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밟으려다가 검은 유리조각을 밟는다면
허탈함을 동반하는 고통은 알고 밟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진 않아.
너 없이는 호흡이 가파지는 내 곁을
제발 떠나지만 말아.
모든 게 고장 난 시계태엽과도 닮았다. 삐뚤어진 액자와 더디게 움직이는 텔레비전, 그리고 울타리 속 미소밖에 모르는 인형들. 또한 내 몸 역시 삐그덕 거렸다.
삶을 잃어버린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결코 많지 못했다. 아예 없다고 하기엔 모순된 울음이 차올라 차마 거짓을 논하지 못하였다. 비참해진 기분에 차오르는 눈물을 대신해 머금던 침을 삼켜냈다. 공허하게 초점을 잃어가면 흐릿하게 너의 실루엣이 비친다. 이렇게라도 너를 보니 안심이 된다.
이제는 익숙하고도 당연한 선들이 아지랑이가 춤을 추듯이 흐릿해져 간다. 잡으려 두 손을 뻗어 보면 하나의 웃음을 띠고서 달아난다.
괴롭다.
단순한 외로움이라 치부했더니 괴로워졌다.
애써 부정해 봐도 이곳은 나 혼자뿐이기에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너를 보내고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속이 아렸다. 저 깊숙이 숨어있는 모든 장기와 내벽이 쓰라렸다. 금방이라도 토해낼 것처럼 나의 모든 게 따갑고 쓰렸다.
발에 체이는 거라곤 빈 맥주 캔뿐이다. 술을 좋아하지도, 잘 먹지도 못하는 나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알코올이 될 줄이라 감히 상상이나 해봤을까. 어째서 나는, 며칠 동안 마셔대던 많은 양의 맥주보다 너의 손길 한 번이 더 황홀할까. 매일 날 향해 오던 하얀 손길이면 나는 충분할 텐데. 혹여 나의 바람이 컸다면 난 너의 체취만으로도 벅차오를 텐데.
잠시 너를 생각한다고 했던 게 아침이었는데 정신없이 너를 추억하다 보니 어느덧 어둠이 짙어졌다. 맞아, 너는 이런 어둠을 무서워했는데. 그래서 늘 현관 문 앞까지 바래다줬는데. 내게는 이 세상 모든 게 너와 연관된다. 다시 한번 네 얼굴을 떠올리려 눈을 감았다.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은 창밖의 빗소리가 도움을 주었다.
이 비는 소나기구나. 아 너랑 처음 싸웠던 그날도 소나기가 왔었는데. 너를 보고 싶어 달려가던 중 소나기가 몰아쳤었다. 그렇게 너는 홀딱 젖은 나를 보며 심통 맞은 표정으로 울어주었다.
맥없이 일어나 옷을 가다듬고 두터운 점퍼를 걸쳤다. 신발을 구겨 신고 우산을 고르려 했으나 우산이 없었다. 너와 함께 우산을 사는 족족, 너에게 주는 버릇 덕에 내게는 우산이 없다. 핸드폰만 주머니에 욱여넣고선 후드를 썼다.
집을 나서는 와중에도 하나하나 너로 곱씹었다.
이 문에 기대어 수줍게 입을 맞추던 날, 저 허름한 가로등 아래서 나에게 첫 키스를 주었던 날, 하루 종일 자신을 놀린다며 삐져서는 모르는 동네로 가려던 저 사거리, 학창시절 너와 처음 만났던 저 버스 정류장.
수없이 그려지는 동영상들은 과부하에 걸린 마냥 모든 사람들이 너와 나로 보였다. 추적추적 내려오는 빗방울 덕에 따뜻한 눈물을 느낄 새도 없이 차가워졌다.
" 여주야. "
" 미안, 정말 미안해. "
" 오늘 너 안 보면
진짜 미칠 것만 같아서 멋대로 와버렸어. "
" 나와야 된다는 부담 가질 필요 없어. "
" 난 아직도 제멋대로니깐
너도 제멋대로 해야지 공평하잖아. "
아른거렸다. 먹은 것 하나 없이 무작정 걸어온 탓에 어지러웠다. 너희 집 앞에 서있을 뿐인데 내 코는 너의 향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더 휘청였다. 비를 맞고 추위에 떨고 얼굴에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너에게 멋있는 모습만 보여준다던 말들이 무색할 모습이었다. 참 지질했다. 오직 내 감정이 앞서서 너를 배려하지도 않는 모습이 참 구질구질했다. 너를 잃는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나는 어리석었다.
그렇게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무거운 몸을 돌리려 했다. 빛없는 발끝만 바라보던 내 눈이 아려올 만큼 선명한 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두 개의 발 앞으로 내어진 하나의 발. 익숙한 작은 발이었다.
" 음성 메시지만 남기고 가려 했어? "
"아,"
" 그렇게 기다리게 해놓고 겨우 찾아와서 하는 말이
고작 미안하단 소리야? "
" 저 그게, "
" 너 왜 그렇게 못됐니.
평생 안 울리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멋대로 어기고,
왜 마음 약해지게 비는 멋대로 맞고 와? "
" 여주야. "
" 넌 항상 그런 식이잖아! "
" 나는 메말라 죽어가듯이 니가 보고 싶었어.
여주야. "
너의 피부가 푸석한 나의 피부로 맞닿는 순간에는
전기가 일어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더라.
무엇이든 좋으니, 내게서 도망가지만 말아.
나를 구박해도 좋으니, 제발 내 손을 뿌리치지만 말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