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패러디
최승철 ver.
나는 집에 돌아와 줄곧 창가를 바라봤다.
그냥 그가 언제쯤 귀가할지 궁금해서였다.
승철의 까만 포르쉐가 그의 차고로 삼켜졌다.
이제 그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달빛을 받아 하얬다.
어둠이 내리깔린 가운데 달쪽이 떨어져 내린 것만 같았다.
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조금 당황스러워서 한 걸음 물러나 커튼을 쳤다.
그는 분명히 내가 있는 창가를 보고 있었다.
다시 커튼을 걷었을 때, 그는 집으로 막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불안한 어둠 속에 다시 혼자가 되었다.
오늘 처음 만났으면서 내가 왜 그에게 신경을 쓰는 건지, 그가 나에게 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날씨 일교차가 많이 났었나. 감기일까.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알약을 물고 물 한잔을 들이켰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광고를 제일 많이 하는 진정제답게 끝내주게 차분해졌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어떤 감정,
아마도 하룻밤쯤으로 끝날 감정을 이끌어내려는 속임수로 여겨졌다.
하지에는 집에 처박혀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건넨 집 비밀번호의 의중이 뭘까를 생각하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변기를 붙잡고 나는 알약 뿐 아니라 성수의 집에서 먹었던 식사까지도 토해내야 했다.
집 안은 마치 꽃이라도 핀 듯 진홍색 불빛으로 가득했다.
일리의 집에서 나는 일리가 읽어주는 잡지를 들으며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그녀는 잡지를 읽으면서도 나의 검푸른 물방울무늬 실크 옷을 매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의 완벽한 부채꼴로 치마가 정리된 뒤에야 일리는 읽기에 온전히 집중했다.
그녀가 마지막에서 네 번째 문장을 말할 때, 손톱과 발톱에는 빨간 매니큐어가 피처럼 붉었다.
침대 가에 앉아 매니큐어가 잘 말랐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덧 그녀가 마지막 멘트를 말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일리는 잡지를 탁자에 던지고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앉았다.
“지지배, 너 남자 생겼구나?”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언니가 척하면 척인데.
언니가 말하면 옘 해야지. 어떤 놈이야?”
일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을 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승철, 이라고 말했다.
내 입에서 음절들이 유리풍경처럼 잘그랑대며 흩어졌다.
“오, 세에-상에.
칠봉아, 내가 다리를 놔 줄게.
나 승철 씨 전에 프로젝트 몇 번 같이 한 적이 있어서 알아.
너 독신주의인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경사니. 진도는?”
“안 나갔어. 어제가 첫 번째 만난 거야.”
“뭐 받은 거 없어? 전화번호라던가.”
“집 비밀번호는 받았는데…”
“잘 들어, 칠봉아. 우리 집에 놀러 와.
그러면, 내가, 음, 두 사람을 함께 던져 버릴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두 사람을 옷장 안에 가두거나 보트에 태워서 한강으로 밀어 버릴 거라고.”
“잘 자, 일리야. 나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걸로 할게.”
내 말에 일리가 내 팔을 잡고 재빨리 말했다.
“승철 씨, 좋은 남자야. 알지?”
“알지.”
“그럼 잡아.”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정말 집에 가야 했다.
일리가 문까지 따라 나와 밝은 불빛 아래 나란히 서서 내 등을 토닥였다.
지금 내가 승철을 대하는 감정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마당에 팽개쳐 놓은 야외 의자에 잠시 앉아 앉았다.
달빛 아래로 흰 고양이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그것을 보며 나는 어젯밤의 그를 생각했다.
고양이를 쫓아 고개를 돌렸을 때, 이곳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17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이 내 이웃집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마치 은색 후춧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유로운 태도와 잔디 위에 안정되게 선 자세로 보아 그가 틀림없었다.
나는 그를 부르려고 했다.
일리가 친하다고 했으니 그걸로 이야기를 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가 나를 먼저 불렀기 때문이다.
“김칠봉 씨, 어제 우리 집을 쳐다보고 계시던데요.”
“미안해요. 승철 씨, 저, 제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
“빨리 하지가 왔으면 좋겠죠?”
나는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신경 쓰인다는 것을.
어쩌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한량 따위에게 마음을 뺏기다니, 실소가 나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게 굴어 놓고서 그는 그럴 줄 몰랐다는 듯 반응했다.
그가 손짓해서 나는 그의 잔디밭 쪽으로 다가갔다. 장미 향기가 짙었다.
“칠봉 씨, 만나고 싶어요. 내일 아침 열 시 기차를 탔으면 좋겠는데.”
“열두 시.”
“좋아요, 아래 신문 판매대에서 만나요.”
엉겁결에 툭, 말이 튀어나왔다.
열두 시라니.
그와 점심이라도 함께하고 싶었던 걸까.
관능적인 장미 덤불 사이에서 그는 내게 웃어 보였다.
온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에게서는 여름의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장미 덤불을 사이에 두고 나와 몇 마디 말을 더 나눴다.
별 의미 없는 말이었다.
모히또를 좋아하는지, 마티니를 좋아하는지 하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말을 마친 그는 내가 집에 들어가기까지 나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나는 이 쓸데없는 기대를 어서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부터 나는 부산을 떨었다.
지난 밤 제대로 못 잔 탓이었다.
몇 년만의 데이트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색색의 옷을 대어 보다가 내가 선택한 것은 갈색 모슬린 원피스였다.
가장 무난하고, 오랜만인 데이트 티를 내지 않는 옷이었다.
역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승철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심심하지 않으려면 뭐라도 사는 게 좋을걸요.”
그 말에 신문 가판대에서 잡지를 사고 콜드크림과 휴대용 향수까지 사 버렸다.
향수는 라벤더 냄새가 났다.
그 탓에 택시를 네 대나 그냥 보내고 회색 시트를 깐 라벤더 색의 새 택시를 잡았다.
이 택시를 타고 우리는 붐비는 역을 빠져나와 햇빛이 반짝거리는 거리로 나왔다.
바깥을 보고 있던 승철이 느닷없이 몸을 돌리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강아지 키울래요? 난 언제나 강아지를 기르고 싶었어요.”
우리는 송해를 빼닮은 노인이 있는 곳에 차를 댔다.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바구니 안에는 갓 태어난 잡종 강아지들이 올망졸망 웅크려 있었다.
노인이 택시 창문으로 다가오자 승철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슨 종이죠?”
“온갖 종류가 다 있어요, 어떤 종류를 원하시는지 모르겠네.”
“리트리버를 한 마리 갖고 싶은데요, 그런 녀석은 없나요?”
노인은 자신없는 태도로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다가 버둥거리는 강아지의 뒷덜미를 잡아 꺼냈다.
그걸 보고 내가 한 마디 했다.
“그건 리트리버가 아니잖아요.”
노인은 실망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가씨. 정확히 말하자면 리트리버에 가까운 잡종이죠.”
노인은 황금 밀밭 같은 강아지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털을 보세요. 아주 좋은 털이죠. 감기에 걸려서 귀찮게 하는 일은 절대 없어요."
승철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귀여워요. 얼마죠?”
노인은 강아지를 자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놈 말입니까? 삼만 원만 주시죠.”
그 강아지는 비록 발이 하얗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리트리버 같은 구석이 있었다.
승철이 품에 넣었던 강아지는 엉뚱하게도 내 무릎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온기에 금세 내 기분은 황홀해졌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에 한해서 그의 행동은 용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가 만날 때마다 강아지를 사댈 것도 아니니.
“암컷인가요, 수컷인가요?”
“고놈은 수컷입니다.”
승철은 빳빳하고 노란 오 만원권을 노인에게 건넸고 우리는 집 쪽으로 달렸다.
한여름의 일요일 오후는 목가적이었다.
너무나도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흰 양떼가 모퉁이를 돌아가는 걸 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차, 세워 주세요. 여기서 내릴게요.”
“아뇨, 김칠봉 씨. 가지 말아요. 강아지가 무릎 위에 앉아 있는 한은요. 부탁할게요.”
그는 택시 기사에게 한 아파트를 일러 주었다.
거짓말처럼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강아지는 잠을 깨고서 승철에게로 옮겨 갔다.
그의 아파트는 맨 위층의 펜트하우스였고 작은 거실, 식당, 작은 침실, 그리고 화장실이 하나씩 있었다.
거실에는 태피스트리를 씌운 가구가 가득 차 있었고 벽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나는 강아지의 털을 쓰다듬으며 일리가 내 치마를 매만질 때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파스타를 할 줄 알았다.
우리는 모시조개를 넣은 봉골레 파스타를 한 접시씩 먹었고,
그는 장식장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내 왔다.
잭 대니얼 파이어라는 영문이 써진 붉은 라벨이 병을 두르고 있었다.
“버논이라고, 미술 하는 애가 왔을 때 마시던 거예요. 독하지만 맛이 끝내주니까, 마셔 볼래요?”
나는 여태까지 딱 두 번 취했는데, 그날 오후가 두 번째였다.
그래서 그날 일어난 일은 모두 어렴풋하고 희미하다.
우리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브루스 올마이티>를 보며 계피 맛이 나는 그 잭을 다 비웠다.
노징 글라스가 얼음 때문에 김이 서렸고 나는 표면의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쓸어 내렸다.
그는 술에 진탕 취한 나를 라벤더 색 택시 대신 자신의 재규어에 태우고 집까지 바래다줬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내가 비밀번호를 세 번이나 틀린 탓에 일 분을 기다려야 했다는 것뿐이다.
그는 이번에도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가 가까워 오자 나의 이웃집에서는 밤마다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정원에서는 많은 남녀들이 별빛 속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오후에는 사람들이 호수라고 여길 만큼 큰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거나 일광욕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주말이 되면 승철의 롤스로이스는 아침 아홉 시부터 자정이 훨씬 넘어서까지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전용 버스가 되었고,
그의 스테이션왜건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노란 벌레처럼 활기차게 돌아다녔다.
매주 월요일에는 정원사와 가정부들이 집안 곳곳을 손보느라 바빴다.
매주 금요일에는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신선한 오렌지와 레몬이 다섯 상자가 배달되었다.
월요일이면 과일 껍질은 뒷문 밖에 산처럼 쌓였다가 멀끔하게 치워지곤 했다.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은 파티플래너들이 와서 요리와 술로 가득 찬 뷔페 테이블이 몇 개고 있는 그의 거대한 정원을 꾸몄다.
일곱 시에는 오케스트라가 도착해 연주를 시작했다.
수영을 하던 사람들도 이때쯤이면 위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에서 짝을 이루어 춤을 추었다.
도로에는 각지에서 온 차들이 다섯 겹으로 주차되어 있었고, 차에서는 남녀가 최신 유행하는 머리를 하고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내렸다.
정원에서는 웃음소리와 험담으로 활기가 넘쳤다.
밤이 깊어갈수록 빛이 밝아졌다.
오케스트라는 선정적인 칵테일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웃음이 쉽게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춤을 추듯 모였다가 흩어졌다.
그의 집을 지켜보는 것은 분명 재미있었지만, 저토록 소란스러운 사람들 틈에 섞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하지가 두려워질 만큼 다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