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by.OZ어디선가 끼쳐오는 찬바람에 내 앞에 선 아이의 갈색 머리칼이 흩어졌다. 마주친 눈 사이로 알 수 없는 스파크가 튀었다. 반응없는 내가 이상했던지 숙이고있던 허리를 번쩍 올린다. 아이가 입고있는 교복은 우리학교 교복이었다. 변백현. 명찰에 또박히 적힌 이름이 머릿속으로 쑥 들어왔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기억할때 이런식으로 저장시켜놓았다. 뇌 안 '기억창고'에 모든것들을 다 집어넣었다. 그 이후로 무언갈 잊어버린 적은 손꼽아볼 정도가 되었다. 변백현 그 이름이 내 뇌에 꾸욱 박혔다. 절대로 까먹을 것 같지 않았다."너 우리학교지?""...""응?"변백현은 대답을 바라는것 같았지만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멀뚱멀뚱 눈만 크게 뜨고있는 내 앞에 손을 두어번 흔들어봤는데도 내가 아무말이 없자, 그 두 눈썹이 축 쳐졌다. 너 혹시..."...""말 못해?"경수야! 변백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과학선생님 목소리가 들렸다. 붙이고있던 엉덩이를 급하게 떼고 다리에 힘을주었다. 대답할 생각도 안하고 그렇게 눈길을 피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랬다. 뭔가 박찬열같다. 변백현에게는 신경을 끄기로 하고 과학선생님 옆으로 다다다 뛰어갔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과학선생님이 씩 웃었다. 선생님 손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진료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잠깐 느려지고 무의식적으로 반쯤 고개가 돌아갔다. 눈동자 끄트머리로 변백현이 비쳤다. 걔는 멍하니 서서 나를 보고있었다."선생님.""응?""변백현이라는 애는 어디가 아파요?""백현이? 아빠가 여기 입원하셔서 그래. 요즘 잘 안보이더니 오늘 갑자기 왔네. 안입던 교복도 입고.""아아...""그래. 우리 경수는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허리가 쑤셔서요. 와이셔츠를 걷어냈다.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지만 이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근데 나 말 잘하는데. 걔가 나 벙어리로 알고 있을텐데. 내가 제일 잘하는게 말하는건데..."피멍들었다. 경수야.""...""멍멍이가 괴롭혔지?"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생님도, 나도 아무말이 없었다. 진료실은 금방 금방 조용해졌다. 정적이 흐르던 곳에 교복 추스르는 소리만 들렸다.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아빠한테도, 우리반 개들 한테도, 가끔씩 울컥울컥 나를 덮치는 눈물한테도. 그리고 나 또한 누구를 지키는 것에 서툴었다. 엄마가 떠올랐다. 아주아주 애기때였는데 아직 정확히 기억난다. 그 장면은 내 기억창고안에 조용히, 말없이 저장되어 있었다.미안해. 미안해 경수야. 엄마는 지금 과학 선생님처럼 내 머리를 자주 쓰다듬어줬는데 나는 그 기분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날까지도, 엄마는 마지막까지 내 머리를 많이 쓰다듬어주었다. 엄마 손은 작았지만 늘 따뜻했다. 엄마는 미안하다고만 하면서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따뜻한 핫팩 몇개를 쥐어준 선생님이 나를 배웅했다. 요즘 날씨 많이춥대. 잘 때 교복입고 자면 추워서 안 돼. 따뜻하게 보일러 틀고, 잠옷 갈아입고 이불 꼭 덮고 자야돼. 선생님 잔소리는 항상 똑같다. 나도 항상 그래왔 듯 고개만 몇번 끄덕이고 돌아섰다. 교복 마이 안으로 쌩 바람이 불었다. 눈 밑이 조금 떨렸다. 주머니에 잡히는 외출증을 꺼내보니 시간은 벌써 훌쩍 지나있었다. 전화는 단 한통도 와있지 않았다. 하긴 우리반 선생님은 나를 싫어하니까. 속이 살짝 썼다. 학교에 가기도 싫었지만 집에 가는건 더 싫었다. 병원 계단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손에 잡힌 외출증이 구겨졌다. 내 머릿속도 구겨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아파오는 허리 부근에 핫팩을 갖다댔다. 약은 아까 먹었으니까 괜찮겠지.다리를 쭉 폈다. 앞을 주시하던 눈길을 쭉 끌어내려 다리쪽을 멍하니 쳐다봤다. 교복바지 안으로 나있을 빨간 상처들이 눈에 선했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이제는 따뜻한 것 보다 차가운게 더 편하고 잘 자는 것 보다 잠을 설치는 쪽이 더 편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신발 끄트머리부터 까만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변백현이다."너 벙어리지?""...""벙어리 맞구만. 말도 못하고.""...""너 근데 진짜 나랑 동갑맞냐? 명찰색은 나랑 똑같은데 존나 쪼꼬매.""..."얘 진짜 시끄럽다. 나도 만만치않지만. 나를 벙어리라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좀 우스워서 살짝 (비)웃었더니 그걸 또 신기한다. 어, 웃네 웃네? 너 웃을줄도 아냐? 하면서. 진짜 박찬열이랑 어울리면 딱 맞겠다. 시끄럽고 병신같은게 딱 박찬열인데.언제 쯤 말을 할까. '나 벙어리 아닌데.' 이런식으로 말하면 놀랄까?아니면, 왜 자꾸 나한테 말 걸어?아니면 정말 그것도 아니면.아빠가 어디가 아프셔?그렇게 말했다간 울려나. 펑펑 울려나."너는 내가 생각하기에 또라이 아니면 찌질이야.""...""너 한글은 읽지?""...""못 읽나... 말 못하면 머리도 좀 딸리나?"읽을 줄 알어 병신아."여기 어딘줄알아?""...""모르지? 여기.""정신병원.""에?""정신병원."또라이 아니면 찌질이는 내가 아니라 너겠지 백현아. 쐐기를 단단히 박아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워진 엉덩이를 툴툴 털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빠가 어디가 아프냐, 가장 궁금한 질문이지만 나는 스스로 답을 알고있었다. 멀쩡한 애한테 상처주는건 나쁜앤데 내가 방금 그런 짓을 하려고 했다. 도경수는 다 알면서, 어떤기분인지 어떤마음인지 다 알면서 그런 질문을 하려고 했다. 그건 그냥 나쁜놈도 아니고 정말 세상최고 나쁜놈이다.집을 향해서 막 뛰었다. 보이는 것도 없고 감으로 뛰었다. 얼굴이 바람에 맞으니까 금방 차가워졌다. 차라리 감기나 걸려버려! 차라리 그렇게 되버려! 내가 내 몸이 아닌것 같다. 내 머리가 아닌것 같고 내 허리가 아닌것 같고 내 다리가 아닌것 같고 내가 내가 아닌것 같다. 애기처럼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곳은 바깥이고 나는, 그 정도 상식은 남아있었다."...허억.""어?"그리고 박찬열과 마주쳤다. 그 긴 다리가 보였다. 차분히 정리된 머리밑으로 그 녀석 얼굴이 보였다. 뛸 기력도 없는데 박찬열은 아직 쌩쌩했다. 도망가려는 내 팔을 꾹 움켜쥐고 날카롭게 손톱을 세운다. 생긋생긋 웃던 박찬열이 나를 질질 끌었다. 꺼져버려 개자식... 악을 지르는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가보다. 변백현말처럼 내가 벙어리라도 된것같다.-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낄낄 기분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외출빼먹고 어디로 도망갔나 했더니 병원? 정신병원? 존나 도경수, 개웃겨. 정신병원." 박찬열은 쓰레기다. 울음이 속부터 차올랐다. 손목을 붙잡힌 채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나는 몇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박찬열이 주머니를 뒤져서 내 휴대폰을 꺼낼때까지 나는 미친듯이 누구를 찾았다. 과학선생님? 아니면 담임? 아니면 박찬열 따까리들? 아니면 아니면 정말 아니면 변백현? 머릿속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박찬열은 금방금방 일을 벌렸다. 내가 무언가를 판단하는것이 한 박자 느리다는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박찬열은 귀로 들어도 신경질적이고 열을 오르게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내가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할까봐 휴대폰은 일찌감치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넣어놓곤 내 속을 마구 짓밟았다. 뇌에서 콩콩 맥박이 뛰는 기분이 들어 얼른 머리를 감쌌다. 코 끝이 시큰했다."경수야~""...""나 심심해. 놀아줘. 응? 거기서 그러지말고. 심심해. 심심하다고!""..."상상이상으로 미친놈이다. 덜컥 올라서는 겁에 뒷걸음질을 했지만 그것도 박찬열의 손에 붙잡혔다. 어디갈려구. 형아 놀아줘야지. 박찬열이 내 바지춤을 잡아챘다. 벗어. 그 얼굴이 아빠와 겹쳐보였다. 벌벌 떨면서 고개를 휘젓자 박찬열의 손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순간, 아주 순간이었다. "아프지? 더 아프게 하기전에 벗자. 경수야." 그 치가 떨리는 목소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를 따라 쭈그려앉은 박찬열이 볼을 타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주었다. 쳐울지 좀 말고 벗으라고. 썅년아."으..으..""아, 존나 시끄러.""끄....나한...나한테 왜 이..왜 이래..."내 말에 대답도 없이 웃음을 터뜨린 박찬열이 흐트러진 내 머리를 잡아쥐었다. 말려올라가는 머리카락에 끅끅대며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박찬열은 본채만채 내 와이셔츠를 거칠게 뜯어내려버렸다. 춥다. 춥다. 추운게 싫어서 아예 목을 놓아 울었다. 아오 닥치라고! 입이 그렇게 막혔다. 울음소리가 헛구역질로 변하자 눈물만 주륵주륵 흘렀다. 속이 쓰리고 아팠다. 제발 나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다시 허리를 통해 온몸을 울리는 아픔에 낑낑 울음을 토했다. 신음소리와 울음이 섞여나오자 그 비릿한 웃음이 보였다. 차라리 눈이 보이지 않았으면, 귀가 들리지 않았으면. 왜 나는 머릿속이 아파서 이런걸까. 차라리 다른데가 비뚤어져서 장애가 됬으면 좋았을텐데, 아니 차라리 그냥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내 몸을 겨우 버티고있던 한쪽 팔에 힘이 빠졌다. 잔뜩 긴장 되있던 허리가 푹 꺼지자 박찬열이 거칠게 욕을 뱉었다. 볼이 물기에 젖어 따가웠다. 기절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에 정신을 잃으려 애를썼지만 오히려 또렷해졌다. 아랫쪽의 느낌도, 생생한 고통도 모든것이 제자리였다.*배안에 정액이 남아있어 배앓이를 했다. 토기가 올라와 화장실로 뛰어가도 나오는 것은 노란 위액 뿐이었다. 오랫동안 학교를 가지않았다. 아빠는 며칠 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으니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빈 방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과학선생님과 소통할 수 있었던 휴대폰도 박찬열에게 가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까 그냥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하루의 절반을 눈물로 보내야했다. 거의 아무것도 먹지못했지만 허기도 지지 않았다. 몸이 지끈지끈 아팠고 괴롭기만 했다.삑. 삑. 삑. 삑.멍하니 침대에 누워 손장난만 하고 있는데 한치에 망설임 없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집안으로 들어서는 소리에 겁에 질린 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제 다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또 비죽비죽 삐져나왔다. 도경수, 일어나. 아빠의 급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내리니 아빠가 투박한 손길로 나를 일으켜세웠다. 짐 챙겨. 끅 울음이 터졌다."아빠가 미안해."아빠가 사과의 눈길을 보냈다. 내 머리가 몇번 쓰다듬어졌다. 싫어요, 나는 사과받기 싫어요. 속과 다르게 겉은 이미 고개를 몇 번씩이나 끄덕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쉬어버린 목소리가 겨우 튀어나왔다.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는데, 나는 아빠를 볼때마다 아직도 토할 것 같고 허리가 아픈데.아빠는 보이는대로 내 짐을 쑤셔넣었다. 캐리어 하나에 내 짐이 다 들어가고도 남았다. 아빠가 감기약 하나를 물과함께 쥐어주었지만 그걸 삼키는데 꽤 힘이 들었다. 목안이 말라버려 약이 잘 넘어가지 않는 탓이었다. 겨우 힘을 주어 삼키자 아빠가 바쁘게 내 등을 밀었다. 얼른 가자, 얼른."...""...""아빠.""응, 그래.""과학선생님 한번만 뵈면 안될까요."아빠는 말없이 차를 돌렸다.*"이사를...가?""네. 몸이 조금 안좋아져서요.""그렇구나.. 전화도 안받길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죄송해요.""아, 경수야. 백현이가 너 찾았어."변백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병실에 계실거야, 너 많이 찾던데... 603호야. 가봐."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던 선생님이 살짝 웃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얼른 603호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탈 생각조차 하지않았다. 계단을 두칸세칸씩 넘어섰다. 6층. 603호. 603호..."...도경수.""..."아. 급하게 찾던 얼굴과 마주하자 나는 짧은 탄식을 뱉었다.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고 고개를 빳빳히 들었다. 내 눈앞까지 온 변백현이 살짝 웃었다. 여기저기 다쳐있는 얼굴이 사람좋은 웃음을 지었다."웃음이 나와?""이거 너 주려고.""걔 우리반 개야. 멍멍 개.""응. 니 과학선생님이 그러시더라.""...야."변백현은 웃음기를 떼어내지 않았다. 내 까만 스마트폰이 그녀석 손에서 내 손으로 옮겨졌다. 따뜻한 손이 내 손을 꼭 움켜쥐었다. 잘 가. 아프지말고, 밥도 잘 챙겨먹고. 여기 절대 오지마. 니 과학선생님 보러도 오지말고, 나 보러도 오지말고, 아 우리아빠 보고싶으면 가끔씩 와도 돼. 아무렇지 않게 웃던 변백현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변백현.""...""백현아.""...""백현아...""나 안아파 병신아. 니가 더 아프지."변백현이 그렇게 뒤돌았다.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변백현이 눈앞에 시큰시큰했다. 잘 가. 그 목소리가 귓가에 뱅뱅 맴돌았다.OZ한꺼번에 올려여 !!!! 흐흐독은 이렇게 끝납니당 ㅠ_ㅠ 아픈 경수랑 성격좋은 백현이를 표현하고싶었기에..!똥글 똥손 예쁘게 봐주신 소수의 독자님들 정말정말 제 사랑드세여 S2혹시 또 기회가 된다면 길~게 찾아올게요. 백도행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