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른다. 비록 바쁘게 돌아가는 초침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홍정호, 그를 못본지 벌써 일주일 째다. 나는 아직도 현실로 돌아가지 못한 채 여기서 일주일동안 머물고 있다.
심지어는, 그가 말하던 '기억'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일어나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책을 보거나 산책을 하며 또 주어진 일과를 하는, 지루한 삶.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금 나의 기억은 현실에 머물러있지만 그를 사랑했었단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정말 이상하게도 그가 보고싶다.
"마마. 며칠 째 계속 멍해보이십니다. 무슨 혜염(걱정)이라도.."
"아뇨. 괜찮아요. 김상궁은 처소로 돌아가 쉬세요. 혼자 있고..싶어요"
상궁들이 항상 내 곁을 맴돌아 오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 때 그가 보여준것은 정지된 시간.
그런 광경을 보여준 그라면 언제든지 내게 올 수 있을 텐데. 기억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나 버린걸까
"...김상궁.."
"예.마마"
"..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마마!! 지금 혹 그 사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되옵니다!! 중전마마와 전하께서 그리 타일렀거늘 어찌하야..!"
"...알고... 있어요? 사내가 누군데요!!!!?뭐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사랑하게 된거에요?"
"쇤네는 모르옵니다!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시면 특히!중전마마께서 경을 치실 것이옵니다."
"난..몰라요 그 사람이 누군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사랑했는지조차. 하나도..."
상궁은 단호하게 거절하고선 나가버렸다. 더 이상 내게는 그에 대해 알아볼 힘도. 방법도 남아있지 않은 것같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도 말해줄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나보고 알아내란 거야
".......紅火..마마..그것이 그의 이름이옵니다"
"..서관!!!!!!알고 있나요? 말해줄 수 있어요?"
"송구스럽사오나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다이옵니다."
紅火..홍화...붉고 뜨겁다..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전생의 이름이 홍화라는 것을 알았다.
드르륵
서랍에서 곱게 잘 개어진 화선지를 꺼내고 먹을 갈았다. 이미 몇 번 쓰여진듯한 붓이 내 손에 쥐어지고 떨리는 손을 받쳐잡고
그의 이름을 조심스레 종이 위에 적어보았다.
조심스레 눌러적은 그의 이름옆에 붉은 안료를 가져다 작은 붓으로 용한마리를 그려넣었다. 불타오르는 듯하며 꽃향기처럼 아득하게, 그렇게, 그를 그려넣었다.
[전연前戀]
화아아악_
'내가 무섭지 않나? 공주여'
'무섭지 않아요. 나는 월호국의 공주, 당신을 마주한 대가가 무엇이라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공주마마는 내가 그렇_게도 좋은가?네 곁에 있으면 네 심장소리가 이다지도 크게 들릴수가 없구나.'
'그..그러는 홍화는요!!!나도!나도 이까지 들려요!!'
........
'...내가 밉지 않은것이냐 넌..'
'난, 당신을 만났단것에 행복해요.어마마마나 아바마마가 반대하신다해도,'
.........
'...그렇다면.....기억하여라.나를.다음생에도, 그 다음생에도, 영원히.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기억만 하여라'
눈을 떴다. 마치 오랜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몸이 찌뿌둥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 곳은 다시 나의 집, 현실이었다. 꿈이었던 걸까. 그의 모든게 전부.....?
침대 옆 탁자에 올려져 있던 거울을 들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내 얼굴에 눈물 한 줄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항상 외로워보였는데, 뭔가 잃어버린 것같았는데, 이제는 더이상 그런느낌이 들지 않는 다는 것
"....꿈이었나...."
꿀꺽꿀꺽_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꿈이었단 생각에 왠지 모를 허탈함과 부끄러운 기분이 몰려왔다. 몇 번 만나본 사람도 아닌데.....왜 하필이면...
"아..앗.."
손목 언저리가 시린듯이 아파온다.
"............!!이게...뭐...."
붉은 용한마리가 작게 그려져있어, 놀란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고 진짜였었나? 내가 진짜로..진짜로 그와?
"...하..하하하.....하...찾았네요..진짜였나봐요....나 찾았어요 정호씨....기억..찾았어요"
".........."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고요한 침묵 뿐, 아무도 내 허탈한 독백을 들어주지 않는다. 기어코 찾고야 말았다고, 화선지에 당신의 이름을, 당신을 새겨넣음으로써
기억을 되찾았다고, 당신을 사랑한 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미안하다고........
"흐...하.....흐윽......어디있어요..하.....아파....."
손목이 너무 아파, 잘려나갈 것같아.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다른 한 손으로 손목을 잡은 채 주저앉아버렸다. 힘없이도. 눈물만 자꾸 흘린채로
사실은, 손목만 아픈게 아니다. 마음도 아프다. 그를 잊어버렸나? 내가 왜? 이제 나타나지 않는걸까? 나에게 실망해서?
"허..흑....미안해....미안해요...나...이제 알았는데..흐....."
"....알 수 있겠느냐..."
"...하!!!....어디갔다가..흐..."
"여지껏 내가 느꼈을 그 아픔이, 매일의 아픔이 느껴지느냐..?"
또다시 말없이 나타나 내 등 뒤를 조심스레 감싸안는 그 때문에 눈물이 차올랐다. 더는 말할 새도 없이 뒤돌아 꽈악_ 그를 안았다. 있는 힘껏_
이때껏 알아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