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음이 가냘프게 울렸다.
바람이라도 한 줄기 불었다면 듣지 못했으리라. 손목에는 다행히 죽은 시계가 말라붙어 있었다. 간호사 하나가 그가 깨어난 것을 발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훈이 병실을 찾았다.
“위험했어요. 하루 동안 깨어나지 않아서.”
한솔은 지훈이 건네는 갈색 마닐라지로 싸인 소포를 받아들었다. 제법 묵직했다. 다른 손으로는 초콜릿이 가득 든 봉지를 받아들었다. 바스락, 엷은 우울의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대신 버논 씨가 깨어났어요. 비디오를 찍었고, 이걸 전해 달라고 하시고는 레돌민 두 정을 복용하셨어요.”
카드는 하얀 오간자 리본과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꼭 청첩장 같네, 한솔은 카드를 펴들었다. 버논다운 깔끔한 필체였다. 카드의 내용에 한솔은 헛웃음을 지었다.
‘소실이 있을 거야. 날 보러 와.’
한솔이 카드를 건네자 지훈의 표정이 참담하게 바뀌었다. 주어를 생략했지만 어느 쪽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소실이 일어나는 쪽은, 어쩌면, 아마도, 한솔의 쪽일 테다. 한솔은 굳이 물었다.
“누가 사라지나요?”
대답 대신 내리깐 지훈의 눈을 보며 한솔은 낮게 신음했다. 의료진이 병실에서 나가자마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영상을 틀 준비를 마쳤다. 아직은, 사라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한솔아, 여길 봐.”
남자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불렀다. 한솔의 손끝이 차게 식었다. 그는 저기서 미소 짓는 사람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일지라도. 버논의 입꼬리가 완벽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넌 참 행복하게 지내고 있더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뻔뻔하긴. 그래도 마지막이니 이해해 줘야지. 널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어. 기다리고 있을게. 어서 와.”
영상이 다 끝난 뒤에도 한솔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솔은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사라지기엔 일렀다.
얼얼하고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곧이어 익숙한 피 맛이 입안을 온통 휘저었다. 입안 살과 혀를 너무 많이 깨문 탓에 이젠 감각조차 무뎌졌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더한 버논의 협박에 차마 꿈속으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잠들면 안 돼. 한솔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꿈속에서 그는 사라질지도 몰랐다. 마지막 잠에 들고, 깨어나는 것이 버논이라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를 악물고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한솔은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복도,
어둡고 기나긴 복도.
파르스름한 빛이 새 나오는 문.
한솔은 문손잡이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선득한 이면에 숨어 있는 미지근한 온기가 심장의 떨림에 반응했다.
문을 열자 옅은 물의 숨결이 복도를 적셨다. 한솔은 안개 속 가라앉듯 놓인 선물 상자를 열었다. 은색 리볼버였다. 밤공기 속에서 차게 식은 총신은 죽음의 무게만큼 묵직했다. 그는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안개 속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승관이 죽은 곳이다.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후드를 눌러쓴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버논이다.
버려진 소파에 앉아 있는 버논의 등이 왠지 작고 여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금장치를 풀고 총을 겨눈 채 기다렸다. 이상했다. 금속 소리가 들렸을 텐데. 죽여주길 바라는 걸까. 버논은 결코 그럴 애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뤘다간 자신이 죽었다. 이번엔 소실일지도 몰랐다. 버논 역시도 이 기나긴 게임을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한솔은 꺼림칙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렸고, 핏빛 얼룩이 느릿하게 번졌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솔은 총을 내던지고 환영에게 달려갔다. 후드를 벗기자마자 쏟아지는 밝은 갈색의 머리칼에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승관이었다. 승관의 얼굴이 창백했다. 재갈이 물려진 잇새와 코로 숨이 밭게 뿜어지고 있었다.
승관아,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안 되는데. 한솔의 손이 가만가만 승관을 안아들었다. 망가진 인형처럼 그의 팔다리가 흔들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재갈을 풀었다. 승관의 눈빛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았다.
“한솔아.”
승관이 애써 밝게 말했다.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걸. 승관이가 지금 죽는다면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떠나지 마.”
“내가 죽는 건 네 탓이 아니야, 한솔아.”
“죽지 마, 제발.”
한솔이 눈물을 훔쳤다. 눈앞이 흐려져 승관을 잘 볼 수 없었다. 후드티와 바지를 적신 피가 흘러내려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작은 웅덩이를 이룬 피는 점점 차게 식어갔다. 미약한 온기가 서린 승관의 손가락이 한솔의 젖은 뺨을 쓸다 힘없이 툭, 떨어졌다.
소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