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cessary things when U LUV ME
written SOW.
또 우실 겁니까? 아, 아니요!
세상이 아무리 평등해졌다고 한들 보이지 않는 계층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현재 보이지 않는 계층의 밑바닥에서 겨우 벗어난 일개 회사원이고
나를 혼내는 이 분은 보이지 않는 계층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계신 민전무님 되시겠다. 전무님이나 되시는 분이 왜 이런 프로젝트를 맡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이 프로젝트의 주역을 맡고 있는 내가 매일 혼나고 울고 일하고를 반복하다보니 전무님도 내가 우는 것에 익숙해지신 듯 했다.
근데 분명히 내가 전무님 앞에서 울진 않았단 말이지. 항상 비상계단에서 혼자 훌쩍이고 있으면 어디선가 풍기는 차가운 오오라와 함께 민전무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오늘까지 들키면 벌써 6번째다.
"근데요, 전무님."
"왜요."
"제가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죠 ‥."
"보고서만 올리고 가신다면야."
"제가 보고서를 오늘 새벽까지!"
"제가 새벽에 깨 있을거란 보장있습니까?"
맨날 새벽에 메일 보내면 전화로 뭐라고 하시면서 ‥. 마음의 입은 제멋대로 움직이긴 했으나 애써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원래 사회생활은 맞는게 틀린거고 틀린게 맞는거라고 했어. 그래, 참자 참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민전무님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말로 좀 해주시지.
저는 바디랭귀지를 못해서 언어를 배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쓸데없이 언어만 판 이과생이었어요!
"가라고요."
"헐! 정말요?"
"대신 할 일 다 하면 저한테 전화 하세요."
"네? 왜요?"
"보고서만 낸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할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의 말에 짧게 탄식을 내뱉곤 슬쩍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 안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부랴부랴 짐을 싸곤 민전무님께 인사를 했다.
제가 9시까지 꼭 연락 드릴게요! 그럼 전 이만!
뭐 사실 나랑 전무님 빼곤 거의 다 퇴근한 시간이니 내가 퇴근한다고 해서 전무님이 뭐라고 터치할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전무님은 오늘도
12시는 되서야 퇴근하실텐데 프로젝트의 주요인물인 내가 빠지게 되면 전무님이 받는 부담이 커질거다. 죄송하긴 하지만 난 오늘 꼭 해야할 일이 있었다.
바로 나의 아들! 태현이를 데리러 가는 것.
"엄마, 왔어?"
"‥ 어, 아들! 엄마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괜찮아. 빨리 집에 가자. 나 터닝메카드 녹화 해 둔거 봐야해."
"아들, 근데 지금 가서 터닝메카드 보면 10시는 넘어야 잘 텐데? 너무 늦게 자면 안돼!"
"엄마가 늦게 와서 그런거잖아."
"헿, 사랑해 태현아"
종일반에 맡겨져 있는 태현이는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아이였다. 내가 아이가 있다고 하면 조금 놀라기야 할텐데, 나는 당당한 싱글맘이다!
고작 22살에 결혼도 안 한 채로 헤어진 남자친구의 애를 가져버려 많이 힘들기야 힘들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워낙 나를 잘 챙겨준 덕에
외롭진 않았던 것 같다. 근데 또 태현이는 다르겠지. 아빠가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지는 나도 겪어봐서 알기 때문에 태현이에겐 항상 미안한 마음 뿐이다.
아빠가 없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태현이 성격은 아주 민전무님 뺨치게 차가웠다. 어째 고작 5살인 아가가
저렇게 말도 또랑또랑하게 잘하고 논리적인지. 내가 태현이를 혼낼 일도 별로 없지만 혼내더라도 말려버리기 일쑤였다.
"엄마."
"응?"
"여기."
고사리같은 작은 손으로 내게 종이를 내민 태현이를 북북 쓰다듬곤 종이를 펼쳤다. 헐, 학예회? 우리 아들이 학예회를 한다고?
아들, 아들은 무슨 역할이야? 나의 물음에 곰곰히 생각하던 태현이는 기억이 안난 다는 말과 함께 터닝메카드에 다시 빠져들었다.
연극의 제목은 복숭아 동자였다. 우리 아들은 동자님이겠지? 잘생기기도 이렇게 잘생겼는데 우리 태현이가 복숭아 동자를 안하면
대체 누가 복숭아 동자를 하겠어!
"아들, 아들이 복숭아 동자 맞지? 우리 태현이 부끄러워서 말 못하는 거구나?"
"엄마, 나 기억났어."
"응?"
"나, 복숭아야."
"‥어?"
"나 복숭아라고."
일단 선생님께 전화라도 드려봐야 ‥ 아! 전화! 그제야 생각난 민전무님과 약속에 부랴부랴 전화를 찾았다. 태현이는 내가 선생님께 전화하려는 줄 알았는지
냉큼 내 전화를 가져갔다. 엄마, 선생님한테 전화하려고 그러지? 내가 하고 싶다고 했어.
"아니, 아들! 엄마가 일로 중요한 전화를 해야해."
"거짓말."
"엄마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
"나 퍼즐 1000피스 사준다고 해놓고 안 사줬잖아."
"아니, 그건 네 수준에 안 맞는다니까!"
난 5살 때 퍼즐은 무슨 장난감 가지고 놀기 바빴는데 우리 아들은 내가 평생 맞춰보지도 못한 1000피스 퍼즐을 사달란다.
도전 정신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정말 머리가 너무 좋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5살 아이에게 1000피스 짜리 퍼즐은 너무 과분했다.
"태현아, 이제 잘까?"
"선생님한테 전화하면 안돼."
"응응, 알았어. 우리 아들 치카포카하고 코 자자."
말을 다다다 쏟아부은 덕택인지 태현이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고, 애썼네 우리 아들. 통통한 엉덩이를 두어번 두들긴 후 화장실로 들여보냈다.
우리 태현이는 습득력도 빨라서 혼자 이도 잘 닦는 씩씩한 아들이다. 가끔은 너무 씩씩해서 탈이지만.
태현이가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핸드폰을 찾았지만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할 자리에 핸드폰이 없었다. 뭐야, 어디갔지?
"엄마! 이 사람 누구야? 민전무?"
"뭐? 아니, 아들! 그거 받으면 안돼! 받지마!"
"이미 받았는데?"
우리 아들은 천재다 못해 나랑 전생에 원수를 진 것일게 분명하다. 전무님이 태현이 목소리 듣고 뭐라고 생각하실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전화를 넘겨받았다. 여, 여보세요?
-김여주씨, 왜 전화 안해요.
"아, 제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민전무?
"네?"
-저 민전무라고 저장해 놨습니까?
"네? 아, 예."
나의 명쾌한 대답에도 한동안 답이 없어 나는 전화가 끊어진 줄 알았다. 뭐야, 왜 말이 없어?
-왜 민전무라고 해놨어요.
"? 그럼 뭐라고 저장해놔요."
진심이었다. 민전무님을 민전무라고 저장해놓지 그럼 뭐라고 ‥ 아! 님을 안 붙였구나!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죄송하다는 말을 남발하자
민전무는, 아니 민윤기는 그제야 딱딱한 목소리를 풀며 말했다. 뭐가 죄송해요.
"그, 민전무님이라고 안 저장해서 화내시는거 아니었어요?"
-화 내는 것처럼 들렸어요?
아, 아닌가봐! 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어느 새 양치질을 끝낸 태현이가 손에 힘이 풀려 거의 내 손에 걸쳐져 있는 핸드폰을 가져간 뒤
전무님을 향해 말했다. 우리 엄마 저랑 같이 코 자야하니까 이만 전화 끊을게요.
"태.태현아!"
"엄마, 이 아저씨랑 무슨 사이야?"
"직장상사야! 엄마보다 윗사람. 태현아 그렇게 끊으면, 엄마는 ‥."
차마 짤린다는 말은 못하고 미적거리자 태현이가 내 손을 잡으며 입을 앙 다물었다. 난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면 괜찮아.
근데 나 보다 이 남자랑 더 친해지면 안돼.
"아니, 아들. 엄마는 전무님하고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고! 나는 우리 아들 밖에 없어요! 우리 태현이 짱!"
"빨리 자자. 나 잠와."
"그, 그래."
* * *
윤기는 방금 제 귓가에 들린 낭랑한 목소리가 끊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 엄마?
김여주가 애엄마라고? 태풍이 휩쓸고 간 듯한 후폭풍에 윤기가 흔들거리는 제 머리를 움켜잡았다. 근데 김여주 나보다 겨우 2살 어리지 않나.
27살 김여주와 29살 아홉수인 민윤기.
윤기는 여주에게 남편이 있다는 상상을 하자마자 움켜잡았던 머리를 뽑았다. 대학시절 잔뜩 탈색과 염색을 반복한 탓에 개털이 된 머리는
뽑는 족족 뽑아져나왔다. 나보다 겨우 2살 어린 사람이 애가 있다고? 아, 그래. 있을 수 있지. 근데 애가 말을 되게 잘하던데.
아니야, 원래 요즘 애들은 빨리 큰다고 했으니까 김여주 애도 그런 케이스일거야.
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해봐도 윤기의 머리에는 여주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언,언제 결혼한거지.
여주가 부랴부랴 보낸 메일을 읽지도 않고 윤기는 메일 옆에 자리잡은 여주의 이름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만사 모든 것이 귀찮아 하며, 남 일엔 일 관련 빼곤 거의 관심없어하는 윤기가 이렇게 여주의 아이의 존재에 타격을 받은 이유는 이것이었다.
윤기는 장장 2년동안 여주를 좋아하고 있었다. 여주가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티는 전혀 못 냈지만 제 나름대로 열심히
들이대는 중이었단 말이다.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고. 흑심이 좀 넘쳐날 시기엔 일부러 야근까지 시켜 얼굴을 마주했었는데.
"애가 있다니 ‥."
* * *
"오늘은 빨리 오셨네요."
일찍 출근해서 일이라도 하며 민전무님을 피하려고했는데, 이렇게 엘레베이터에서 딱 마주칠 건 또 뭐야.
한 명이 알면 소문이 퍼지는 건 삽시간이라는데, 이제 내 회사생활은 끝이야. 절망스러움에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말을 아꼈다.
어차피 소문 날 거, 그냥 조용히 지나가자 ‥.
"그, 어제는!"
조용히 지나가긴 개뿔. 일단 빨리 민전무님 입단속(?)을 시켜야 했다. 소문이 퍼지면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팀원들이나 프로젝트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뭐 일이 생기면 애를 혼자 키우니까 저러는거겠지라며 말 나오는 건 지겹도록 겪어서 더 이상은 겪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후다닥 나를 쳐다보는 전무님에 좀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 어제 태현이가 너무 갑작스럽게 ‥ 아, 그."
"이름이 태현입니까? 아들?"
"아, 네!"
"올해 몇 살?"
"어, 5살이요."
생각보다 많이 물어보시네, 평소 민전무님 스타일은 내가 횡설수설 할 때 이미 "제가 바빠서, 나중에 얘기하죠. 중요한 얘기 아니면 말이에요." 라며
딱 잘랐을게 뻔한데. 뭐지, 이 남자?
"그, 남편은 ‥ 같은 회사 다닙니까? 언제 결혼 했습니까?"
"네,네? 아, 같은 회사 아니구요. 결혼은 ‥."
순간 고민했다. 이걸 말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비밀을 덮고자하며 더 큰 비밀을 말하는게 아닌가 싶어서 눈만 굴리고 있으니 전무님이
원래 가야하는 15층을 다시 눌러 없앤 후 29층인 맨 꼭대기를 눌렀다. 뭐, 뭐야! 왜 이러세여!
"안했어요, 결혼."
"‥."
전무님의 얼굴이 얼빵해보였다고 하면 뭔가 혼날 것 같지만 사실이었다. 지금 전무님의 얼굴이 정말, 매우 넋이 나간 사람같았다.
민전무는 어느 새 다다른 29층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 손목을 잡고 나왔다. 뭐야, 나 지금 심히 당황스러운데.
"그러니까, 여주씨는 결혼은 안했고."
"네, 애는 있어요. 이름은 김태현."
"아 ‥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미안하실 것 까지야. 저야말로 어제 일찍 먼저 가서 죄송해요. 태현이 데리러 가야해서요. 아마 매주 수요일은 일찍
들어가야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내 말에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은 민전무는 한동안 내 눈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일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어서 순간 두근거렸지만
그건 그냥 심장이 덜커덕 거리는 것과 흡사했다. 왜, 원래 다정하던 사람이 차가워지면 심장이 덜커덕하지 않는가.
물론 지금은 반대지만, 민전무가 꽤나 나를 다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몰래 쓸어내리며 엘레베이터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음,갈까요? 말씀 다 하셨어요?
"‥."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 머쓱하게 한 번 웃고는 12층에서부터 올라오는 숫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으, 숨막혀.
아, 가장 중요한 얘기를 안 했잖아!
"저기, 전무님."
"네."
"그, 저랑 태현이 얘기 ‥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프로젝트나 팀원들한테도 영향을 좀 끼칠 것 같아서요. 폐 끼치긴 싫어요."
"‥당연히 비밀이죠."
* * *
어, 일단 내가 그와 비밀같지않은 비밀을 공유한 뒤로 우리의 관계는 꽤나 달라졌다. 뭐랄까, 민전무님이 아닌 사람과 매일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회식자리에 안 나가시는 분인데, 요즘은 꼬박꼬박 나가시질 않나. 2차를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너무 늦었으니까, 다들 해산하죠."
하며 맥을 끊는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가려는 나를 꼭 뒤에서 붙잡곤 "내 차 타요. 태현이 유치원까지 데려다 줄게요." 하며 친절을 베푸시는 등
전 과는 너무 다른게 사실이었다.
"저, 전무님."
"네."
"여기 디자인 말이에요, 좀 다르게 바꿔볼까요? 사각형보단 원형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 괜찮네요. 파일에 추가해서 보내주세요."
"근데요, 전무님."
전무님과 함께 일하는 팀은 좋은 환경에서 일한다는게 사실인지, 전무님은 전무님만의 방까지 있었다. 물론 팀원들과 같은 방안의 또 다른 방이었지만
내가 여기서 태현이 얘기를 한다고 한들 밖에 있는 팀원들이 들을 수 없다는 소리다.
"저한테 ‥ 잘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보이는 호의가 요즘은 간단한 호의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애까지 있는 여자랑
엮여봤자 안 좋은 건 앞날이 창창한 전무님뿐이니까, 여기서 선을 긋는게 맞는다고 보았다.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막 회식 때도 그렇고 저 기다‥리신거 맞죠? 기다려서 같이 태현이 유치원까지 안 가주셔도 돼요.
저랑 엮여봤자 피해 받는 건 전무님이니까요."
좋았어! 예의있게 잘 말한 것 같아! 역시 똑똑한 아들을 둔 탓이 큰 것 같구만. 예의바른 우리 아들을 떠올리니 아주 술술 잘 나오네!
전무님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잘 말한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덤덤하게 서 있자 내 앞으로 다가온 그의 신발이 보였다.
"회식 때 김여주씨 데려다주려고 기다린건, 맞고. 나 김여주씨 때문에 피해가는 건 틀렸고."
"네?"
"저 김여주씨 좋아해요."
"네?"
앞의 네?와 뒤의 네?는 억양자체가 다르다. 아니, 지금 뭐라고! 내가 눈을 크게 뜨며 꿈뻑거리자 전무님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다시 내 눈을 마주했다. 솔직히, 처음엔 여주씨 미혼인줄 알았고, 남자친구도 없는 것 같길래 그냥 ‥ 혼자 좋아했었는데.
남편, 없다면서요. 남자친구도 ‥ 없죠?
"아, 네. 맞긴 맞는데."
"그럼 그 남자친구, 나하면 안 되나."
"아니, 전무님. 지금 진심이세요?"
"네, 진심인데요."
"아니, 저 태현이도 있고!"
"근데 남편은 없다면서."
"아, 그건 맞는데!"
"그럼 됐네."
"아니, 이렇게 갑작스럽게요?"
"난 이제 3년째에요. 왜요, 여주씨 나 싫어요? 근데 싫어도 계속 들이댈건데, 괜찮아요?"
"저, 싫진 않은데요!"
"그럼 나 좋아요?"
세상에. 지져스. 이 남자 세상 수줍다. 근데 왜! 이런 모습이 귀여워보이는거냐고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저 모습마저 귀여워보이면 ‥
게임 끝난거잖아. 정말 인정하기 싫었던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꽤 마음이 편해졌다. 뭉툭한 정장 끝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게 나가면 팀원들이 의심하진 않을까! 아, 이상한 쪽 말고 ‥ 전무님이 나 혼내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해. 실체는 이런데, 무섭다고 알려져 있으니 원.
내가 그 소문 다 고쳐주고 싶네.
"아, 잠깐만요! 전무님! 여기 회사!"
"근데요, 여주씨. 우리 호칭부터 좀 정리할까요? 여주씨 핸드폰에 나 민전무라고 되어있는거 듣고 나 진짜 실망했어요."
"아, 알겠는데요! 일단 이 팔 좀! 만약에 누구 들어오시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회사에선 전무님, 밖에선 윤기씨, 태현이 앞에선 여보."
"네? 아니 마지막에 무슨 오류가 ‥."
"난 되게 좋은 거 같은데. 태현이가 어렸을 때부터 좀 적응이 돼야 하지 않겠어요?"
원래 민전무님이 이렇게 능글맞은 성격이었나?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통에 말을 잇질 못했다. -사실 답할 가치가 없었다.-
솔직히 전무님이 나 좋,좋아 한다는 것도! 아직 못 믿겠는데. 연애라니, 연애라니. 그 개같은 자식이 마지막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벤츠남이 찾아왔다.
* * *
"태현아, 뭐 갖고 싶어?"
"윤기씨, 그렇게 마구 사주면 안돼요. 그리고 태현이가 가지고 싶은건,"
"나 1000피스 퍼즐이요."
"‥어?"
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곤 쇼핑카트에 몸을 기댔다. 정말 우연스럽게도 장보러 나온 전무님과 만났다. 집이 이 근처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듣긴 했는데, 하필 이 마트로 장보러 나오실게 뭐람. 아, 내가 왜 이렇게 꺼려하냐고? 그, 처음 사귀는 그 날 부터
자꾸 태현이 앞에선 그 오그라드는 호칭을 쓰라길래 되도록이면 태현이랑 있을 땐 마주치지 않는 쪽으로 노력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두 달 사귀었는데 그, 호칭은 너무 빠르지 않나 싶어서. 솔직히 민전무님이 날 좋아해주신다는 거야
당연히 기뻤지만, 믿기지 않는게 사실이었다. 내가 뭐 예쁜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는 태현이까지 있는데.
"근데 전무님, 점심은 드셨어요?"
"‥."
"전무님?"
"지금 태현이 앞인데."
"‥."
내가 애 둘을 키우지. 두 달동안 꽤나 달달하게 연애를 하긴 했지만, 그동안에 내가 전무님에 대해 파악한 것이 몇 개 있는데.
일단 호칭에 집착한다는 거였다. 부끄럽더라도 한 두번 하면 익숙해질 거라면서 자꾸 고집부리는 통에 몇 번 해준 적이 있긴 한데
할 때마다 손이 오그라들어서 ‥. 그리고 대망의 두 번째는, 그는 엄청난 사랑꾼이라는 거다. 차갑게 생긴 외모와 낮은 목소리와
딱딱한 말투만 보면 되게 차가울 것 같은데 의외로 되게 다정하다. 내가 또 차가운 외몬데 다정한 사람이 이상형이지, 음.
"아, 제발요. 나 그거 하면 진짜 손 오그라들어."
"엄마, 지금도 손이 오그라들고 있어."
"태현아 우, 우리 시식하러 갈까?"
오그라드는 내 손을 가리킨 태현이의 손을 맞잡곤 단숨에 시식코너로 뛰어갔다. 아, 예전보다 적응이 되긴 했지만 윤기 씨라는 호칭도
너무 힘들단 말이야. 그리고 너무 능글맞아. 전무님 완전 선수 아니야?
"와, 진짜 너무하네. 카트까지 버려두고 갈 만큼 싫었어요?"
"그러는 전무님도 나한테 여보라고 안 하잖아요!"
"왜요, 듣고 싶어요?"
"아니요. 우리 그만하죠. 전무님 배 안고프세요?"
"배 고프다고 하면 여주 씨가 밥해줍니까?"
"음, 네! 전무님 오므라이스 좋아하세요? 태현이가 오므라이스 해달라고 해서 온 거라."
"좋아하죠."
그래, 선수면 어때. 지금은 우리 집에 오므라이스 먹으러 가는데 뭐.
* * *
"태현이 자는데?"
"와, 윤기 씨 나 많이 편해졌나 봐요. 막 반말도 하고."
"내가 2살이나 많은데, 그냥 놓으면 안 돼요?"
"나 마음의 준비가 아직 ‥ 아! 안지 마요! 나 뱃살 많단 말이에요!"
"별로 없는데? 딱 잡기 좋네."
"와, 수치스럽다 진짜. 빨리 저리 가요."
"근데 진짜 반말 쓰지 마요? 나 이젠 너무 불편해."
"지금도 반말하시네요."
그 새 내가 편해졌는지 툭하면 여주야라던가 반말을 쓴다던가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는 통에 두근두근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
답지 않게 왜 손이 커선! 예전부터 내가 반하는 포인트는 딱 세 개였는데. 하나는 차가운 외몬데 다정하던가, 두 번째는 손이 큰 거.
그리고 세 번째는 ‥.
"아이쿠, 우리 태현이 일어났어?"
"아저씨, 우리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가요."
"‥진짜?"
"네."
"태현이, 아저씨가 책 읽어줄까?"
내 아이에게 잘 해줄 것. 세 번째는 사실 요새 민윤기를 보며 내가 추가한 것이다. 태현이를 아주 제 아들처럼 대하는데 그게 그렇게 설렐 수가 없다.
태현이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 왕자를 꺼낸 그가 낮은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나갔다. 아, 진짜 평화롭다.
태현이를 혼자 키우면서 이렇게까지 편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평화로웠다. 점심을 준비하는 나, 태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남편.
너무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에 나조차도 소름이 돋았다. 사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나 진짜 양심이 없나 봐.
전무님이 나한테 많이 애정을 주긴 했나 보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내가 자신감이 생긴 거 보면.
"태현아, 전무님. 밥 먹어요."
"엄마, 나 케찹도!"
"아저씨가 가져다 줄게. 여주씨 앉아요. 물 떠다줄까요?"
"‥그냥 나한테 반말 할래요?"
내가 자꾸 반말을 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너무 가까워지는게 두려워서. 지금도 충분히 가깝지만 뭔가 반말을 하면 자꾸 전 남자친구가 생각 날 것 같았다.
근데 생각보다 민윤기가 하는 반말은 ‥ 새로웠다. 연상이라서 그런가.
내 물음에 멈칫하던 그는 입동굴까지 내보이며 웃다가 내 머리를 헝클이며 냉장고로 향했다. 여주야, 케찹이 두번째 칸에 있었나?
어떡하지, 나 이 남자에게 단단히 코 꿰인 것 같다.
* * *
"오구 우리 태현이, 잘 있었어?"
"야, 차 끊겼다고 무작정 우리집으로 오면 어떡해."
"원래는 사촌 형 집에 가려고했는데, 태현이를 오랫동안 못 봤더라고 내가. 뭐, 친구를 이 밤에 쫓아내려고?"
"응. 빨리 꺼져줄래."
"아, 애엄마가 이렇게 말이 험해서 되겠나. 그치 태현아!"
박지민. 17살 때 짝궁으로 만나 같은 대학까지 진학하며 둘도 없는 친구사이가 되었지만 내가 태현이를 갖게 된 후 조금 멀리했더니
이렇게 태현이 핑계를 대며 가끔씩 내 안부를 확인하려고 온다. 속이 깊긴 하지만 가끔 생각이 없다. 아니, 우리 태현이 자야하는데
이 시간에 오면 태현이가 못 자잖아!
"너 오면 태현이가 너랑 논다고 안 자려고 한단 말이야. 빨리 집에 가. 택시비 줘?"
"됐어. 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 태현아 형 간다?"
"양심 없네, 형이라니."
"내가 이 나이에 아저씨 듣긴 아까운 외모잖아."
"형! 왜 벌써가. 나랑 퍼즐 맞추자."
"미안, 형은 그런거 못해. 엄마한테 해달라고 해."
"엄마도 못해!"
윽, 마음에 스크래치. 상처난 가슴을 부여잡곤 태현이를 품에 안았다. 태현아, 엄마는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거야.
내 말을 듣곤 비웃은 박지민이 현관문을 열곤 나가려는 찰나였다.
"‥."
"어, 전무님!"
"전무님? 야, 너 회사사람도 집에 들이냐?"
"야, 그게 아니라!"
"여주야, 누구야."
"윤기, 아, 얘는 박지민이구요! 저번에 말했죠? 나랑 10년지기 친구! 야, 이 사람은 ‥ 그!"
"애인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순간 박지민의 낯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 진작에 말할 것을. 아마 박지민은 속으로 나를 향한 배신감에 들끓고 있을 것이 뻔했다.
왜 말 안 했냐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데, 하. 오늘은 양쪽으로 까이게 생겼다.
"지민씨는 여주집에 잘 오시나봅니다?"
"아, 아니요! 오늘은 지나가다가 잠깐 들린거,"
"그러니까, 평소에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저, 저는! 이미 좋아하는 여자도 있고요! 김여주에게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어요!"
"‥그래요?"
박지민의 진심어린 외침에 그제야 표정을 푼 민윤기는 나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빨리 보내. 할 얘기 있으니까.
"야, 잘가라! 나중에 봐!"
"어? 어! 전무님, 아니 뭐라고 불러야할지."
"민윤기 입니다."
"윤기씨도 나중에 봬요! 태현이 빠이빠이!"
"형 잘가!"
쾅. 닫힌 현관문 소리를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태현이는 고작 5살인 주제에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벌써 제 방에 들어가곤 없었다.
입술을 앙 다물며 '저 반성하고 있어요.'라는 눈빛으로 민윤기를 올려다 보자 이미 내 앞에 와 있는 민윤기가 내 양 볼을 콱 잡곤 흔들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집에 남자 들이면 돼, 안돼?"
"안돼여 ‥."
"나 진짜 화날 뻔 했어. 집에서 남자가 나와서."
"진짜 쟤랑은 완벽한 친구에요. 진짜 믿어줘요."
"‥알겠어."
"근데, 지민씨 나이가 어떻게 돼?"
"나랑 동갑!"
"그럼 스물 일곱이겠네."
"네!"
"근데 왜 태현이가 지민씨한텐 형이라고 해?"
턱, 말문이 막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나도 20살 차이 나는 사촌 언니한테 언니라고 부르긴 하지만
이건 좀 다른 케이스지 않은가. 눈만 굴리며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자 그의 한숨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렇게 아저씨 같나."
"아니에요! 완전 젊어보이는데?"
"‥그래?"
"응!"
"근데 넌 왜 나한테 오빠라고 안해."
"내가 왜 이 말 안나오나 했다 진짜. 지치지도 않아요?"
"나 아홉수 되기 전에 들을 순 있어? 서른 살되서 그 소리 듣긴 너무 늦는데."
"아, 아! 알겠어요."
태현이 나이든 버전을 키우는 것 같다. 태현이랑 피부 하얀 것도 똑같아, 단호한 성격 - 물론 나한테는 좀 덜하다.- 도 똑같아, 논리적인 것도 똑같아.
게다가 가끔씩 애같이 구는 면이 있다니까.
"근데 천천히 할게요. 빨리 온 용건이나 말해요."
"아,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야할거 같아."
"네? 뜬금없이 와서 이게 무슨 소리에요!"
"지금 우리집, 문짝이 뜯어졌어."
"와, 어떻게 하면 문짝이 뜯어져요? 완전 힘쎄네 진짜."
"‥ 내가 아니라, 우리 형이."
"위로 해 줄까요?"
"괜찮아."
갑자기 그의 얼굴이 짠해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등을 토닥이며 소파에 앉혔다. 그래서, 할 얘기는 끝?
"응. 근데 나 설마, 소파에서 자?"
"그럼 어디서 자요."
"침대."
"우리집에 침대 딱 두 갠데, 내 침대랑 태현이 침대."
"그 중에 하나에서 잘 건데."
"태현이 침대 되게 좁아요."
"아니, 네 침대."
"‥안녕히 가세요."
"진짜 너무한다. 나 문짝 뜯어진 집에서 자라고?"
"아, 진짜 왜 이렇게 능글맞아! 속이 울렁거려 죽겠네."
태현이는 자는 것 같고, 자꾸 이렇게 나오니까. 나름대로의 필살기를 쓰는 수 밖에 없겠구만.
실실 웃고 있는 민윤기의 얼굴을 잡곤 짧게 입을 맞췄다. 자, 됐죠? 이거 뇌물. 여기서 자요, 곱게?
"아, 곱게 자는 건 못하겠는데. 저 뇌물 안 받는 사람이라서. 뇌물 다시 돌려드리면 됩니까?"
"네? 아니ㅇ ‥!"
아, 뇌물이 5배가 되어서 돌아왔다. 처음엔 얕게 맞추는 듯 싶더니 이내 혀까지 들어왔다. 민전무님 선수설 맞는거 같다니까.
내가 작게 숨을 헐떡이니 입을 잠시 떼었는데, 어느 새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저기요, 민전무님. 여기 우리 아들도 같이산다니까요.
"아, 진짜. 태현이 때문에 뭘 할 수가 없네."
"와, 민전무님 완전 변태네 변태야."
"태현이는 항상 예쁜데, 이럴 땐 태현이 방에 방음설치 해두고 싶어. 방이 좁기야 하겠지만."
"‥나 진짜 잘 거예요. 건들지 말아요 오빠."
"? 아니, 여주야. 잠깐만! 아 문 잠궜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하여간 진짜 능글맞아.
.
.
.
.
.
.
아, 오늘도 정말 즐거운 글이었어요 ^^ 나의 로망인 쟈갑지만 다정한 윤기ㅠㅠㅠ 윤기 근데 진짜 나중에 결혼하면 능글능글할 거 같지 않아여?
난 능글맞은 윤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근데 넘나 민보스님 같잖아..? 저한테 윤기는 이런 이미진가봐요 맨날 쓰면 똑같은 사람같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