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고스러지다. 작가: 젤리탱 ※무단 배포 금지, 공유 금지, 커플링, 내용 수정 금지. 미영이 입사한지도 어느덧 2주일이 지났다. 태연은 그 날 이후로 팀장 이수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이사로 승진했다. 안 그래도 사원들은 모두 베타였지만 태연만 알파여서 걱정 했는데 새로 온 팀장은 베타였다. 표현 절제를 잘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미영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반면에 태연은 고역이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브리드 싸이클 때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랫배에 느껴지는 감각은 모든 일에 집중 하지 못하게 했다. 조퇴계를 내고 집에 가서 쉴까 하고 태연은 책상에 엎드려서 고민했다. 머릿속은 온통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미영, 황미영, 황미영. 황미영? 태연이 벌떡 일어났다. 2주 전에 제 팀원으로 들어온 황미영이 왜 생각나는 거지? 혼란스러워 하던 태연은 의자를 박차고 이사실을 나섰다. 미영이 속한 팀이 있는 층으로 내려간 태연은 팀실 문을 열었다. 갑작스런 태연의 등장에 팀원들은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태연은 문 앞에 가까이 있던 팀원에게 물어봤다. “황미영 씨 있어요?” “저기에 있습니다.” 태연은 고맙단 인사도 안 하고 팀원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미영은 태연이 다가오기 전부터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태연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알파의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억제제 효과가 끝나려면 3시간이 남아있다. 약효시간이 6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수치였다. 미영은 태연이 옆에 있는 걸 알았어도 일부러 모른 척 했다. 태연이 미영을 내려다봤다. “미영 씨, 잠깐 나올 수 있어요?” “......” “나와요.” 미영이 허락 하지도 않았는데 태연은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럴 거면 부탁하는 말은 뭐하러 한 거야. 미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을 따라 나갔다. 태연이 미영의 손을 잡고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태연에게 안겨버린 미영은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태연은 봐줄 수 없다는 듯이 꽉 붙들었다. 달뜬 태연의 숨이 여과 없이 미영의 귓가로 닿았다. 미영은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태연은 무의식적으로 미영의 허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미영이 허리를 비틀었다. “이사님 이러시지 마세요!” “......” 태연의 눈가는 힘을 잃은 상태였다. 미영은 정신을 곧추 세웠다. 태연의 힘 잃은 눈매는 유혹 그 자체였다. 미영은 그 눈 속에 홀릴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태연은 앙탈을 부리는 아기처럼 미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미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태연은 미영의 목에 진한 키스마크를 남기고 스르르 떨어졌다. “인상 좀 펴요.” 태연이 손가락으로 미영의 미간을 문질렀다. 곧바로 펴지는 미간에 태연이 웃었다. 태연은 미영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미안해요. 지금 브리드 싸이클이라서 예의 없게 굴어버렸네요.” “......” “미영 씨, 좋은 냄새 나요. 내가 좋아하는 냄새.” 미영은 질겁하며 뒷걸음쳤다. 불길했던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사흘 후면 히트싸이클이다. 히트싸이클 주기는 제법 일정했으나 가끔 불규칙 해지는 경우가 있다.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나 알파가 나타났을 때. 미영은 팀실 쪽으로 몸을 가까이 했다. 태연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찔한 알파의 향에 미영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브리드 싸이클이시면 어서 쉬셔야죠. 아니면 오메가들 만나시던지. 이사님 보면 오메가들이 굉장히 좋아할 것 같은데.” “황미영 씨.” “뭐 어때요. 우성알파신데. 오메가들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으시면 가지고 노셔야죠.” 태연은 묵직한 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미영의 눈빛은 고고했다. 괘씸하다고 태연이 받아치려는 걸 그만뒀다. 태연은 아무 말 없이 미영을 쏘아보곤 자리를 떴다. 미영은 고고한 척 했던 눈을 풀었다. 긴장해서 힘이 빳빳이 들어간 몸은 여지없이 늘어졌다. * 태연은 제멋대로 회사를 나왔다. 심심할 때 가끔 친구들이랑 찾아갔었던 곳으로 갔다. 오랜만에 가니 안면 있는 사람들이 태연을 반겼다. 태연을 자연스레 안내하던 사람이 한 룸 문을 열어줬다. 태연이 착석하고 정장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워갈 즈음에 룸 안으로 한 여자가 쭈뼛쭈뼛 거리며 들어왔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여자를 데려온 사람이 소개했다. 태연은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다. 달큰한 냄새. “오늘 새로 들어온 아이예요. 때마침 히싸도 온 것 같고, 오랜만에 이사님 오셨다니까 이렇게 해 드리는 거예요.” “......” “이 아이 처음이니까 살살 해주셔야 해요. 아셨죠?” “알았어.” 태연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온 몸을 달달 떠는 여자가 안쓰러워졌다. 태연은 정장 재킷을 벗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여자는 마지못해서 태연의 옆에 앉았다. 태연이 웃으며 여자의 술잔에 술을 따라줬다. 다정하게 여자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여자는 태연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경계하며 움찔했다. “히트 싸이클이구나. 이런 거 처음이야? 무서워?” 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이 부드럽게 여자의 양 손목을 잡았다. 여자의 몸이 비틀어졌다. 태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만지면 다 반응하는 주제에. “그런데 어쩌지. 내가 너무 급해서 네 사정을 봐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태연이 그대로 여자를 넘어트려 눕혔다. 여자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태연은 눈에 힘을 잔뜩 줬다. 여자의 위에 올라탄 태연은 여자의 옷을 찢었다. 손목에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로 던졌다. 태연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짜증나게 구네. 가만히 있어, 때리기 전에.” (글 중간 삭제.) 태연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주변을 정리했다. 태연이 흩뿌린 걸 여자는 믿지 못했다. 담배를 물은 태연이 지갑에서 수표들을 꺼내 여자의 손에 쥐어줬다. “피임약 있냐니까? 나 다시 물어보는 거 정말 싫어해.” 태연은 흐트러진 제 옷가지를 정리하며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태연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이건 따로 네가 챙겨. 그걸로 약 사. 아니면, 낙태할 때 보태던지.” 태연은 여자의 손에 쥐어준 돈 말고도 더 챙겨줬다. 식은땀을 흘리는 여자의 이마를 손으로 닦아주곤 룸을 나갔다. 홀가분한 몸으로 회사에 복귀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집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있던 약통에서 몇 알의 약을 꺼내 씹었다. 비서에게 연락해 조퇴계를 내고 미영의 번호를 얻어냈다. 한편 미영은 아까 전에 태연에게 한 말이 심했나 하고 곱씹어 보았다. 몇 번이나 곱씹어 보아도 나오는 결론은 ‘잘했다.’였다. 오메가가 아무리 천대 받는 존재라지만 2주 전 태연의 발언은 인격모독이었다. 팀실로 들어왔을 때 태연의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태연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일에 집중했다. 억제제를 먹을 시간이 되자 미영은 아무도 없는 화장실로 갔다. 며칠 동안 생기 돋던 얼굴은 오늘 태연을 만남으로써 어두워졌다.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하나 둘 씩 미영에게 괜찮냐고 물어왔고 미영은 괜찮다고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화장실에서 억제제를 먹고 나온 후 주위를 둘러봤다. 혹여 알파가 나타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 퇴근시간이 되자 미영은 가방을 챙겨 야근하는 사원들에게 인사하고 퇴근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퇴근길을 즐기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미영은 저장하지 못한 회사 선배의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대꾸하지 않았다. 미영은 짜증나서 끊으려고 했다. 끊으려는 순간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황미영 씨 전화번호 맞죠?“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미영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퇴근하던 발걸음은 멈췄고 움직이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내일부터 내 비서해요.” 낮은 목소리에 미영은 전화를 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낼 수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안 들려요? 말 그대로예요. 그 팀에서 일하지 말고 김태연 비서 하라고요.” “이...이사님!” 미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태연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미영은 길 한가운데서 머리를 헝클이며 짜증을 냈다. * 태연은 집으로 돌아가 술을 들이켰다. 술도 잘 못하는 태연이라 한 잔만 마셔도 금방 취해 버리는 게 일쑤였다. 벌써부터 취기가 올라오는 착각이 들었다. 미영을 생각하면 당돌함에 괘씸하기는 했지만 마음에 드는 구석은 있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달큰한 향은 태연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한 잔을 다 마시고 입가를 손등으로 스윽 쓸었다. 창 밖 바쁜 도시 불빛들이 정신없이 이리저리로 목적 없이 흩어져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혔다. 술은 더 이상 마시지는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로 들어간 태연은 오늘 일찍 퇴근한 탓에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정리했다. 검토하다 말고 의자 등받이가 푸욱 꺼지도록 기댔다. 문득 미영을 떠올렸다. 왜 딴 짓을 하려 해도 황미영이지. 예고 없이 전화했었는데 전화부에 자신을 어떻게 저장했을지 궁금했다. 아예 삭제했을까, 아니면 그대로 두었을까 온갖 잡생각이 나뒹굴어서 그만 두었다. 갓 새로 입사한 사원을 두고 이러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어떤 일을 행하든지 둥글둥글한 얼굴이 떠나가질 않았다. 이런 경우는 태연도 처음이었기에 그냥 신기한 현상이라고 받아들였다. 본능대로 움직이는 몸도 질렸고, 저의 신분을 보고 출세하려는 사람들은 질리다 못해 물러 터졌다. 엔조이로 사람을 사귀든 만나든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태연의 행동에 비위를 맞춰 가며 아부하기 바빴다. 태연은 그런 걸 몹시 싫어했고 새로운 반응을 추구했다. 태연의 팀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미영은 태연의 위치를 알고서도 아부는커녕 제 일만 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태연에게 제안하고 움직였지만 미영은 태연이 움직이길 권유해야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태연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때까지와는 다른 전혀 색다른 반응에 더 알아보고 싶고 건드리고 싶었다. 보통내기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더 자주 머릿속의 미영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미영이 저에게 관심을 보였으면 좋겠다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말했듯이 적절한 기다림이 좋다고 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세상은 모든 것을 손에 쥐어 주었다. 늘 그 말을 되새긴 태연이었고 지켰기에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얻어냈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럴 태연이었다. 태연은 실소를 지으며 때를 계산했다. * 미영이 태연의 비서로 들어가 일을 시작 한지 이틀이 되어가고 있었다. 히트싸이클 주간이 찾아와 미영은 전과 다르게 혈색이 좋질 못했다. 태연을 계속 보좌해 오던 순규는 데스크에서 미영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미영 씨, 어디 안 좋아요?” “감기가 찾아 왔나 봐요. 약 챙겨 왔어요. 약 먹으면 돼요.” 순규는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고 미영은 가방에서 억제제를 꺼내 열 알을 꺼냈다. 이 주간에 열 알은 먹어야 나름의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했다. 다행히도 순규는 베타였기에 전혀 눈치 채질 못했다. 순규는 미영에게 물이 든 컵을 건넸다. 약을 물과 삼키고 나서 효과가 몸에 퍼지길 기다리며 잠시 엎드렸다. 순규는 미영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침 스피커로 태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황미영 씨, 잠시 들어와 봐요.” 미영의 숨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뜨거워짐을 느끼고 몸은 달아오르고 있었다. 순규와 미영은 알지 못했지만 미영이 풍기는 페로몬은 점점 진해지고 달콤해졌다. 이사실 문이 닫혀있어도 이사실 안엔 알파인 태연이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 공간은 너무나 위험했다. 벗어나야 했다. 순규는 미영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미영 대신 이사실로 들어갔다. 노크를 하고 태연에게로 향했다. 태연은 눈길을 주지 않다가 슬쩍 순규를 쳐다보더니 실망한 기색이 역력히 들어나도록 두 눈매를 축 늘어트렸다. “이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황미영 씨 어디 갔어요?” “어…. 잠시 아파서 제가 대신 들어왔는데요.….” “난 황미영 씨 불렀어요.” 태연은 순규의 변명을 무 자르듯이 자르고 미영을 찾았다. 순규는 그럼 미영을 부르겠다고 태연에게 말했다. 태연은 순규를 쏘아보고 얼른 나가라고 다그쳤다. 순규가 데스크에서 미영 씨! 라고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미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알약들이 흩어져 일부는 땅에 몇 개 떨어져 있었다. 순규는 습관적으로 태연에게 보고했다. 태연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잠시 멍을 때렸다. 상황판단을 마친 태연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미영을 찾았다. 태연에게 있어서 미영은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아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영을 부른 일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무의식은 태연을 조종했다. 넓디넓은 이사실 층을 이 잡듯이 뒤졌다. 일 하는 직원들 문을 벌컥 열어 구석구석 살피며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당혹감에 물든 직원들의 얼굴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태연은 이사라는 직위의 체통을 잊은 지 오래였다. 거친 숨과 땀을 내며 태연은 화장실 부근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화장실 입구에서 아찔하게 퍼져 나오는 오메가의 페로몬에 발목이 잡혔다. 태연은 천천히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강하게도 나는 페로몬이 태연의 코끝을 간질였다. 분명 오메가였다. 오메가 냄새. 회사 안에 오메가가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다른 알파 직원들이 불러냈나.' 라고 생각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태연 본인이 부른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10개가 넘는 칸을 태연은 아주 조심스럽게, 숨죽이며 살폈다. 제일 구석진 곳인 끝 칸에서 페로몬이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태연은 브리드 싸이클이 끝나려면 족히 사흘은 남은 상태였다. 자연스런 본능에 이성의 끈을 놓을 뻔 했지만 우성 알파의 뛰어난 자제력으로 잠재웠다. 태연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자제를 한다 해도 몸 속 깊숙이까지는 제어하지 못한다.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본능은 막을 수 없었다. 손잡이를 잡고 정신없이 흔들었다. 태연의 힘으로 잠금장치는 조금씩 헐거워져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화장실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태연은 입가에 호선을 부드럽게 그렸다. 오늘따라 몸이 약을 안 받아 준 탓에 히트 싸이클이 제대로 온 미영이었다. 어쩌다 한 번 겪을 히트 싸이클이어서 미영은 겁을 뒤집어 쓴 상태였다. 구석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릎에 고개를 박고 있던 미영은 박하 향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앞에 서 있는 태연을, 태연이 짓고 있는 웃음을 보고 미영은 안아 달라고, 나 좀 구해달라고 안달이 났어도 달려가지 못했다.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였다. 태연이 다가와 미영을 번쩍 안아들었다.
“사람의 직감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흐으으….” “예상은 했었지만 정작 이렇게 두 눈으로 확인하니 놀랍네요.” 태연이 실소했다. 미영은 이성을 놓아가는 와중에 태연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태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게 정확한 증거를 들이밀고 증명한 건 아니지만 태연의 직감이, 본능이 진작 알아차렸던 것이다. 미영의 몸은 용암처럼 뜨거웠다. 차가웠던 태연의 몸도 덩달아 뜨거워짐을 느꼈다. 미영이 회사의 규칙을 어기고 베타로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린 이상 곧바로 상부에 보고해 해고 시켜야 함이 옳았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사실을 덮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태연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미영의 욕구를 풀어 주면서 자신의 욕구를 풀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만 있었다. 고이 안아 들고 이사실 앞에 서니 순규가 문을 열어 주었다. 순규의 얼굴은 걱정 하는 게 확연히 어려 있었다. 태연은 미영을 넓은 소파에 앉혀놓고 순규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순규는 알겠다 대답하며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힌 걸 확인 한 순간 태연의 퓨즈가 툭 끊겼다. 그대로 태연은 미영을 덮쳤다. 태연이 미영 위에 올라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언뜻언뜻 본 미영의 눈은 이성이라고는 남아 있질 않아서 탁하고 흐렸다. 탁하고 흐린 눈이 오히려 유혹하는 눈짓 같아 보였다. 미영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몸은 본능을 따라 능숙하게 움직였다. 도저히 이번 관계가 처음 같지 않아 보이는 몸짓이었다. 태연이 입을 맞춰 오자 미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미영은 태연의 목에 자신의 손을 둘러 키스를 수월하게 진행시키도록 했다. 태연은 미영의 혀와 얽히기도 하고 천장과 이를 쓸어 보기도 했다. 태연의 혀는 미영의 쇄골로 내려와 키스 마크를 여러 개 새기고 핥았다. (글 중간 삭제.) 태연은 몸을 추스르며 옷을 정리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미영은 눈만 굴렸다. 태연은 미영의 옷을 들고 와 입혀 주었다. “미영 씨, 오메가였네요. 색기가 엄청 흐르던데.” 미영은 들키지 말아야 할 걸 들켜서 그런지 표정 관리가 쉽사리 되질 않았다. 표정관리만 수년 간 연습했는데 한순간에 공든 탑이 무너져 내렸다. “밑에서 내려 봤을 때 얼마나 야했는데요.” 태연은 회사 내에 오메가가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순수히 미영과의 관계가 좋았다는 정도. “아... 안에... 안에다가 하셨어요?” 태연은 창가로 향해 있던 고개를 미영에게로 돌렸다. 미영은 불안한 마음에 동공은 물론이고 심박 수까지 빠르게 요동쳤다. 태연은 미영을 제대로 괴롭히고 싶었는지 아니라고 부정하고픈 미영의 마음을 산산이 조각 내 깨트렸다. “네.” 미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천천히 떨어뜨렸다. 아아…. 얼마나 살았다고 임신이라니. 숱한 알파들의 위험에도 꿋꿋이 버티며 지켜 왔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내 눈 앞에 있는 저 알파가... 히트 싸이클에 관계를 맺으면 무조건 임신이었다. 깊은 좌절감에 미영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더러운 본능에 몸을 맡긴 것도 수치스러웠다. 자신이 히트싸이클이란 걸 알았을 텐데도 임신시킨 태연을 원망했다. 원망을 넘어 증오했다. 태연은 평상시대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사님….”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태연을 불렀다. 태연이 말해보라는 눈짓이었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셨어도 됐잖아요. 적어도 안에다가는 하지 마셨어야죠.” 태연의 눈빛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오메가라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우리 회사는 분명히 오메가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위반한 것도 미영 씨...” “…….” “숨기지 못하고 들킨 것도 미영 씨, 내게 도와 달라고 끼 부린 것도 미영 씨. 하나같이 다 미영 씨가 자초하셨네요. 그런데도 제가 잘못한 건가요? 본능을 따르겠다고 미영 씨가 몸짓으로 말하고 있는데 콘돔 같은 걸 언제 챙겨요.” “…….”
“아니면 돈이라도 드릴까요? 병원 갔다 올래요?” 태연의 입꼬리가 비죽였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오메가가 한 생명인 애를 가져도 별 거 아니라는 태도. 그 한 생명이 한 사람의 앞길을 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태연의 관심 밖이었다. 애 지우든지 말든지. 딱 그 태도였다. “오늘 일은 나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넘어가 줄게요.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고 조용히 회사 다녀요. 아이는…. 되도록이면 안 생기는 게 그쪽이나 나나 낫겠죠. 나가보세요.” 미영은 아픈 허리에 걷지도 못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똑바로 걸었다. 그 쇼는 이사실을 벗어나면서 끝이 났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문에 기대 힘이 풀려 저절로 털썩 주저앉았다. 순규가 데스크에 앉아 있다가 달려 나와 미영을 부축했다. 미영은 괜찮다며 일어났고 먼저 퇴근한다고 짐을 싸 회사를 벗어났다. 회사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한 산부인과로 간 미영은 의사 입에서 바보 같게 임신이라는 단어만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하지만 역시 바보 같은 짓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이네요.” “ㄴ… 네?” “이제 막 아기집이 생겼으니까 각별히 조심 해주세요.” 미영은 도리질을 하며 유산 시켜달라고 애원했다. 의사는 어떻게 그러냐며 미영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미영은 흥분하다가 바닥에 앉아 펑펑 울었다. - 뱃속에 아기가 생겨난 지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꼬박 지났다. 미영은 태연을 보좌하면서도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태연이 분명히 일주일 전에 말했듯이 태연 딴에서도 제 씨의 아기가 생겼다 해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태연은 회사에 미영이 오메가라는 걸 알리지 않았다. 입덧이 전보다 자주 올라와도 태연이나 순규 앞에서는 체했다고만 둘러댔다. 처음에는 아기가 생긴 게 너무나 싫고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틀간은 정말 미친 듯이 배를 때려도 보고 안 좋다는 일 다 해봤지만 아기는 죽기는커녕 건강하게 자랐다. 때려 봤자 유산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힘이었다. 한 번은 태연을 닮은 아기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상상도 해보았다. 곧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 것도 여러 번이었다. 웃음만은 잃지 않으려고 남 앞에서 억지로 웃었다. 아기가 생기고 나서 감정 기복도 심하게 바뀌고 성격도 날카로워져서 멋대로 뻗치는 짜증은 장소,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다분히 노력을 했지만 물에 칼 베기였다. 그 패턴이 반복되고 반복됐다. 남에게 웃으려 하던 노력도 태연에게만 가면 깔끔히 사라졌고 예민해진 성격을 툭툭 던지기도 했다. 태연을 보면 태연 나름대로 참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해도 쉽지가 않았다. 태연이 보는 곳에서 서럽게 울기도 했었다. 태연이 위로 해주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퇴근 하고나서 집에 들어와 초음파 사진을 본 뒤 배를 한 번 쓸고 나서 오늘 있었던 일을 아기에게 조곤조곤하게 말하고 잤다. 태연은 요새 미영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몹쓸 짓을 했나 라고 자책해도 그 뿐이었고 오메가니까. 라고 합리화 시켰다. 울 때는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위로할 줄을 몰라 가만히만 있었다. 어느 날은 태연의 일을 설명하다가 미영은 짜증 섞인 한숨을 냈었다. 태연은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늘 미영은 아니라고 답했다. 글 중간 삭제는 기차로 할게 ㅅㅇ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