 응급실에 잘 데려오셨네요. 혹시 수액이 끝났는데도 통증이 있으시면 한 번 더 불러주세요.”


“네.”


진통제로 추정되는 노란색 수액이 들어가자 슬이는 부여잡고 있던 배를 놓아주었다. 수액이 절반쯤 들어가니 그녀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


“아니야. 그런 상황이면 내가 아니어도 누구든 도와줬을 거야.”


“그래도. 전화 걸어줘서 고마워. 안 그랬으면 응급실도 못 왔을 거야.”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다행이네.”



나는 내가 전화를 먼저 건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이미 부재중 전화를 3번이나 걸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아픈 상황에서 하필 나에게 도움을 청했을까? 나 아니어도 그녀를 응급실에 데려다줄 사람은 많았을 텐데. 오히려 그런 그녀의 선택 때문에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를 듣게 되어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니 사랑, 아픔, 그리움의 감정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왔다. 그런 감정이 드는데 마침 옆에 나를 필요로 하는 그녀가 누워있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이런 불안한 감정에도 그녀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감정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슬이는 수액을 다 맞고 통증이 진정이 되었고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밤새 그녀 곁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현재 우리의 관계가 그렇지 아니하니 그녀를 바래다만 주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가며 나에게 인사하는 그녀의 눈빛이 아쉬운 것인지 아픈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



윤슬은 다행히 다음날부터 출근이 가능할 정도로 증상이 좋아졌다고 했다. 어제 그녀를 혼자 집에 두고 돌아오면서 하염없이 슬프고 우울해졌는데 오늘 아침 수척해진 모습에도 웃으면서 인사하는 그녀를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하루종일 그녀 옆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회의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녀 때문에 일까지 좋아지는 기분이랄까. 


그런 나의 모습을 그녀도 눈치챘는지 우리는 며칠사이 더 가까워졌다. 다가가는 나를 그녀도 굳이 막지 않았다. 그녀도 나도 회사에서 서로를 보는 게 더 익숙해졌다(나 같은 경우는 회사에서라도 그녀를 보는 게 좋다고 할 정도였지만).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냉랭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런 내 모습에 그녀도 화낼 일이 없었다.

하지만 매일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면 다시 슬퍼졌다.



퇴근 후에는 나의 몹쓸 병으로 올라온 아픔과 그리움, 사랑의 감정까지도 나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퇴근 후에 극심한 감정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트라우마 같은 이별의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견뎌내고 또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매일 가던 운동도 못하고 끼니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퇴근 후에는 항상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래도 병으로 나타난 감정은 약을 먹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담당의가 예전에 처방해 준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그렇다고 울 것 같은 마음이 쉽게 안정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금요일이 되었다.


또다시 우울한 퇴근을 하고 터벅터벅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먼저 퇴근한 윤슬이 보고 싶었다. 다시 출근했을 때처럼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했다.


-  부재중 전화 : 슬이 (3)


슬이에게서 3번이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차마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를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노래를 듣게 된다면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이 병적인 감정이 다시 심해질게 두려워서였다. 대신 카카오톡을 통해 그녀에게 답장했다.


- 무슨 일이야?


- 혹시 오늘 금요일인데 약속 있어?


- 오늘 약속 없는데?


- 그럼 나랑 저녁 먹고 한잔 할래?


- 좋아. 어디로 가면 돼?


- 삼성역으로 올래?


-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나는 곧장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금요일 퇴근 시간의 버스는 너무 밀릴 것 같아 지하철을 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6호선을 타고 4호선으로 갈아 탄 뒤 9호선으로 옮겨 봉은사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코엑스를 지나 삼성역으로 걸어갔다. 들뜬 레트리버처럼 나는 삼성역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삼성역에서 퇴근 후 만난 우리는 저녁을 먹을 곳으로 향했다. 삼성역 현대백화점 맨 위층에 있는 타이 식당이었다. 타이 음식을 좋아하는 나를 위한 슬이의 배려였다. 우리는 그린 커리와 팟타이를 시켰고 금요일에는 빠질 수 없는 생맥주를 한 잔씩을 주문해 서로 마주 보며 건배를 했다.


“와! 진짜 맛있다. 역시 퇴근 후 먹는 맥주가 최고지.”


“음—! 너무 맛있다. 너 타이 음식 좋아해서 내가 일부러 여기 오자고한 거야. 나 아플 때 도와준 것도 있고 해서.”


“당연히 도와줘야지. 너 아팠잖아.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덕분에 아픈 것도 금방 나았어. 정말 고마워.”


“그러니까 아프지 마.”


“근데 너 그때 병원 간호사분한테 내 남자친구라고 하더라?”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이지만 계속 우려하고 있었던) 슬이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게… 그때 네 보호자도 됐어야 했고 아무튼 그런.”


“그러면서 오늘은 왜 내 전화 3통이나 안 받았냐? 그랬으면 바로 전화 좀 걸지, 꼭 카카오톡으로 문자 보내더라.”


“그건…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다 이유가 있어.”


“그런 이유가 뭔데?”



슬이에게 전화하지 않는. 그리고 나를 슬이의 남자친구라고 말해버린 이유. 네 빌어먹을 그 촌스러운 컬러링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병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윤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으며 그 병을 슬이에게 뒤집어 씌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살짝 표정이 굳어졌다.


“이유는 무슨 그냥 그렇게 된 거지.”


“정말이야? 이유가 없어?”


“이유는 (말해줄 수) 없어.”


“나 궁금한 거 못 참는 거 알지?”


그녀는 또 장난기 넘치는 눈웃음을 보이며 나에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는 그 이유를 꼭 들을 사람 같았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이런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고 했다.


“근데 여기 그린 커리 진짜 현지 음식점 같다. 나 현대백화점 맨 위층에 이런 식당이 있는 줄도 몰랐어.”


“그러지 말고 이야기해 봐 도윤아. 너를 내 남자친구라 소개해 놓고 전화도 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그녀는 집요했고 그런 그녀의 말들은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쩌면 슬이는 나를 아직까지 잘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 나는 결국 참지 못 할걸 알고 있었으니까.



“너의 그 빌어먹을 컬러링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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