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환이가 기억상실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부터 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병실에 들어가 재환이에게 나를 기억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재환이 부모님과 멤버들이 항상 병실에 머물렀고, 병문안을 오는 사람들도 꽤 있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 나도 지인으로 병문안 온 척 재환이를 보러갈 수 있었지만, 괜히 들킬까봐 무서운 것도 있었고, 또 혹시라도 재환이 날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두렵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며칠 째 병원에 머무르는 이유는 멀리서 한 번이라도 재환이의 얼굴을 봐야지만 내 맘이 놓일 것 같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라도 본다면 그 때는 걱정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며칠이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화장은 무슨, 잘 씻지도 못하고 있으니 꼴이 말이 아니다. 그치만 지금 내 모습이 뭐가 중요하겠어.. 재환이는 온 몸이 망가져 수술까지 했는데...
화장실에서 수척해진 내 모습을 보고 나오는데, 폴대를 끌고 걸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재환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반가운 마음에 '재환아!' 라고 외치려던 찰나, 재환이는 나와 마주친 눈을 거두고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간다.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몸은 딱딱히 굳고 시선이 흔들린다. 곧이어 부축해주러 나온 매니저가 재환이를 잡아주며 걸어갔고 머리속에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곧 매니저가 나올 걸 알고 들키면 안되니까 모른 척 한 거겠지? 그리고 주위 시선도 있으니까 일부러 그런 걸거야. 에이.. 설마 나를 잊었겠어?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 대한 합리화를 하면서 최대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나도 무엇이 사실인지 잘 알기에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 앉았다. 더 이상 울 기운 조차 남아있지 않아 눈물도 나지 않는다.
나는 재환이의 표정을 봤다. 만약 주위 사람들 때문에 연기를 하는 거였다면, 눈빛에서 표가 났어야 한다. 그런데 재환이는 나와 눈이 딱 마주친 그 순간에도 눈빛에 이 만큼의 요동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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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더 머물다가 재환이를 또 마주친다면, 또 아까처럼 그렇게 날 못 알아보는 걸 내 눈으로 보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곧바로 집에 와버렸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왜 나일까, 재환이가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 날 잊은 걸까. 집에 와서도 소파에 가만히 앉아 나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을 보면 기억상실의 대상은 보통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존재이다. 그런데 재환이는 왜 나를 잊은 걸까? 3년을 넘게 사귀면서 물론 우리 둘이 싸운 적도 있고 헤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또 재환이는 항상 나에게 미안해 해왔다. 그렇지만 이 일들이 재환이에게 그 만큼은 정신적인 고통을 줄 스트레스가 아니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재환이가 연예계 일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위로를 해주고 힘을 준 게 나였고, 나 역시 재환이에게 힘들 때 의지하면서 그렇게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나는 재환이에게 스트레스가 아닌, 힘이 되어 주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서 충격과 일종의 배신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또 이런 상황을 만든 원인이 나고, 재환이는 죽을 뻔한 사고까지 당했다는 사실에 난 배신감을 느낄 자격도 없는 것 같아 자꾸만 좌절하게 된다.
재환이는 이미 내 삶에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재환이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거의 전부이다.
부모님도 멀리 계시고 부모님 외에는 다른 가족도 없으며, 친한 친구들도 고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서 나에겐 재환이 말고는 곁에 있어 줄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재환이를 자주 만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 편이 있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든든했다.
그런데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재환이를 찾아가 나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고 싶다. 그렇지만..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으로는 기억을 억지로 찾게 하려고 노력하면 머리에 무리가 올 수 있다니, 차마 그럴 순 없다. 내 욕심 때문에 또다시 재환이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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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신상태로 일하는 건 불가능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나와 집에 오자마자 같이 일하는 선배에게 당분간은 일하기 힘들 것 같아 몇 개월만 좀 쉬겠다는 연락을 했다. 아무리 내가 능력있는 프리랜서로 유명하다해도 오랫동안 일을 쉬면 복귀할 때 애 좀 먹을텐데 걱정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중요치 않았다. 일도 나가지 않으니 요즘은 쭉 집에서만 지내고 있다. 어느 것에도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먹고 싶지도, 씻고 싶지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도 않다.
아무리 웃긴 예능 프로를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나질 않고, 슬픈 영화조차 나에게서 아무런 감정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또 채널을 돌리다가 혹시라도 연예 뉴스에서 전하는 재환이 소식을 보고 싶지 않아서 TV도 보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는 아예 전기 코드를 뽑아버려 놓았다.
그래도 아까 얼핏 본 바로는 재환이가 금방 회복하고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 걱정도 되고 많이 궁금했었는데, 그래도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니 우울한 기분이 더 깊어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대로 재환이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재환이가 없는 삶을 살아갈 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재환이에게 사고가 나고 거의 한 달이 지났다. 재환이의 사고를 기점으로 나의 삶은 180도 바뀌어 버렸다. 나는 거의 바보가 되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인간으로서 해야할 최소한의 일도 거의 하지 않은 채, 시체처럼 살아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죽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면서 자고, 일어나서도 멍하게 있다가 울고 또 지쳐 잠들고.. 이게 내 일상이다. 극히 비정상적이지만, 어느새 내 생활 패턴이 되어버렸는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 살도 많이 빠졌다. 내가 봐도 참 볼품없네.
한 달 전의 생기있던 내가 그립다. 재환이를 만날 생각에 설레하던 내가 이젠 기억도 잘 나려하지 않는다. 데이트 때 입으려고 간만에 예쁜 옷들도 사놨었는데, 쓸모가 없어져 버린 옷들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그러다가 역시나 웃음의 끝을 채우는 건 눈물이다. 그래.. 눈물이 안나면 이상하지. 담담하게 흐르는 눈물을 슥슥 닦아내고는 느릿느릿하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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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일
일도 하지 않고 사람과의 소통도 없이 생기란 찾아 볼 수도 없는 시간을 보낸 지 1년 반이 넘었다. 재환이는 사고 이후 생각보다 빠른 회복을 통해 완치가 되었고, 작년 이맘 때 쯤 이별공식이란 곡으로 컴백을 했고, 그 이후 사슬로 한 번 더 활동을 했다.
이별공식으로 컴백한다는 소식이 처음 들렸을 때, 사고 이후 첫 컴백이라 언론과 대중이 재환이와 빅스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팬들은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좋아했고.
재환이가 회복하느라 빅스 활동을 하지 못한 기간 동안에 나는 여전히 남아있는 죄책감으로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다. 물론 죄책감뿐만이 아니라 재환이가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슬픔도 크긴 했지만.
재환이의 컴백 소식을 접했을 때, 우울함에 눈물로 보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었다. 그리고 활동기엔 더더욱 TV나 핸드폰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재환이의 모습을 보면 더 슬퍼질 게 분명하니까.
이제는 사고 후 1년 6개월. 이제 나도 이 생활을 정리하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 나의 삶을 찾을 때가 된 것 같다. 언제까지나 깊은 우울에 빠져있을 순 없는 거지..
힘들어 한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리도 힘들어했는지.. 죄책감은 떨칠 수 없는 것이니 재환이에게 평생 미안한 마음은 간직하면서도 내 삶을 잘 살아나가면 됐을 건데 말이다.
내 일상을 되찾기 전에, 내 주위에서 재환이의 흔적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재환이와 나누어 꼈던 반지부터 선물받은 목걸이랑 옷들과 커플 신발, 내 집에서 밥을 해줄 때 썼던 두 개씩 있는 접시 세트들과 수저.
막상 모아놓고 보니 차마 우리의 추억들을 버리진 못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버릴 순 없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옷 방 한 구석에 놓여있던 큰 상자가 생각나서 가져왔다. 그리고는 하나씩 차곡차곡 담았다.
재환이와 나의 기억들이 이런 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글펐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울컥하는 감정을 억눌렀다.
박스를 한 곳에 밀어두고 소파에 앉아 집을 둘러봤다. 이 집조차 재환이와의 추억이 너무 많다. 그저 슬픔에 갇혀 살았던 지난 1년 6개월 동안은 잘 몰랐는데, 이제 와서 보니 곳곳에 재환이가 겹쳐보인다.
아무래도 이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언제 또 집 구하고 인테리어하고 이사를 하나..
잠시 고민이 됐지만, 오히려 집도 보러다니고 집 꾸밀 계획도 세우면서 활기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사를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이 나를 변화시켜 줄 거란 생각에 조금은 기대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있는 멍 자욱은 지워지지 않겠지만.
살다보면 잊을 날도 있겠지요
잊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무덤덤해질 날은 있겠지요
그때까지 난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고 그리워 할 것입니다.
잊기 위해서라 아니라 내 안에 간직하기 위해서 살다보면
더러 살 만한 날도 있겠지요
상처받은 이 가슴 쯤이야 씻은 듯이 아물 날도 있겠지요
그때까지 난 함께 했던 순간들을 샅샅이 끄집어 내어
내 가슴의 멍 자욱들을 키워나갈 것입니다
그대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대를 원망해서도 아니라
그대에 대해 영영 무감각 해지기 위해서
-씻은 듯이 아물 날 / 이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