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thriller
세피아의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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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너를 바라보고 있던 건 분명 이홍빈이었어. 너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서, 숨이 막혀버리는 기분에 표정을 굳혔어. 지하철 밖에서 다른 남자와 있는 널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이홍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이 곳의 지하철은 멈추지 않는다는 차학연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 되었어. 이홍빈이 타고 있던 지하철이 순식간의 너의 앞을 스치고 지나가며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거든. 이홍빈을 기다리며 보냈던 한 대의 지하철과 남자와 차학연, 그리고 너가 타고 있었던 지하철. 그리고 방금 너의 앞을 지나간 이홍빈이 있는 지하철까지. 총 세 대의 지하철을 떠나보낸 너는 혼란스런 머릿속으로 이 모든 걸 차근하게 정리했어.
우선 이 곳의 지하철은 한 번 운행을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고 목적지도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으며 현재의 정보로는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어. 말 그대로 '지옥행'이었지. 이런 괴기스런 지하철이 어떻게 멀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지 너는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어. 하지만 이건 지독한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너는 그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어. 지하철이 떠나고 그 다음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는 시간은 약 삼 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러니까 적어도 삼 분 이내엔 또 다른 지하철이 운행을 시작한다는 걸 의미했지. 그걸 알아차린 너는 셔츠의 팔 부분을 찢어 지혈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어.
"……아직 나가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약간 벙찐 듯한 표정을 짓던 남자가 이내 그렇게 하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 너가 지금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남자는 자판기를 마주보고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그 옆자리를 툭툭 건드렸어. 아마 앉으라는 신호겠지. 너는 그것을 쳐다보곤 조용히 걸어가 그 자리에 앉았어. 남자에게선 여전히 피 비린내가 났고 이젠 너에게도 그 냄새가 짙게 베어 있었어. 서로에게 궁금한 것들이 많은 상황이었지만. 너는 굳이 먼저 남자에게 입을 열지 않았어. 어린 애처럼 꾹 입을 다물고 있는 너를 잠시 쳐다보던 남자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어.
"너 나 누군지는 알고 그렇게." "……." "무방비로 있는 거냐." "……."
담담하게 내뱉어진 말에 너는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어. 목소리가 꽤나 기세등등했던 터라, 넌 남자가 연예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그리고 곧 남자의 얼굴에서 순진하게 쳐져 있는 눈꼬리를 확인하곤 넌 작게 비웃음을 터뜨렸어. 뭐야, 웃어? 곧 바로 날이 서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지. 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황한 너가 변명을 늘어놓자 남자가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내렸어.
"이제부턴 뉴스 좀 보고 살아."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넌 얼떨결에 그러겠노라고 대꾸했어. 조금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너는 머릿속을 떠다니던 질문들 중 하나를 골라 물어보기로 결심했어.
"근데. 저 왜 구해주신 거예요?" "…라……." "네?" "몰라. 내 맘이야." "장난 말고요." "……있지. 난 처음에 내가 나쁜 짓을 하도 많이 해서 지옥에 온 줄 알았어. 바보 같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사형이라도 집행된 건가? …… 막 이러고 있었다니까. 완전 웃기지." "……네?" "거 참. 넌 할 줄 아는 말이 그거밖에 없어?" "……." "나 오늘 또 사람을 죽였어." "……."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탈옥한 건 그저께. 계획된 살인이었어. 몰래 죄수복 안에 사복을 입어두고 탈옥을 시도했었으니까. 남자가 고요하게 중얼거렸어.
너는 느리게 남자의 첫 인상을 떠올려냈어.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과, 너저분하게 찍혀 있던 핏자국들.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낀 네가 흠칫하며 다리를 떨었어.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저 계속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어.
"오늘 운이 별나게도 좋더라. 하필이면 근처에 경찰서가 있었던 거야. 아까 말했지? 이번이 벌써 세 번째라고. 잡히면 얄짤이고 뭐고 없는 거야. 나한텐. 그래서 죽기 살기로 뛰었는데." "……." "진짜 운이 존나게도 좋았지. 갑자기 눈 앞에 역 하나가 보이더라고. 거기가 어디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그냥 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정의의 무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뿐야." "……."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역 안에 들어왔지. 지하철이라도 다를 게 없었어. 온통 CCTV로 도배가 되어 있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난 그대로 지하철이 들어오는 구간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 거야." "……." "사람들이. 없었어. 아무도." "……." "근데 사실 이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낸 거지. 그 때는 진짜 정신 없이 달리고 지하철 안으로 뛰어들기만 해서 주변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었어." "……." "그러다가 어떤 애새끼 하나를 만났는데, 걔가 내가 지하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기겁을 하면서 날 밖으로 밀쳐내려는 거야. 내 성질머리에 그걸 가만히 뒀겠냐. 초면에 미안했지만 이대로 밖으로 밀려나가면 경찰들 눈에 보여서 잡힐 게 빤하니까 세게 뺨 한 대를 쳤다?" "……." "근데 또 존나 웃긴 게. 그 새끼가 아픈 건 존나 아픈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선. 나한테 또박또박하게 말해주는 거야."
제발 나가달라고. 안 나가면 다 죽는다는 거야. 너는 그 말에 문득 차학연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어. 지하철에 타고 있었던 차학연은 너무나도 살가웠었거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의 지하철이었지만 극과 극의 상반된 반응이었지. 넌 또 다시 혼란스러워지는 머릿속에 작게 미간을 좁혔어.
"근데 어쩌겠어. 이미 지하철은 닫혀 버렸는데. 둘러보니까 지하철 안에 승객이라곤 나랑 그 애새끼 뿐이더라." "……." "그리고 그 애새끼가 구구절절하게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 "대충 들어보니까. 도저히 두 눈 뜨고 믿어줄 수 없는 얘긴데도. 왠지 모르게 진짜 존나게 심각한 거야." "……." "내가 생각해도 진짜 쓰레기 같은 게. 사람을 셋이나 죽인 새끼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막 심장이 떨리는 거 있지. 정말로, 내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줄 알았어." "……." "그래서 닥치는대로 지하철을 뛰어다녔어. 그 애새끼가 한 말만 믿고서. 근데 진짜로 벌벌 떨고 있는 여자애 하나가 보이더라." "……." "……애새끼 말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 "아니.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
너를 구해준 이유는 그거야. 그 뿐이야.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에 넌 뎅뎅거리는 환청을 들으며 마른 침을 삼켜 넘겼어. 눈 앞엔 살인을 세 번이나 저지른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너를 바라보고 있었고 솔솔 바람이 불어오는 시점에선 삭막하게 끔찍한 분위기가 흘렀어. 난잡한 이야기에 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어. 넌 또렷하게 반짝이는 남자의 두 눈을 응시하다가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요란한 소리에 몸을 일으켰어. 그런 너를 잠시 의아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급하게 너의 팔을 붙잡았어.
"놔요. 가야 돼. 나 저거, 어디서 멈추는지 알아보러 가야 돼." "무슨 소리야. 미쳤어?" "친구가!!" "……." "…친구가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안 돼. 절대 못 가. 내가 널 어떻게 살려냈는데." "같이 가자고 안 해요. 저 혼자 갈 거예요. 나가려면 혼자 나가세요. 전 안 가요." "……애새끼랑 한 약속 지켜야 된단 말이야."
단호한 너의 목소리에 남자는 조금 누그러진 반응을 보이며 붙들었던 손목에 살짝 힘을 풀었어. 방금 너의 앞을 스쳐 지나갔던 지하철 역시 아까와 똑같이 빠른 속도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그렇게 빨려 들어가는 터널 안은 끝이 없는 것처럼 아득해 보였지. 넌 세게 입술을 깨물었어."
"봐. 너도 봤지. 우리가 얻었던 기회는 앞으론 절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 이제 우리 앞으로 나타나는 지하철은 평생 멈춰지지 않는다고." "……." "그리고 갈려면 나도 데리고 가." "……." "일단 이거부터 말끔하게 치료한 뒤에."
남자가 갑작스레 개구지게 웃으면서 새빨갛게 젖어버린 복부를 가리켰어.
"너 소독은 할 줄 아냐? 나 병원 못 가는 거 알지? 네가 다 해야 돼. 나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얼굴 노출되면 진짜 망하는 거야."
결국 너는 남자의 말을 듣기로 했어. 남자의 말대로 지하철이 언제 어디서 멈춰질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왠지. 굳이 네가 애쓰며 찾아다니지 않아도 이홍빈은 무사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 너와 남자는 끔찍했던 지하철이 숨겨져 있는 역을 빠져나왔어. 계단을 오르는 내내 긴장이 풀려 넘어질 뻔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남자가 옆에서 너의 손을 지탱해 줬어.
나가자 하늘이 보였어. 시멘트 바닥과 불이 꺼져 있는 가게들도 보였어. 몇 시간 전만 해도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는 풍경들이었는데. 너는 일상과의 재회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어. 한 편으로는 착잡하기도 했지. 분명 처음에 이 곳에 들어갔을 때 옆에 있었던 건 이홍빈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너와 남자는 새벽을 향해 조금씩 걸어나가기 시작했어.
"…저기요. 아까 괜히 고집 부려서 미안해요." "저기요. 말고. 김원식." "……." "내 이름이야." "…네." "넌 성음이지?" "……." "아까 명찰에서 봤어." "……저희 아빠한테로 가요."
의사시거든요. |
또 왔어요.
벌써 새 해라니... 여러분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염. (하트)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진짜 감사 드려ㅇㄴㅁㄹㄴㅇ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 막장 전개 어쩔 거야...
단톡방 답글은 내일 달아 드릴게여. 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