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선 곳에서 의사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장난감 기차를 움직일 뿐이었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퍽 곱다고, 한솔은 생각했다.
“착하군요. 아, 인사가 늦었네요. 한솔 씨.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지훈이고 올해 서른다섯인 아동심리학자예요.”
지훈의 손이 큼직한 유리 상자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금박에 싸여진 초콜릿이었다.
아이들에게 하나씩 초콜릿을 건넨 지훈은 입에 검지를 대고 쉿, 하더니 수녀님께는 비밀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키득대며 초콜릿을 까먹고는 기차가 정차한 역으로 달려갔다. 초콜릿의 금박 껍데기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지훈의 손가락이 그걸 집고 뭉쳐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금빛 공은 보기좋게 골인했다.
"초콜릿 먹을래요?"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초콜릿에 손이 가지 않았다. 사실 그 일 이후로는 초콜릿 따위, 먹은 적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초콜릿이 쥐어졌다. 다른 의사와 다르다는 건 잘 알겠다.
“먹어요. 달지 않으니까.”
정말 독심술을 배운 것 같다. 입속에 까 넣은 초콜릿은 씁쓸했다. 현실과 엇비슷한 맛이었다. 좀 더 맵거나 짰어도 어울렸겠는데, 한솔의 머릿속이 한결 차분해졌다. 단순히 먹을 걸 먹어서 기분이 좋아진 걸까. 구석의 아이들은 말없이 기차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느샌가 자신의 발 앞에 기차가 멈춰 있었다. 아이들의 까만 눈이 한솔을 꿰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기찻길을 밟고 있다는 걸 금세 깨닫고 얼른 한쪽 다리를 들었다. 다시 기차가 출발했다.
“참, 이 모든 건 제 취향이니 이해해 주세요. 하기야 내 진료실인데 누가 참견하겠어. 설마 제가 조금 모자란다거나,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지는 않으시죠, 한솔 씨?”
지훈은 경쾌한 어조로 지저귀듯 말했다. 애라고 생각한 게 미안할 정도로 톡 쏘는 말이었다. 지훈은 볕이 잘 드는 테라스의 테이블 자리를 권했다. 따사로운 햇살 때문인지 쓴 초콜릿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지금까지의 내력을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지훈이 이미 진료기록에서 읽었을 오래된 것부터 최근의 정황까지, 그 모두를.
그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또 다른 인격인 '버논'과 살아왔다. 서류상의 이름은 '한솔 버논 최' 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먼저 발견된 인격이기 때문이었다. 한솔은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고, 그가 어린 나이에 화가로 이름을 올린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그는 유명한 화가들과 함께 어깨를 견줄 만큼 크게 성장했다. 그의 작품은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으나 그는 점차 지쳐 갔다. 한솔과 버논, 두 삶을 살아내야 할수록 분리된 삶에 대한 회의는 커져만 갔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사라지게 할 수가 없었다. 버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둘의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때에 한 소년을 만났다. 제주도 출신에 해맑은 미소가 매력적인 소년은 묘 박사가 담당한 환자 중 하나였다. 한솔과 버논이 소년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한솔과 버논을 말 한마디 안 하고도 알아맞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경성 정신 질환을 몇 개 앓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밝은 사람이어서, 한솔도, 버논도 그를 좋아했다. 소년은 해처럼 웃는 사람이라고, 언젠가 한솔은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절대 흐리지 않을 태양이라고. 그러나 소년은 옥상에서 뛰어내려 버렸다. 한솔이 미국 유학을 간다고 한 다음날이었다. 소년의 마지막 일기에는 한솔이가 떠난 뒤 죽을 거라고 적혀 있었다. 잘 다녀오라는 말이 추신으로 덧붙여져 있었다.
"승관 군이 당신과 버논의 관계를 망쳐 놓은 건가요?"
"네, 뭐. 그렇게 됐죠. 제가 유학간다는 말만 안 했어도 승관이는 좀 더 살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병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요."
이후, 버논은 현실에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한솔의 꿈속에 나타났다. 꿈속에서 한솔은 매번 죽었다. 그럼에도 그가 제 발로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는, 승관이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솔이 꿈을 꾸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다시금 초콜릿인지 과거인지 모를 맛이 씁쓰레하게 올라와 한솔은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물이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는 검은 맛이 혀에 불쾌하게 맴돌았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승관이와 관련된 것을 더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그의 기억력은 오래된 필름처럼 드문드문 끊겼다. 여하튼 그 이후로 한솔과 버논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소년의 마지막 진료기록대로라면 한솔이 유학을 떠나 있을 때 승관이는 죽을 예정이었다. 그저, 좀 더 앞당겨진 죽음일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부승관이라는 소년은 점차 잊혀져만 갔다. 묘 박사만이 한솔이 이따금 승관을 언급할 때, 그의 해사한 표정과 생동감 넘치는 노랫소리를 묘사할 때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뿐이었다.
그 뒤로 버논은 오직, 꿈 속에서만 한솔을 마주했다.
꿈은 한 판의 게임이었다.
복도의 문을 열고 한솔이 꿈속으로 들어서면 그의 손목시계는 움직였다. 보통은 문 앞에 선물상자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이 그날의 무기였다. 없다면 맨손으로 싸웠다. 잠든 시간 안에 한쪽을 죽이면 긴 신호음과 함께 끝이 났다. 한솔은 칠 년간 죽어 왔고 그 대가인지 버논은 지금껏 경계를 침범한 적이 없었다. 이게 정해진 루트였다. 이런 일은 전례가 없어 묘 박사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아마도 지훈이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답이 정답이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답이 오답일 경우 이론대로라면 한솔은 빠른 시일 내에 사라져야 했다. 지금으로선 저 젊은 의사가 내놓는 모든 해결책이 정답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죠. 아, 전시회 준비로 바쁘시면 남은 상담은 서울에서 해도 될까요?”
“저야 고맙죠. 그런데….”
혀끝에 맴도는 카카오 맛처럼 쓰디쓴 기억이 그의 명치를 꾹 눌렀다. 하고 싶은 말이 얹힌 탓인지 속이 답답했다. 혀끝에서 음절들을 굴려 내는 것이 힘들었다.
“소년의 이름이 부승관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승관 군이 묘 박사님이 담당하신 환자 중 하나라는 걸 잊으셨나 보네요.”
지훈이 서류를 챙겨 나간 후에도 한솔은 한 대 맞은 듯한 멍한 기분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는 지훈이 묘 박사의 수제자였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그래, 수제자니까.
기껏 가라앉았던 승관의 잔상이 어지럽게 한솔의 눈앞을 메웠다. 한솔은 한참 후에야 발걸음을 옮겨 병원을 떠났다. 창밖엔 꽃이 흐드러졌다.
날이 참 고와서 한솔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