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thriller
세피아의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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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사무치고 성대에 못이 박히는 게 뭔 줄 아니.
그토록 사랑하는 넌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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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쇳덩어리에 의하여 출구가 막혀 버렸어. 아마도 굉음은 쇳덩어리가 지하철의 출구를 막아버리는 접합부에서 일어난 것 같았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넌 멍청하게 네 곁으로 다가온 두 명의 남자를 쳐다봤어. 왜인지 묘하게 안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홍빈의 모습과. 덜떨어진 것처럼 너를 주시하고 있는 이재환의 모습이 보였어.
너는 덜덜 떨리는 두 다리를 애써 침착하게 움직이며 계단을 밟았어. 환하게 트여있었던 출구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쇳덩이에 꽉 막혀 버렸어. 허탈감에 빠져 잠시 입꼬리를 올리던 네가 곧 여린 주먹으로 쇳덩이를 두드리기 시작했어. 당연한 결과지만 쇳덩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 조금의 틈도 없이 막혀버린 출구에 넌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리는 것을 느끼며 계단에 주저앉았어.
곧 너의 곁으로 이재환이 다가왔어. 잠시 너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이재환이 너의 옆에 앉았어. 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졌고, 이홍빈은 계단 아래에서 너와 이재환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어.
설마. 출구가 여기 하나 뿐이겠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구잡이로 출구를 찾아 나섰지만 무용지물이었어. 출구는 모두 쇳덩이에 의해 막혀 있는 상태였어. 개찰구 앞으로 걸음을 옮긴 너와 이재환, 그리고 이홍빈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어.
네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며 외투에 있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어. 단축번호 1번을 눌렀고 끈질기게 수신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으셨어. 다시금 조용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박아 넣는 모습을 이재환이 쳐다봤어. 곧 예측할 수 없는 앞 날에 대한 불안감에 네가 울음을 터뜨렸고. 이재환은 말 없이 다가와 그런 너의 작은 어깨를 감싸쥐어 안았어.
"울지 마."
따뜻하게 등을 쓸어내리는 이재환의 행동에 표정을 굳힌 건 이홍빈이었어. 빠르게 그 곁으로 다가와 이재환의 손목을 낚아챘어. 강한 악력에 손목이 꺾였는지 이재환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어.
"손 놓으세요." "……." "이럴 시간 없다는 거 잘 알잖아요."
이재환의 품으로부터 떨어진 네가 젖어 있는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어.
"…네가 아까 바보 같이 굴지만 않았으면 다 나갈 수 있었어." "……." "그 때 거기서 한상혁을 만났으면 이런 일은 없어." "……." "너 때문에 우린 다 죽는 거야."
너를 찾아다니고 있을 한상혁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진이와. 너 때문에 이 곳으로 걸음을 옮긴 이재환과. 나가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뛰어다니고 있을 김원식과.
너는 그들의 목숨의 책임을 이홍빈에게로 돌렸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흐느끼며 네가 이홍빈을 질책했어. 그런 너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이홍빈이 보조개가 파이도록 부드럽게 미소 지었어.
"아니. 성음아." "……." "걱정 마. 넌 내가 살릴게." "……."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내가 살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성음아. 문득 이재환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이홍빈을 쏘아봤어. 그 시선을 느낀 네가 조심스럽게 둘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어. 곧 너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넌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을 느꼈어.
이홍빈이 말했던 세 시간 중 한 시간이 지나갔어. 앞으로 두 시간만 있으면 이 곳은 무너질 것이고, 그 동안 아무런 노력도 없이 지쳐 있다간 정말로 시멘트에 파묻혀 죽어버리고 말 거야. 마지막으로 한상혁을 찾기 위해 역을 돌아다녔지만 한상역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너의 인생 중에서. 이토록 커다란 절망과 슬픔을 느꼈던 날이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을 거야.
넌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어. 의욕이 생기질 않았어. 이미 넌 지칠대로 지쳐버렸고, 지금의 상태로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어.
"오빠." "응. 왜." "……미안해." "뭐가."
다 괜찮아. 이재환의 얼굴이 언뜻 슬픈 것처럼 일그러지다가 이내 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줬어. 그리고 이홍빈은 여전히 그걸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봤어.
"쇼 그만해. 이 미친 새끼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네가 고개를 돌렸어. 그러자 놀랍게도, 한상혁과 김원식이 무표정한 얼굴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있었어. 미친 새끼야. 에 악력을 쥔 발음으로 입술을 깨문 한상혁이 날카롭게 눈을 치떴어. 넌 한상혁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어. 옆에 있는 김원식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이재환. 이라고 했었나?" "……." "너도 그렇게 착한 척 지랄을 떨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말이야."
김원식이 비웃음이 그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어. 그러나 그 말은 똑똑히 너의 귓전을 파고들었고, 너는 표정을 굳히며 이재환을 쳐다봤어. 이재환의 얼굴이 알 수 없게 찌그러져 있었어.
의자에서 마른 세수를 하고 있던 이홍빈이 이재환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어. 둘과 둘 사이에 끼이게 된 네가 살기가 흐르는 분위기에 뒷걸음질을 쳤어. 그리고 그런 너를 발견한 한상혁이 너의 손목을 재빠르게 붙잡았어.
"누나. 미안. 어떤 미친 개새끼가 바닥에 구멍을 뚫어놓은 거 있죠. 거기에서 빠져 나오느라. 그래서 늦었어요." "쟨 어째 저런 표정도 저렇게 못생겼냐."
한상혁과 김원식. 둘이 차례대로 말을 마쳤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의문 투성이인 상황에 네가 얼굴을 찌푸렸어. 얼굴 찌푸리지 마라.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더 못생겨진다. 김원식이 개구지게 웃으며 말했어. 그에 한상혁도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너를 바라봤어.
"누나.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 "이제부터 저 새끼들 말 믿지 마." "……." "그냥 지금부터 앞만 보고 에스컬레이터로 뛰어. 어딘지는 알지? 거기로 올라가서 상가에 숨어 있으면." "……." "이번에야말로. 내가 진짜 누나 구하러 갈게."
한상혁이 가볍게 웃었어. 그에 같잖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던 이홍빈이 천천히 너에게로 다가왔어.
"성음아." "……." "아까 들었는데 친구가 지하철에 탔다면서." "……." "우리, 걔 데리러 갈까?"
응? 이홍빈이 재촉하며 물었어. 너는 그 물음에 온전치 못한 공포를 느끼며. 다시금 뒷걸음질을 쳤어. 문득 바라본 이재환의 표정이 시리도록 굳어 있어 너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어.
"뭐? 건물이 폭파돼? 진짜 지랄이 풍년들이다. 거짓말을 칠 거면 좀 그럴 듯하게 치던가. 유치해서 못봐 주겠네." "내 말이." "누나." "……." "……뛰어. 지금."
넌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미친듯이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어. 네 명의 잔상들이 눈 앞으로부터 멀어졌고 넌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에스컬레이터에 긴장에 젖은 침을 한 번 삼켜 넘겼어.
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죽 그 곳을 바라보고 있던 한상혁이 갑작스레 뺨을 강타하는 완력에 미간을 좁혔어. 얼얼해진 뺨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을 동안 이홍빈이 다시 한 번 세차게 한상혁의 뺨을 때렸어.
"이럴 때를 보고 하는 말이 있지." "……씨발, 안 닥쳐?" "피는 못 속인다고."
존나게 쓰레기 같은 피 말이야. 중얼거린 김원식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어. |
마지막으로 신에게 간청해.
제발 나를 다시 사랑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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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만났다.
항상 잘 떠들고 웃는 차학연의 곁엔 수 많은 친구들이 존재했다. 비록 빈 껍데기에 불과할지라도. 차학연도 그걸 알았다. 절대 모르지 않았다. 다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차학연은 밝게 자신을 포장하는 것에 능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차학연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랬기에 손 재주가 좋았고 예쁘장한 외모와 더불어 종종 계집애 같다는 말을 들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정택운은 의예과였다. 타고난 공부 머리로 늘 1등을 놓치지 않던 그는 평탄하게 서울에 있는 의과 대학에 입학했다. 항상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을 그었다. 그럴 때마다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정택운은 복잡한 인간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서양화과와 의예과의 만남은. 불이 물이 만난 것처럼. 물이 불에 튀겨지는 것처럼. 물고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하늘에 땅바닥이 자라나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결코 섞이지 못하는 본성들을 가진 사람들이 스물이나 모여 거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서양화과와 의학과의 선배들 중 한 쌍이 서로 눈이 맞아 사귀게 되었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술자리였다. 술자리를 신입생 환영회로 둔갑시킨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마시고 죽자며 술잔을 권했다.
정택운은 조용히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술엔 입에 댈 생각도 없었다. 조용하고 차분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정택운이 술자리를 나왔다는 것으로도 선배들은 들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깨에 닿아오는 무게감에 정택운은 핸드폰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옆 자리를 쳐다봤다.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새빨간 얼굴로 잠꼬대를 하며 제 어깨를 베개 마냥 부벼대고 있었다. 정택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초면인 누군가가 제 살에 피부를 맞대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깊게 표정을 찌부리고선 술에 취한 얼굴을 밀어낸 정택운이 다시 핸드폰 액정으로 시선을 박았다.
"…음……." "하, 참."
이번엔 무릎으로 그 얼굴이 닿았다. 선배들과 후배들이 서로에게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맞대고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정택운은 눈치를 살피며 무릎에 놓여 있는 얼굴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일어나." "……." "일어나라고."
그 조용한 미성이 깊게 잠에 빠진 사람에게 들릴 리 없었다. 오른쪽 귓볼에만 박혀 있는 피어싱을 발견하고선 문득 정택운이 더욱 짙게 얼굴 표정을 찌그러뜨렸다. 뭐야. 생긴 것도 곱상하니 이상하게 생긴 게. 게이야?
정택운이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여전히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얼굴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택운이 조금 더 세세하게 얼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여우 처럼 길게 찢어져 있는 눈꼬리와 오똑한 콧대. 그리고 새빨간 입술이 오물대는 것이 보였다.
정택운은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의예과에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서양화과인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시선이 닿았다. 앞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게 될 자신의 손가락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그에 정택운은 손의 선 마저도 부드럽게 떨어지는 게 가발만 씌워놓으면 딱 여자일 거란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을 잠깐 했다.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서양화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흔들어도 좀처럼 잠에서 깨지 않는 그 때문에 정택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은 과제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늘 빈틈 없이 과제를 수행하는 정택운이었기에 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노트북을 켜야 했다. 노트북을 키고 유에스비를 꽂고, 저장했던 과제물을 프린트해 부족한 점은 없는지 천천히 체크해 보아야만 했다.
근데 그 군더더기 없는 계획이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 때문에 틀어지게 생겼다. 정택운이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헤집었다. 선배들과 후배들이 무리를 지어 호프집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꼭 나오라고 부를 땐 언제고. 인상을 찌푸린 정택운이 서양화과를 등에 업으며 생각했다. 하루 쯤은 집데서 데리고 재워도 상관 없겠지.
서양화과는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가뿐하게 그 몸을 들쳐 업은 정택운이 서양화과의 짐으로 보이는 가방을 목에다 걸고 호프집을 빠져 나왔다. 술도 못하는 새끼가 왜 술은 진탕 마셔선 이렇게 모르는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정택운이 택시를 잡으며 서양화과의 머리통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이윽고 자취하는 옥탑방 앞에 멈춘 택시가 야간이라며 이 천원의 팁을 요구했다. 어이가 없는 얼굴로 잠시 택시 기사를 쳐다보던 정택운이 지갑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손을 뒤적거려도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며 손이 바빠진 정택운의 시야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서양화과의 가방이었다. 조심스럽게 그 가방을 열어본 정택운이 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두툼한 지갑을 꺼냈다. 다행히도 지갑 안엔 몇 만원의 현금이 있었다. 팁으로 삼 천원을 더 얹어준 정택운이 여전히 술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서양화과를 등에 업고 택시를 빠져 나왔다.
"아, 술 냄새." "……." "야. 이거 벗고 자."
정택운이 서양화과의 볼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나 역시. 서양화과는 눈을 뜨지 않았다. 전보다 더 심하게 잠꼬대를 해댈 뿐.
하는 수 없이 정택운은 서양화과의 겉옷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잠결 사이로 들어오는 손바닥이 차가운지 서양화과가 조금 몸을 움찔댔다. 그에 기분이 묘해진 정택운이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이고 다시 한 번 서양화과의 겉옷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서양화과는 과잠으로 보이는 야구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야구잠바를 벗기자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마른 몸이 보였다. 춥지도 않나. 생각하며 정택운이 서양화과를 침대에다 옮겼다. 얼굴 위까지 이불을 덮어준 정택운이 걸음을 돌려 책상에 앉았다.
한창 노트북에 정신을 집중하며 마우스휠을 움직이던 정택운이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손목을 돌렸다.
"술 취해서 깔리는 건 내 취향 아닌데." "…뭐?" "그래서 나랑 해서 좋았어?"
뭐가 깔리고 어쩌고 저째? 야, 그런 거 아니거든? 정신 차려라. 나른하게 눈을 비비고 있는 서양화과를 못마땅히 쳐다보던 정택운이 뒷목을 잡았다. 대충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아들은 정택운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서양화과의 입술이 더 빨랐다. 뜬금 없이 입술을 덮쳐오는 서양화과의 움직임에 정택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갈 곳을 잃은 손이 곧 서양화과의 손목을 붙잡아 입술을 떼어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야릇해진 분위기에. 이번엔 정택운의 입술이 서양화과의 입술을 덮쳤다.
둘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처음으로 같이 잠을 잤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정택운이 끓인 해장국을 반찬으로 둘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보며 밥을 먹었다. 그 날 오후 처음으로 정택운이 타인과 함께 출석을 했다. 그리고 그 날 밤. 두 번째로 같이 잠을 잤다. 서양화과의 이름은 그 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차학연. 그 애는 이름 마저도 계집애 처럼 예뻤다.
처음. 그렇게 그 둘은 스무살에 처음을 함께하며 다음 학년을 맞이했다.
차학연은 학교를 졸업하면 홍대 거리에 작은 화방을 하나 차릴 거라고 했다. 정택운은 학교를 졸업하면 대학 병원 인턴에 지원서를 제출할 거라고 했다. 정택운이 차학연에게 말했다. 네가 하는 일은 뭐든 다 잘될 거야.
둘은 끔찍하게도 붙어 다녔다. 가끔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극과 극인 애들 끼리 어떻게 그렇게 친하게 지낼 수가 있냐고. 그럴 때마다 차학연은 서로 조금만 참으면 된다며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을 늘어 놓았다.
거기서 일 년의 시간이 더 지나고 정택운은 의학과로 진학했다. 그리고 거기서 일 년의 시간이 더 흘렀고 차학연은 졸업을 했다. 정택운이 학교를 졸업하기까지엔 이 년의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차학연은 정말로 홍대에 화방을 차렸다. 빼어난 색채감으로 화방은 유명세를 탔고 차학연은 바빠졌다. 그리고 인턴 시험을 앞두고 있는 정택운은 더 바빠졌다. 둘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적어지는 것을 느꼈다.
둘의 관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 연인? 섹스 파트너? 같은 대학교의 대학생? 둘은 그 어떤 것에도 해당이 되지 않은 채로 청춘을 헤매었다.
정택운이 6년의 시간을 의과 대학에서 보냈고 차학연은 4년 동안 미술 대학에서 시간을 쏟았다. 차학연은 제 곁에 정택운이 없었던 2년의 시간 동안 화방을 차려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차학연은 정택운에게 집을 구할 테니 같이 몸을 맞대며 살자고 했다. 그러나 정택운은 거절했다.
한 순간의 착각과도 같았던 스무살의 불장난의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정택운은 생각했다. 정택운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은 차학연은 그 때도 밝게 웃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차학연은 굳이 모든 것을 티내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포장지 뒤로 숨길 줄 아는 얍삽한 사람이었다.
인턴 생활을 시작하며 정택운은 대학 병원의 교수에 눈에 띄어 은근한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택운은 그의 사택까지도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정택운은 거기에서 그의 딸을 만났다. 사택에 드나드는 일이 잦아졌고 정택운은 교수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 하나로 비교적 평온하게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교수는 날렵했다. 모든 게 재빠르고 날렵한 사람이었다. 어느 꽃 피는 봄날에 교수는 정택운을 불렀다.
'정부로부터 제안이 하나 들어왔네. 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야. 자네와 내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제안이야.' '…….' '일단 시체 기증을 받아야 하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시체를 빼돌리는 건 법을 위반하는 행위야.' '…….' '난 가능하면 조용하게 이걸 처리하고 싶네. 법을 어길 순 없어.' '…….' '시체가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 '살인은 불법이지만 사람들의 눈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어.'
그러면 자네와 난 돈방석에 앉게 되는 거야. 교수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택운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택운은 곧장 차학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는 이 년 전에 쓰던 것과 같은 번호였다. 이윽고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택운이 시리도록 웃으며 느리게 말했다.
학연아. 보고 싶어. 우리 오늘. 오랜만에 만날까? 물론 밤에.
우린 서로에게 처음이 참 많았다. 그러니까 넌 죽는 것도. 내가 처음이 되어야 해. |
진짜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다 괴짜들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성음이 아버지 마저도...★
절반 넘게 이야기가 진행된 것 같아요. 벌써 열 다섯 편이라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동...
아마 스무 편 정도가 지나면 끝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성음이는 맨날 하는 일이 우는 거밖에 없어... ㅋ...
아... 그리고...
어제 세피철 써 놓고 깜빡 졸아서 잠을 잤는데 꿈을 진짜 이상한 꿈을 꿔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앞으론 낮에 쓰려구욬ㅋㅋㅋㅋㅋㅋㅋㅋ
겁나 무서웠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밤에 보지 마세요... ㅋㅋㅋ 무서운 꿈 꿉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하트) (반함)
현재의 이야기와 과거에 얽힌 이야기가 한 편씩 나올 예정입니다.
과거는 조금 더 이야기가 풀려야 이해가 되실 듯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