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속의 버건디 , Killing Me Softly.
01.
"우리가 이제 이름도 모르는 애들 뒤치다꺼리도 해야돼?"
머릿수에 어울리지 않게 비좁은 차로 몸을 우겨넣으며, 김태형이 투덜거렸다. 늘 있는 일인 듯이 박지민이 눈을 휘어접으며 받아쳤다.
"일이 커질 수도 있다잖냐~ 보스가 너한테 걔네들 이름 잘도 말해주겠다. 말해주면 찾아가서 깽판 칠 걸 누가 모르고."
"하여튼 책임감 없는 새끼들. 이 형님이 또 나서 줘야지."
"이제 둘다 조용히 하고 작전 잘 들어라. 다 탔지?"
운전석에 앉아 우리를 둘러 보며 말하더니,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포마드 머리를 넘기는 저 사람은 김남준이다. 작전에 나가면서 왁스는 왜 챙기는지, 간지는 포마드에서 나온다나 뭐라나.
"근데 오빠도 나가요? 진짜 큰일인가 보네."
"별거 아닐거야. 신입한테 처음으로 현장 일을 맡겼는데, 실수로 목격자가 생겼나봐. 근데 신원이 불분명해서.. 수행지가 증권가 주변이라 혹시 몰라.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그 사람 잡아오는거. 데려오면 나머지는 본부로 가서 나랑 박지민이 알아서 할거니까 박지민,김태형은 차에서 예비로 대기하고, 전정국이랑 김탄소 너네가 잘 해봐라. 호석이가 지시 내려줄거야. 안 어렵지? 사람 하나 잡는건데 뭐."
"쉽다면서 오빠는 왜 왔는데요, 원래 윤기오빠랑 본부에 있잖아."
"김탄소 넌 내가 맘에 안 드냐? 혹시 모르니까! 나도 가만히 앉아서 모니터 보고 지시 내리는게 훨씬 좋다~ 보스가 따라가 보래서 온거야."
자 그럼 출발한다. 김남준이 말을 끝마치고 시동을 걸었다. 구형 세단에 여섯명이 낑겨 앉으니, 이거야 원.. 커브를 돌때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 있으려니 제대로 된 임무 수행도 전에 내가 연행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결국 아침부터 만족스럽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던 김태형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 형!!! 뭐 이런 차를 끌고 와요. 지금 사람만 여섯인데 목격자 잡으면 어디다 두라고? 트렁크에 쑤셔넣어요?"
신경질이 담긴 김태형의 목소리에 김남준은 힐끗, 눈길을 주더니 어. 한 마디로 답했다.
"어차피 그 사람 곱게 모셔와봤자, 본부에서 우리한테 협조 안 하면 뭐. 살릴 필요 있나."
뭐하러 힘 빼냐? 무심한 김남준의 모습에 곧 현장 상황이라는 사실이 덜컥 느껴져 왔다. 5년 째 현장에 몸 담그고, 또 꽤나 인정받고 있던 탄소였지만 늘 수행 직전에는 어쩔 수 없는 긴장에 빠졌다. 갑자기 움츠러든 탄소의 모습에 옆에 있던 전정국이 시선을 보냈다.
급작스러운 우회전에 전정국의 몸이 탄소에게 다가와 밀착했다.
"김탄소 긴장하지마, 걱정 말고."
"긴장은 무슨,누가 긴장했대?" 탄소는 괜히 틱틱거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거칠고 목숨이 달린 위험한 순간을 이겨내고 상대를 압도시키는 탄소의 뒤에는 항상 전정국이 버텨주었기에,
남자들의 기싸움 속 지치고 힘든 정국이가 탄소를 보고 숨을 돌리듯이 서로는 서로에게 큰 버팀목이자 힘이 되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장이 아니더라도 함께 하던 둘의 시간은 탄소가 기억도 안나던 오래전부터여서, 전정국과 김탄소의 사이는 남들이 흔히들 말하는 소꿉친구의 정도였다. 늘 장난스레 말을 걸고 탄소와 투닥거리던 전정국이였지만 작전 상황 속에서는 여느 누구에게도 무시당할 수 없도록 단호하고, 강인했다. 지금처럼.
"탄소 긴장했냐? 어차피 잘해줄거면서 뭐~ "
김남준 옆 조수석, 여기는 현장 담당 팀장 정호석이다. 흔히들 정팀장이라 부르는데, 본인은 굉장히 낯간지러워한다. 주로 남준이 오빠와 작전을 짜고 전략을 구성해 우리에게 지시하면, 박지민과 김태형, 전정국과 내가 현장에서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넷 중에서도 대충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이거 잘 봐둬. 목격자 사진이야. 얼굴 잘 외워두고 수행지 도착하면 잠복하다가 목표 발견했을 때 셋이 나간다. 최대한 조용히 뒤쫓다가 뭐, 적당히 조용한 데로 유인해서 처리하면 돼. 이 정도는 경험 많잖아. 부담 갖지마."
말을 끝내며 호석이 오빠는 우리에게 사진 몇 장을 주었다. 사진 속 남자는 평범한 30대 회사원 같았다. 170 중반쯤 되어 보이는 키와 퇴근 후에는 헬스를 다니는 듯 적당히 잡힌 몸집. 굳이 특이점을 잡자면 누가봐도 증권가 쪽 사람이라는 것. 하기야 우리에게 정보는 남준이 오빠의 포마드만큼 소중하니 찌라시가 판치는 증권가에선 충분히 유의하고 조심해야한다.
점심시간 때가 겹쳤는지, 도착한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죄다 목에는 자신이 어느 소속 누구라고 자랑하는 듯, 반투명하거나, 회사 로고를 딴 색을 바탕으로 한 사원증이 걸려있었다. 한 손엔 업무 서류를 잔뜩 들고 나머지 한 손엔 세상에, 저게 몇 개야.. 두 손으로도 들기 버거워 보이는 커피들을 들고 어깨로 힘겹게 전화를 받으며 길을 건너는 사람-아마 점심시간이 끝나면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될 부서의 신입사원이겠지.
그 건너편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카페에 앉아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아니 서로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이미 식사를 마치고 대화-그 주제가 업무인지, 상사인지, 최근 떠오르는 정치적 이슈인지, 헛도는 소문일지는 그들밖에 모르지만-나누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이였다. 다들 자신의 일에 치중해 수많은 얼굴들을 지나치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갈 길만 가는.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축소판. 아무튼, 그렇게 낡아빠진 세단 속에서 6명의 눈, 12개의 눈이 목격자를 쫓고 있자니 슬슬 물려갈 때 쯤, 한 식당 입구에서 나오는 목격자를 발견하였다. 너나할 것 없이 거의 모두 동시에 목표를 확인하고,
"가자."
정팀장의 한마디에, 김탄소와 전정국은 길을 나섰다.
수행지가 직장인의 장소인 만큼, 셋은 어색하지 않도록 세미 정장을 차려입고 호석이 오빠는 평생 쓰지도 않던 안경을 썼다.
우리의 눈길이 느껴졌는지, 호석이 오빠는 괜히 머쓱한 듯 큼큼 거리며 말했다.
"윤기!! 윤기 보여주려고 쓴거야!!!" 라며 안경 오른쪽 모서리를 톡톡 쳤다. 그 손길과 동시에, '야. 니 지문 보려고 씌운거 아니니까 치지마.' 윤기 오빠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 속 장치를 통해 들려왔다. 놀라 호석이 오빠를 쳐다보니 탄소 안녕, 하는 편안함이 날 찾아왔다. 나른해.
"정신차려 김탄소, 집중해."
윤기오빠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무섭게 전정국이 옆에서 딱딱한 목소리로 날 깨웠다.
목표는 홀로 간단히 식사를 마쳤는지,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옆 카페에 들어가 주문을 하는 듯 하였다.
"야 탄소야, 아무래도 니가 나서야겠다. 저 사람 사원증도 없어서 이름도 모르고, 애초에 우리한테 정보라고는 얼굴 아는거 밖에 없었는데 이거야 원. 우리가 꼬실수도 없고.."
호석이 오빠가 난감한듯 말끝을 흐렸다. 아.. 이 불길함은 혹시,
"너가 좀 꼬셔서 조용한 데로 데려가 봐라. 우리가 쫒아갈 거니까 걱정말고."
왜 불길함은 늘 틀린 적이 없는지, 미인계라니...
"나온다. 탄소야 미안해 조금만 수고해주라!!"
원망스런 눈길로 호석이 오빠를 쳐다보니 옆에 전정국도 굳은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목표는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시켜 손에 들고 문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눈 딱 감고 얼른 끝내서 돌아가자.
난 뒤에 일행이 있는 척, 뒤를 보며 잘가라는 인사를 하는 듯한 모션을 취하고 적당히 목표와 가까워 졌겠지, 하는 순간 힘차게 뒤돌았다.
내 팔과 목표의 어깨가 부딪히는 느낌에 이어 갓 시킨 원두의 향기가 날 감싸고, 이윽고 서서히 냉기를 품어 날 적셔왔다. 성공이다.
"어머!!!"
갑작스러운 충돌에 놀란 목표는 나의 비명아닌 비명에 더욱 놀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아 괜찮으세요??... 제가 핸드폰을 보면서 나오는 바람에.. "
이어지는 목표의 변명에 나는 흰 셔츠가 젖어가는걸 보이며 잔뜩 난감한 표정을 비쳤다. 이쯤 되면 넘어올 때가 됐는데.. 목표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나는,
"괜찮아요 저도 못봤는데요 뭐... 근데 사람들이 너무.."
내 비명 덕분인지 북적이던 카페 앞 거리는 더욱 붐벼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커피를 말리는 척 윗 단추를 하나 풀었다.
"일단 자리좀 비킬까요? 여긴 길목이라 서로 난감한데, "
이어지는 내 말에 목표는 얼굴을 붉히며 날 따라왔다. 됐다. 얼마 안가 꺾으면 사람이 덜 한 골목이 있으니, 그리로 들어가 적당히 세탁값을 따지다 보면 호석이 오빠와 정국이가 올 것이다.
아, 불쾌해.
또각또각, 붐비는 사람들이 줄어듦에 따라 귀를 울리던 시끄러운 말소리가 사그라들고, 구두소리만 들릴 만큼 고요한 골목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흰 셔츠인데, 제가 부주의했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건지, 목표의 얼굴이 아직도 붉다. 더러운 새끼.
"아, 아닙니다. 제가 친구랑 얘기를 하느라. 커피는 어떡하죠, 방금 사신 것 같던데."
"그럼 커피 한 잔 하실까요? 그걸로 커피값 퉁치죠. 옷은 새 와이셔츠 하나 사드리겠습니다.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초면에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너무 제 스타일이셔서.. "
아까 젖은 셔츠 사이를 훔쳐보던 눈빛이 떠올라 벌레가 기어가는 듯 소름이 돋았다. 탄소야 참자... 전정국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느려터진건지.
"미안해 김탄소, 좀 늦었지. 사람들이 좀 있어서."
전정국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정국이는 내 팔을 잡아 자기 뒤로 숨기고,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나에게 주었다. 입어. 한 마디를 남기고,
"뭐야 당신은?" 몹쓸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성을 내는 목표에게, 전정국은 거침없이 다가갔다.
"뭐긴 뭐야, 닥치고 숨 크게 들이쉬세요~ "
순식간에 뒷목을 잡아채 목표의 입에 손수건을 갖다대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던 목표는 금세 의식을 잃고, 전정국은 목표의 손과 발을 묶어 포대자루를 메듯 들쳐업었다.
"정국아, 차 대기 시켜놨다. 얼른 와."
정팀장의 말에 정국이는 속히 움직여 트렁크에 목표를 실었다.
"수고했어. 얼른 가자. 다친덴 없지?"
정국이는 여느때처럼, 나를 먼저 챙겨주었다.
차를 타니 김태형과 박지민은 손에 스무디, 핸드폰을 들고 게임에 열중해 있었다. 아까 그 김태형은 어디로 간건지, 저럴 때 보면 오빠라 부르기도 부끄럽다.
가만히 있어도 기분 나쁘게 계속 올라오는 커피 향에, 나는 잔뜩 불쾌해져 나도 모르게 뾰루퉁해졌다.
"아, 얼른 씻고 싶다. 팀장님 이제 이런 임무는 별로 안 반갑네요." 내 말에 호석이 오빠가 몸을 돌려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씻고 싶어? 나도 땀 많이 났는데,"
느닷없이 옆에서 전정국이 말을 보태왔다.
"어쩌라고.. 씻을 줄 몰라?"
내 대답에 전정국은 갑자기 몸을 숙여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같이 씻을까?"
아니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즉각적으로 주먹이 나가 전정국의 배에 꽂혔다. 이어지는 오빠들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왜~ 우리 어렸을 때는 같이 목욕도 하고, 물장난도 하ㄱ..."
"그만해라."
"네."
가끔씩 전정국은 나도 기억 못하는 어린시절 얘기를 꺼내서 날 당황하게 한다. 그래도 현장 일을 마치고 나누는 정국이와의 대화는, 비타민 같이 날 생기 있게 만든다.
어느새 본부에 도착해 지하에 주차를 마치고, 게임도 이기고 스무디를 싹 비워 기분이 좋아진 김태형은 목격자를 단숨에 들쳐업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간 우리는 목격자가 의식을 채 깨우지 못한 채 의자에 앉은걸 확인하고,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남에 따라 홀가분해진 탄소는 정국이를 미소를 띈 채 바라보았다. 정국이도 이에 따라 웃어주려는 순간,
의식을 차린 목표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를 보았다. 그 섬뜩한 눈빛에, 순식간에 등골에 소름이 돋은 탄소를 알아챈건지. 정국이가 탄소를 뒤에 숨겨 시야를 차단했다.
"자~ 이제 당신은 우리랑 할 얘기가 남았고, 쟤 이쁜건 우리도 아니까 그만보자~"
목표의 시선을 눈치챈 박지민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상대를 위협하며, 김남준을 제외한 모두를 나가게 해 난 벗어났고,
성공적인 임무 수행뒤에 따라오는 편안함이 날 반겼다.
아. 좋다.
그도 잠시, 핸드폰이 울려 확인한 액정 위 글자에는
[임무 끝났으면 잠깐 올라와라.] -보스-
변함없는 보스의 호출이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