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아, 겨울이 다가온다. 흰 계절이다. 네가 내게 찬 새벽으로 닿아온다. 나의 손끝이 네게로 가닿으려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떻게 저토록 하얄까. 나는 뻗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네게 내 그림자가 가닿으면 그대로 얼룩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면서도 나는 잎잎이 피어난 목련을 닮은 너에게 손을 대어보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너는 움츠러든 내 손을 끌어다 너의 뺨에 대었다. "맘대로 해." 나는 선악과를 베어 문 아담이 되었다. 그러나 너는 내 곁의 이브가 아니었다. 너는 머리 꼭대기에서 가장 달콤하게 죄악을 속삭이는 뱀이었다. 뭘 마음대로 할까. 너에게 빠질지 말지를 맘대로 결정하라는 말이었나보다. 그 뜻이었다면 기꺼이 네게 빠지기로 했다. 하얗고 깊은 죄악으로. 불타는 지옥의 아가리에 나는 겁도 없이 발을 내딛었다. 너와의 관계를 연애라고 할 수 있었는지, 그건 의문이다. 너는 나에 대해 어떠한 애정도 보이지 않다가, 나를 필요로 할 때만 나를 찾았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이나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낮이면 나는 너의 시선을 기다렸다. 네가 내 날개뼈를 어루만질 때마다 일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나는 고스란히 겪어내고 긴긴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롯이 외로움으로 가득 찬 우리의 관계 속에서 나는 너를 사랑했는지도 몰라. 사랑해서는 안될 너를, 내가, 감히. "너 어제 어디 갔었어?" "그냥, 좀 바빴어." "말해." "일 때문에 바빴어." 난 네 양 어깨를 잡고 네 눈을 바라본다. 오늘도 우린 싸운다. 난 널 벽에 몰아붙이고 타는 눈으로 날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면서 따져 묻는다. 말해, 말해, 말하라고! 집착의 끝은 어디일까. 파멸이다. 그렇기에 난 널 끌어안고 입술을 맞물린다. 지훈아, 나는 아무데도 못 가. 그러니 네가 내 곁에 있어줘야지. 안 그래? 이 관계가 계속되면 우리에게 남는 건 깊숙한 상처와 뚜렷한 흉터뿐이겠지만 난 아파도 좋아. 죽어도 좋아. 그래서 널 더 껴안아. 그래, 넌 아무데도 못 가. 너는 내 거니까. 시간이 흘러도 너는 변하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다. 변하는 건 내 쪽이다. 처음의 마음이 점차 식어간다. 너를 결박하고 구속하고 끝내는 집어삼키려고 한다. 너의 존재에 집착한다. 나는 우리의 마지막이 두려워져만 간다. "나는 너에게 뭐야?" "그런 거 묻지 않기로 했잖아." "우리 사랑하고 있는 거 맞지." "그런가. 이게 사랑같아? 난 장난같은데." 밑도 끝도 없는 잔인한 장난을 너는 즐기고 있었나 봐. 나는 네가 전부인데 너는 내가 일부도 차지하지 못하게 한다. 너는 경쾌하게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날 끌어안는다. 선득한 이마를 대고서 주문을 읊는다. 넌 날 사랑하잖아. 내가 장난이라 해도 넌 진심이어야 해. 그래야만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떠나간 자리에 나는 고장난 인형처럼 주저앉는다. 축 늘어진 팔다리에는 너를 향한 마음이 무겁게 매달려 네 목을 조르지 못하도록 나를 저지했다. 너는 떠돌다 어떤 사람의 손길을 탐할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과 잠의 조각을 나눌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다. 죄다 망가진 채로. 나는 어떡해야 할까. 내가 널 떠날 수가 없는데 너는 날 떠날 수가 있네. 그 사실이 너무 두려워서 나는 고갤 돌리질 못해. 네 숨을 잊질 못해. 해가 저물고 어둠이 문을 두드린다. 나의 마음 속에 흉포한 짐승이 꿈틀거린다. 발톱을 드러내고서 널 향해 이빨을 빛낸다. 나는 이 짐승을 네게 보내지 못한 채 너의 그림자만 하염없이 그리다가, 그러다가 동이 터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본다. 너는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다. 땅과 하늘을 분간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내게로 안겨온다. 술과 꽃내나는 작은 몸이 내게 안길 때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이 새벽 네 시라는 것도, 네가 매번 이런다는 것도, 내가 매번 눈감아준다는 것도. 결국 너는 나의 것. 이대로 산다면 평생 허공엔 나의 한숨이 번지겠지. 하지만 너는 나에게로 회귀할테니 괜찮다. 네가 돌아갈 데가 나 말고는 없었으면 좋겠다. 뼈마디가 희게 불거지도록 쥐었던 손이 조금씩 풀어지고 눈물은 내 뺨을 뜨겁게 적신다.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이토록 덥게 달궈진 새벽의 눈물을. 네 잠든 모습은 아기같기도 하고 천사같기도 하다. 나는 다시금 손을 뻗어 네 볼을 쓸어보다가 입술을 대어본다. 고운 볼에 축축하게 젖은 입술이 닿았다. 네가 눈을 감은 채 내게 팔을 뻗어온다. 나는 그 희고 우아한 몸짓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것이 설령 나를 지옥으로 끌어당긴다 해도 나는 기꺼이 널 따라갈테다. 네게 입을 맞추며 이것이 내 생에 마지막 입맞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헛된 바람일 뿐. 너는 손가락 사이로 스쳐 분다. 일말의 머뭇거림도 허용하지 않은 채 폭풍처럼 불어닥친다. 너의 시린 입술이 내 모든 것을 부서뜨리고 만다. 너는 내게 수없이 많은 초승달을 새기고 나의 수많은 밤을 기다림으로 앗아갔는데, 나는 지금의 입맞춤으로 모든 것을 용서해버린다. 이게 뭘까, 지훈아. 이것도 장난이니. 그렇다면 더 지독하게 날 망치지 그랬니. 내가 이 고통을 느낄 수도 없게, 내 통점에 너를 스며들게 하지 그랬니. 그러면 나는 황홀하게 죽어갈 텐데. 우리의 장난이 지속되던 가을의 끄트머리였다. 너는 어딘가 조금 슬픈 미소를 띠고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너와 오랜만에 맨 정신으로 맞는 새벽이었다. 부쩍 차가워진 바람을 느끼며 나는 네 곁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너는 울고 있었다. 너를 안고 어쩔 줄 모른 채 너를 달랬다. 너는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누가 널 울렸을까. 그게 나라면 나는 내 목도 조를 수 있었다. "순영아." 나는 그 말이 전해오는 무게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다. 너는 팔을 뻗어 나를 그러안는다. 너의 체온, 너의 냄새, 너라는 존재에 더 이상 그리움을 느껴서는 안 될 것임을 직감한다. 단 한 마디 말로도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내 등을 쓸어내린다. 먹먹한 것들이 치솟는다. 간헐적으로 끅끅,하는 그 애처로운 소리에, 나는 어떤 말이 그 뒤에 따라올지를 알아버린다. "헤어지자." 네 입술이 내게 닿아온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텅 빈 입맞춤이 우리의 끝이라서 다행이다. 너는 가장 따스한 방식으로 내게 이별을 고한다. 나는 천천히 내 손을 네 등에 얹는다. 너를 힘껏 끌어안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가 다른 사람을 향해 떠나가기를 빌어본다. 그러나 온 몸에 고르게 퍼지는 온기에 나는, 나는 울 수 밖에. 어느덧 너와 헤어진 지 꽤 됐다. 이제 나는 너만큼만 술을 마신다. 투명한 유리잔에는 서러운 밤하늘이 담겼다. 별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화한 빛을 내다 초승달의 날선 모서리가 목에 콱 걸린다. 쓸데없이 코끝이 시큰거린다. 술을 잘 하지도 못하는데 왜 이렇게 네가 보고플 때면 술을 마시게 되는지. 취했는지 네가 어른거린다. 네가 내게 돌아올 때까지 매일 취한 채 살아가나보다. 지훈아, 이게 사랑이더라. 세상 사람들이 이게 사랑이래. 내가 불안하게 가슴 졸이며 보내던 낮과 네 목소리가 귓가에 떠돌던 밤이, 그리고 네가 내게 안겨들던 새벽이, 모두 다 사랑이라더라. 우린 얼마나 서툴렀던 걸까. 사랑하기엔 너무 어렸었나 봐. 아니면 사랑하지 않기엔 너무 성숙했는지도 모르지. "블루하와이 한 잔이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귀를 의심한다. 돌아보고서, 눈을 의심한다. 그 자리에 있는 게 너일 리 없다고, 나는 불안한 확신을 한다. "아, 두 잔이요." 내 빈 잔을 보고 네가 두 잔을 주문한다. 너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순간에 멈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너는 칵테일을 내 쪽으로 밀어준다. 푸른 바다가 찰랑인다. 네가 떠나간 나의 세계가 찰랑인다. 내 시간과 공간과 순간이 너의 등장으로 인해 일렁이다 날아가버린다. 너와 나만이 여기에 남는다. "집 비밀번호, 아직 안 바꿨지?" 지훈아, 지훈아. 난 널 아직도 사랑하나 봐. 그런가 봐. 내 심장이 쾅쾅 부르짖는다. 나는 너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걸 어쩌자고 모르는 척 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파도로 목을 축인다.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해." 내 말에 짓는 네 미소는 여전히 밝고 따사로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이 모든 게 지독한 장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너는 이지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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