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원래 허구가 더 무서운 법이야.
결국 너도 호기심에 만들어 낸 거잖아.
매일 밤마다 나는 깎이지 않은 연필을 쥐고 잠들었다. 시초는 꿈에서도 그림을 그리자는 큰 포부가 말썽이었다. 나 역시 남들과 똑같은 학생이었으니깐, 나는 정말 입시를 준비하던 한 학생에 불과했다.
그렇게 연필을 쥐고선 잠드는 게 일상이 되었을 즈음, 내게는 이상하고도 미묘한 꿈이 반복되었다. 늘 빈 방에 놓인 이젤과 티끌 없이 맑은 캔버스, 그리고 나는 매번 그 이젤 앞에 앉게 된다. 딱히 누군가에게 홀린다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앉게 되었다.
앉은 후에는 군말 없이 그림을 그려냈다. 인물화였다. 하필 수많은 대상 중, 나는 정체 모를 한 남성의 초상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 남성이 무어라고 선을 이어갈 때마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틈틈이 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칼은 바람에 일렁일 듯했고 그의 눈은 매섭지만은 않았다. 그의 눈은 애써 나른함을 덮으려는 천막과도 같았기에 묘하게 목울대가 울렸다.
난 정말 그가 누군지 모른다. 그의 코며 입이며 얼굴형이며 또 어깨며 장소며, 그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혹은 이 세상 사람인지 아닌지 또한 아는 게 없다. 그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셀 수 없는 밤들을 보내야만 했다.
또한 내게는 깨어난 직후를 제외하곤 그저 명확함 없는 잔상뿐인 하루였다. 매번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 노트와 펜은 책상에서 치울 수 없는 물건이 되어야만 했다. 그 묘한 꿈에서 깨어난 그 당시는 너무나도 기분이 나쁘다. 그러다 무척 떨려온다. 불안함인지 설렘인지 모를 떨림이 과하게 날 반긴다. 그러곤 하루 종일 뭉툭한 선들이다. 당신의 형태도 크기도 기억이 나질 않을 만큼 뿌옇다.
오늘도 언제나 그랬듯이 학원을 가서 손목이 아려올 만큼 그림을 그렸다. 연필을 쥐면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어릴 적 못된 버릇 때문에 나답지 않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던 하루였다. 모든 게 지치고 허무했다. 그래서 침대에 누운 내 손은 텅 비어 있었다. 현실의 여파가 너무 컸던 탓에 나는 당신과의 만남을 포기하였다.
그러고 잠든 뒤, 거짓말처럼 나는 그에게 초대받지 못했다. 그게 슬펐던 걸까, 아무 꿈도 꾸지 않았던 나의 베개는 함뿍 젖어 있었다. 눈물범벅인 얼굴을 보아하니 갈기갈기 심장이 찢겨나가는 기분에 아침이 몹시 좋지 못했다.
그렇게 잊으려 했다. 세울 수 있는 계획의 최선이 고작 저 정도였다. 현실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자고 다짐을 했다. 나만 잊으면 될 문제였으니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랬었다.
이제는 연필을 쥐고 있지 않아도 당신이 드리운다. 그림은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옅은 색의 밑그림이 비친다. 분명 하얀 캔버스인데 당신의 굴곡이 들어온다. 덜컥 겁이 났다. 설령 허구라고 하여도 내가 당신을 사랑할까 겁이 났다.
생사도 모르는 남성을 사랑하게 돼버릴까 문득 두려움이 빗발쳤다. 당신을 품어버리면 내가 살아있음이 죄가 될는지 의문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당신은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나는 저만치 앞서 나가있다. 이미 앞서 나가는 나에게 완성이 주는 그 의미는 얼마나 커다란 사과일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완성에 박차를 가했다. 또 나는 툭하면 잠들었다. 밤낮을 구분치 않고 잠이 들 때면 당신이 날 반겨주었다. 방 안은 고요했으나 무언가 가슴팍을 통통 두들기는 느낌이었다. 초대해주는 이에게 사랑을 받기 위한 소녀의 발악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갔다. 수척한 얼굴과 말라가는 몸에 주변 사람들은 나를 걱정했다.
오늘이면 분명 당신을 완성할 수 있다. 드디어 그림에 눈물을 입힐 수 있다. 이 지긋지긋한 인연의 끝을 맺고 싶었다. 그렇게 또 한번 힘이 잔뜩 들어간 연필로 적어냈다.
환상적이었다. 나의 환상이 만들어낸 완벽함이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결함이라곤 결코 찾지 못할 그에게는 완벽하단 수식어가 어울리는 외모였다.
그림 속의 당신은 깔끔하고 나른하였다. 또한 인상이 날카로웠으며 따뜻함을 가진 냉소적인 인간이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물이 벌컥 쏟아질 듯 했으나 가당치도 않았다. 당신에게는 눈물보다 당혹이 어울렸고 그리움보다 환희가 어울렸다.
너구나, 나를 만들어 낸 아이가.
얼굴과 조화를 이루는 음성이었다. 생각보다 더 낮은 음역대를 가진 그는 입체가 더욱 아름다웠다. 그림과 달리 당신은 빛과 어둠을 삼켜버린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사람이랑 마주하려니깐 피곤하네.
너는 기껏 그려놓고 왜 아무 말도 없냐?
그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는 모습부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까지. 모든 행동들이 그의 과거를 궁금케 했다.
아 그게 어차피 그 쪽은 허상이시니깐,
제가 간절해지면 큰일이잖아요.
왜?
뭐가 큰일인거야?
존재치 않는 생물에 대한 간절함이 큰일인거야,
그저 나를 사랑할까 큰일인거야?
" 아가. "
"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야.
하지만 나는 너처럼 코흘리개 나이가 아니란다. "
" 때로는 실상보다 허상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어릴 적 엄마가 안 알려주든?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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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욤ㅎㅎ 미알못 예알못이라 넘 힘들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