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신성한 나라. 신라를 지칭하던 말) 왕경. 백성들 마저도 지붕을 올릴때 짚이 아니라 기와를 사용하고, 황금으로 장식하기를 즐기는 풍요로운 시대였다. 그것이 땅이 비옥하였던 때여서 인지, 아니면 하늘이 도와 좋은 날씨를 만들어 주어서 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절대 좋은 왕 덕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지소태후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고 있는 시기. 모두 진흥왕 덕분이라는 말보다, 지소태후 덕분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섭정을 하고 있는 지소 태후 덕분에 왕실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진흥을 제대로 앉히고 싶어하는 자들과, 진흥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 태후의 섭정을 환영하는 자들과, 섭정을 반대하는 자들. 그들의 싸움 소리는 왕실 저 멀리, 안쪽에 있는 별궁에서 마저 들릴 정도였다.
"여기 찾아 오다니 의외입니다. 지소태후."
보현 공주, 선대왕(법흥왕)의 누이, 왕비족 '진골정통'의 수장. 그녀는 별궁에 모습을 들어낸 지소를 보며 말했다. 지소는 보현의 허락을 받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신국의 태후라고 하나, 그곳은 신성한 왕비족의 영역이었다. 하늘에 기원을 들이는 여성, 또는 왕실에 여성을 배급하는 여성들을 위한곳. 그곳에선 지소도 그냥 일게 왕비족의 일원일 뿐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옥진궁주가 죽고나서, 대원신통(또다른 왕비족)이 꺽인 마당에 안녕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옥진궁주. 대원신통이라는 또다른 왕비족의 혈통이자, 박영실의 아내이었다. 법흥왕은 그 옥진궁주를 사랑했다. 옥진궁주가 누구의 아내건, 누구에게 마음이 있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왕은 옥진궁주를 보는 순간 미칠거 같은 사랑에 빠졌고, 옥진의 남편이었던 박영실은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옥진궁주를 왕에게 시집보내면서 막강한 권력을 얻었다. 대원신통과 영실공파. 그들은 막강했다. 법흥왕이 죽고, 진흥이 왕위에 올라,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기 전까진 말이다.
"솔직하시군요."
옥진궁주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은 비대공은 영실공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옥진궁주의 왕비족, 대원신통의 힘이 없어졌고 보현공주의 왕비족은 다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보현은 찻잔을 놓고 물었다.
"길게 끌고 싶지 않군요. 무슨 일입니까."
"...왕을 위해 목숨을 받칠 친위대를만들려고 합니다. 공주마마."
기품있고, 자연스러웠던 보현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최근 영실공이 다시 화백들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있다. 김습이 태후에게 힘을 대주고 있는 상황이지만, 진흥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나머지, 왕권이 많이 약해진 상황. 이 상황을 돌파하고자, 지소가 내새운 패. 그것은 제법 충격적인 것이었다.
"...사병들은 화백들이 다 차지 하고 있는데, 누가 왕을 위해서 나선다고 합니까?"
보현은 차분하게 물었다. 지소는 그에 응답하듯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화백들의 자식들을 데리고 올 겁니다."
"...가능할거라 생각하십니까?"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인재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보현님에게 가능성을 묻고자 온것이 아닙니다. 부탁을 하러 온것이지요."
보현은 그제야 지소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보현님의 아들이 올해로 19세 정도 이지요? 삼맥종보다 넉달 정도 생일이 빨랐으니 까요. 여울은 많이 컸나요?"
"..."
"그를 왕의 친위대에 넣으십시오."
이건 명령입니다. 지소의 냉혈한 목소리. 보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아들을 아낀다는 소리를 듣고 온것 일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쥐면, 이 진골정통까지 쥘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겠지. 왕을 위한 친위대인가, 태후를 위한 친위대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보현은 이 상황이 제법 재미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승낙했다. 그 친위대가 실제로 만들어 진다면, 자신의 아들 여울을 그곳에 넣겠다고. 하지만
"내가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명심해야 할것입니다. 아들을 밀어내고 왕자에 오른 어머니여. 신첩은 아들의 위험을 외면할 만큼 매정하지 못합니다."
왕실에 어울리지 않는 솔직한 인사였다. 그리고 보현의 그러한 성향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아들인 여울이었다.
"난장판의 시작이겠군."
그들의 이야기를 옆방에서 엿듣고 있던 여울은, 그들의 장기판이 될거 같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서로 죽이는 혈투는 윗대가리들로 충분한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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