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패러디
최승철 ver.
이제껏 썼던 일을 보니 내가 무슨 몇 주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일 중 며칠에만 신경 쓴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로 붐비던 어느 여름날에 있었던 우연한 일에 불과했다.
그 후 나는 오랫동안 내 개인적인 일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에 일을 했다.
이른 아침, 태양이 서쪽으로 내 그림자를 만들 때면 서울특별시 하단의 유리로 된 건물들 사이를 지나 증권사 거리로 서둘러 향했다.
나는 다른 직원이나 젊은 채권 판매업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들과 함께 바쁘고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순두부찌개와 공깃밥, 커피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
나는 가평에 사는 남자와도 사귀었다.
그런데 그의 누나가 나를 언짢게 여기는 것 같아, 그가 승진하지 못하는 걸 빌미로 조용히 관계를 정리했다.
나는 주로 이자카야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왠지 이때가 하루에서 가장 기분이 우울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위층의 도서관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 투자와 증권에 대해 공부했다.
어디나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몇 명 있기는 마련이지만 그들이 위층으로 올라오지는 않았으므로 내가 일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그러고 나서 밤공기가 좋으면 산책을 조금 하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곤 했다.
나는 지금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생기 있고 모험이 가득한 밤의 분위기와 끊임없이 오가는 남녀와 자동차들이 들뜬 사람에게 제공하는 만족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사람이 잦은 거리로 걸어가서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남자를 골라 몇 분 후에 내가 그의 삶의 일부가 되는 상상을 즐겼다.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말리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때는 그들이 내 집까지 바래다주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그들은 나를 보고 빙긋 웃은 뒤에 환한 빛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나는 때때로 매혹적인 대도시의 황혼 속에서 뼈저리게 외로움을 느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서도 고독을 느꼈다.
가난한 젊은 직원들이 홀로 식당에 앉아 쓸쓸하게 저녁 식사를 할 때를 기다리며 어둑어둑한 거리를 서성거렸다.
그들은 밤과 삶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한동안 버논을 보지 못하다가 한여름에 다시 그를 만났다.
따분하다는 듯 도도하게 세상을 보는 그의 얼굴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가식이란 처음엔 그렇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숨기게 되기 마련이다.
얼마 후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우리는 함께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승철과 함께 하루를 보낸 이야기를 하자 버논은 내게 말했다.
“당신이 형을 좋아하는 걸 알아요.”
그는 구제할 수 없을 만큼 방탕했다.
그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참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외모를 무기로 사람들을 홀렸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 거만하게 냉소를 짓는 동시에 자신의 탄탄하고 활기찬 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내뱉듯 가볍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16차선 도로에 진입하자 버논은 화난 듯 악셀을 밟았다.
평일의 오전 열 시라 차는 많이 없었다.
계기판의 바늘이 180킬로미터를 가리켰다.
운전을 하며 평생 이런 속도는 겪어보질 못했던 터라 온 몸의 신경이 바짝 긴장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은 좀 더 적극적인 남자를 만나야 해요, 칠봉 씨.
형이랑은 평생 뭘 할 수조차 없을걸요.
강아지? 브루스 올마이티?
사춘기 애라도 되나 보죠?
잭을 마시면서 뻗을 때까지 키스도 안하다니, 고자인가.”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 걸까.
그의 발언은 무례하지만 직설적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화법을 좋아했다.
“당신이 당신처럼 적극적인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봐요.”
“그런 일은 결코 없길 바라요.
나는 적극적인 사람은 정말 별로거든요.
그래서 당신을 좋아하는 거예요.”
햇빛에 지친 그의 호박색 눈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런 고백이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우리 관계를 변화시켰고 나는 잠시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에 욕구를 억제하는 규칙이 많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본적인 덕목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갖고 있다.
나도 그러한 덕목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내가 이제껏 알아온 사람들 가운데 몇 안 되는 정직한 사람 중 하나이다.
7월 말의 어느 날 아침 아홉 시에 호화로운 승철의 차가 우리 집 문 앞에서 경적을 울렸다.
그가 날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나는 그와 데이트를 했고, 그의 파티에 갔으며, 그와 몇 번 증권사에서 마주친 것도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가 증권사에서 그를 마주친 뒤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와 계약해 공식적으로 얼굴 보는 자리를 만들어 버렸다.
나는 회식에서 그를 마주하며 처음으로 회식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여튼, 그는 또 다른 차를 이끌고 우리 집 문 앞에 왔다.
무슨 차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멋있는 은색이었다.
나는 이동수단을 예술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칠봉 씨. 오늘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요? 당신이 차에 탄다면 기쁠 것 같은데.”
나는 두말없이 그의 차에 탔다.
캐러멜 색 가죽시트의 감촉이 좋았다.
그는 내가 그의 차에 감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말을 꺼냈다.
“예쁘죠.
사실 칠봉 씨가 좋아해 줬으면 싶은 차에요.
이걸 타고 같이 또 데이트하고 싶었거든요.
나는 저번 데이트 좋았는데.
아무래도 첫 데이트에 집은 좀 부담스러웠나요?”
“좋았어요. 강아지도 좋았고, 영화도 좋았고, 그 잭 대니얼도요.”
우리는 대화를 하며 어딘가로 출발했다.
지난 한 달 간 그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고 그 사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상보다는 이웃집에 사는 남자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리가 예약했던 식당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특유의 교양 있는 말투를 멈춘 채 청바지의 무릎을 불안하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가 불쑥 말했다.
“칠봉 씨,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약간 당황해서 상투적인 말로 얼버무렸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말했다.
“당신이 보지 못했던 내 인생에 대해서 조금 알려 드릴게요.
잡다한 소문으로 당신이 나를 오해하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는 홀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기괴한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 맹세하고 진실만을 말할게요.
저는 부잣집 아들이에요.
가족은 이제 다 죽었죠.
워싱턴에서 태어나 보스턴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교포 4세였거든요.”
그는 재빨리 보스턴, 이라는 말을 삼키듯 했다.
마치 예전에 그것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혹시 허언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진지해 보였고,
나는 그의 부의 근원이 궁금하던 터라 그의 이야기를 마저 듣기로 했다.
“그 이후에는 유럽을 떠돌았어요. 파리, 로마, 베네치아…
예술품을 모으고 그림을 그리고 승마를 하면서 오래 전의 일을 잊으려고 애썼어요.”
그의 말은 어딘가 붕 뜬 구름 같았다.
그의 이야기가 진부한 소설의 남자 주인공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재벌들이 이렇게 사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미국 육군에 입대했어요.
그건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어요.
복잡한 것들을 빨리 정리할 수 있었거든요.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 503 보병연대 소속으로 파병됐었죠.
최전선에서 이틀을 기관총 16정으로 버티다 마침내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그들을 모조리 죽였어요.
그런데, 훈장을 받았을 때 기쁘지가 않고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었죠.”
나는 이제 그의 이야기로 빨려 들어갔다.
군대 이야기지만 전쟁에 참가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는 주머니에서 파란 리본이 달린 금속 조각을 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놀랍게도 진짜 같았다.
“내가 늘 간직하고 다니는 게 하나 더 있어요.
하버드 시절의 기념품이죠.
대학에서 찍은 건데, 볼래요?”
나는 그에게서 사진을 받아들었다.
사진 속에는 운동복을 입은 청년 대여섯 명이 아치 아래에 서 있었고, 뒤로는 중후한 건물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 지금보다 어려 보이는 그가 크리켓 방망이를 들고 서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가 도로 주머니에 사진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오늘은 조금 어려운 말을 하려고 해요.
그래서 당신이 나에 대해서 기억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낯선 사람으로 아는 건 원하지 않거든요.”
그는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도착하고 나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달리는 차들 위로 태양이 끊임없이 아른거렸고 강 너머로는 도시가 하얀 설탕 덩어리처럼 솟아 있었다.
양화대교에서 보는 서울은 언제나 새로웠다.
세상의 모든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한 약속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작은 정원이 딸린 조용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프라이빗 룸 안으로 안내받고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얼마간 이야기를 하다 그는 초조한 듯 물 잔과 나를 번갈아 봤다.
“차에서 언짢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네요.
미안해요, 아까 일은.
무턱대고 이야기를 해서 그만.”
“아뇨, 괜찮아요.”
그의 입술이 조금 달싹거리다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려는 말이 뭔데요?”
문득 그의 얼굴에 당혹스럽고 긴장된 표정이 스쳤다.
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기억나지 않으시겠죠, 칠봉 씨.”
“뭐가요?”
“Never seek to tell thy love-”
그가 그 구절을 읊는 순간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냥 나가 죽어버릴까.
나는 버논을 까페로 불렀다.
다 알고 싶다고 했다.
이제 비밀은 지긋지긋했다.
버논은 까페의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앞에 두고 말했다.
“나는 보도와 잔디밭을 오가며 걷고 있었어요.
잔디밭이 좀 더 좋았죠.
영국에서 산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밑창에 고무가 붙어 있어서 부드러운 땅에 폭폭 박혔거든요.
바람이 불면 허리에 묶은 체크 셔츠가 나부끼고 집 앞마다 걸린 성조기가 펄럭이면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쯧, 쯧, 쯧, 쯧 하는 소리를 냈어요.
제가 지나온 잔디밭 중 승철이 형 집안의 깃발과 잔디밭이 제일 컸어요.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였고 막 열여덟이 됐죠.
보스턴의 남자애 중에 가장 인기가 많았어요.
라이딩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새까만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어요.
얌전한 폭주족이었죠.
형의 집에서는 온종일 전화벨이 울렸어요.
한번만 데이트를 하고 싶어 용기를 낸 소녀들이 그만큼이었어요.
‘단 한번이라도’ 형을 차지하는 게 목표였죠.
그날 아침 나는 형의 집 맞은편에 있었어요.
농구공을 튀기면서 걷고 있었죠.
칸예의 새 노래를 들으면서요.
형의 바이크가 길모퉁이에 서 있고 처음 보는 여자가 형과 함께 있는 게 보였어요.
형은 그 여자한테 푹 빠져 있었어요.
내가 아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형이 슬쩍 웃으며 나를 불렀죠.
‘버논아, 이리 와.’
형이 나에게 얘기를 하는 게 좋았어요.
형은 우리 가운데 선망의 대상이었거든요.
형은 나에게 농구하러 가냐고 물었어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형은 오늘 못 간다고 전해 달랬어요.
형이 말하는 동안 곁의 여자가 형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모든 남자는 그런 눈길을 갈망할 거예요.
형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눈이더라고요.
난 그 여자를 탐냈어요.
그 여자의 이름은 김칠봉이었죠.
그 다음해에 형은 결혼한다고 했어요.
나는 당연히, 당신일 줄 알았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듣도 보도 못한 여자였죠.
형은 호텔 한 층을 통째로 빌렸어요.
결혼식 전 주에는 그녀의 집 전체에 장미꽃 냄새가 돌 만큼 그녀에게 장미꽃을 가져다줬고요.
결혼식 전날에는 35만 달러짜리 진주목걸이를 선물했어요.
결혼식은 화려했어요.
형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아시죠.
나는 형의 곁에서 형을 말렸는데 형은 듣질 않았어요.
그래도 신랑 측 들러리라 피로연이 시작되기 삼십 분 전에 형을 찾아갔어요.
형은 샴페인과 약에 취해서 정신없이 퍼부었어요.
폰을 흔들면서 형은 맘이 변했다고 소리질렀죠.
결혼을 취소할 거라고요.
나는 욕조에 형을 집어넣고 찬물로 씻겼어요.
형은 욕조 안에서도 폰을 놓지 않았죠.
전원이 완전히 나가는 걸 보고서 손에서 놓았어요.
형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방문을 잠그고 형의 이마에 얼음을 얹어 주고 다시 옷을 입혔어요.
다행히 시간에 맞춰 형은 나갔고 남태평양으로 한 주간 신혼여행을 다녀왔어요.
둘이 돌아온 뒤에 형은 아내에게 집착했어요.
형수가 잠깐이라도 집을 비우면 사방을 불안하게 둘러보며 넋이 나간 것처럼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그러고 있었어요.
형수가 일 때문에 프랑스에서 머물렀고, 형은 프랑스와 한국을 오갔어요.
집을 산 건 그때쯤일 거예요.
형은 형수를 사랑했어요. 어느 한 쪽이 바람피운다는 건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요.
어쩌면 형수에 당신을 대입시켰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확실한 건 형수가 받았던 사랑은 당신이 받아야 할 사랑이었어요.
어느 날 당신이 그 집에 이사 오고 나서, 형은 내게 말했죠.
이사 온 사람이 당신인 것 같다고.
자기가 아는 김칠봉인 것 같다고요.
기억나요?
성수 씨와 함께 했던 저녁, 거기서 당신을 보고 형은 아내와 이혼하겠다고 했어요.
형수는 놀랐죠. 여태 그런 기색이 없었으니까요.
형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당신을 깊게 사랑했나 봐요.
당신이 다시 받아줄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버논이 이야기를 다 끝냈을 때 우리는 그의 마이바흐를 타고 서강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무더운 해는 벌써 영화배우들이 사는 고층 아파트 뒤로 넘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닫힌 차창 안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내가 말문을 열었다.
“엄청난 우연이네요.”
“우연이 아니에요.
형은 당신을 추적하고 있었어요.
그는 증권사의 꽤 많은 지분을 가진 주주죠.
당신의 직장을 알아낸 건 일도 아니고요.
여기까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은 형이 매수한 중개업자가 소개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 6월의 밤에 승철이 바라보던 것은 별 뿐만이 아니었구나.
그를 둘러싸고 있던 장막이 걷히고 그의 살아있는 모습이 내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버논은 계속 말했다.
“그는 당신이 선택하길 원해요. 자기에게 다시 돌아올지, 아니면 아예 헤어질지를.”
그 요청은 너무나 소박한 것이어서 나는 전율이 일었다.
그때의 우리가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희박한 가능성을 위해 그는 안정된 가정을 버렸다.
겨우 나를 위해 이 모든 걸 다 계획했던 것이다.
언젠가 한번 내가 그의 파티에 참석하고, 그와 몇 번 대화를 나누고, 내가 그를 알아본 뒤,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지 말지를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두려워해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고, 칠봉 씨가 불쾌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죠.”
날이 어두워졌다.
버논은 나와 공원을 걸었다.
사람은 없었고, 미지근한 밤공기와 우리만 이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버논이 내 어깨를 잡고 끌어당긴 채, 중얼거렸다.
“씨발, 형 따위 알 게 뭐예요. 내가 칠봉 씨를 좋아하는데.”
자신감 넘치는 그다운 고백이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어두운 나무들 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공원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아직 승철에 대한 내 마음을 몰랐다.
그가 그럴 만큼, 나를 좋아한 만큼 나도 그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 있는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허리를 감아오는 그의 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새벽 두 시 임에도 불구하고 승철의 저택은 불이 켜져 있었다.
또다른 파티인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승철은 장미 울 너머의 정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은 채였다.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혼란스런 감정들이 물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