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w.로스트
“쥐새끼처럼 어딜 싸돌아 다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김 씨의 신발에 여주가 멈칫, 발을 멈췄다. 분명 지금쯤은 일터에 있어야 할 김 씨의 걸걸한 목소리가 어둠에 잠긴 부엌에서 선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괜스레 온몸의 털이 비쭉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주가 제 손에 들린, 오늘 태형에게서 받았던 안개 꽃다발을 조용히 등 뒤로 감추며 불안감에 입술을 물었다.
“설마, 날 피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런 여주의 손목을 턱, 하고 붙잡은 건 역시나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김 씨의 손이었다.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진 여주의 시야로 마치 사나운 개의 눈을 한 김 씨의 두 눈이 번뜩였다. 김 씨의 손아귀 힘이 억셌다. 여주가 결국 그런 김 씨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바닥 위로 떨어트렸다.
“네가 요즘 웬 사내놈 하나를 만난다고 하던데.”
“......”
“왜. 그놈이랑 도망이라도 치려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드러난 여주의 겁먹은 표정에 김 씨가 이내 증거를 잡았다는 듯 흥미로운 미소를 띠어 보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태형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급격한 두려움이 여주에게로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들었고, 미처 제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 여주가 김 씨에게 잡힌 손을 벌벌 떨며 제 두려운 감정들을 겉으로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그런 거,”
“......”
“그런 거 아니야.”
김 씨는 가끔 도박장에서 도망친 개들을 잡아오는 일로 약간의 돈을 챙기곤 했었는데 지금이 딱 그때의 얼굴이었다. 그런 김 씨의 힘에 복종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여주로써는 그렇게 철장에서 도망치다 목덜미를 잡혀버린 개처럼 곧장 김 씨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태형과의 약속을 생각했더라면 여주는 지금 당장이라도 김 씨의 손을 뿌리치고 태형에게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여주는 절대 그러지도,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두려움이, 단순히 제 눈앞에 닥친 이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 어느 소중한 누군가를 지켜내고 싶다는 간절함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는 것을. 여주는 똑똑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여주는 그저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태형과 함께 있으며 느꼈던 그 모든 감정들을 애써 모른척해야만 했고, 다급히 머릿속을 더듬어 일부러 가장 아픈 말들만을 골라 김 씨의 앞에 내뱉어야 했다. 그런 여주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허공을 헤맸다. 여주의 발 밑에서 한 여름의 이른 눈처럼 바닥에 흩어진 안개꽃들이,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그냥 돈 때문에.”
“여주야.”
여주의 귓가로 아득히 태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정말 단순히 돈 때문에 만난 거였어.”
“여주야.”
이젠 듣기만 해도 가슴속으로 사무치는,
“...정말, 정말로 그뿐이었어.”
“나의 여주야.”
그런 태형의 목소리가.
-
“......”
음소거로 켜져 있는 티브이 속의 뉴스에선 웬 비행기 하나가 바다 위로 추락하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급한 전화라며 태형을 부르는 비서에 태형이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 사이 홀로 방에 남게 된 여주는 소파에 앉아 그 티브이 화면만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잠시 후, 어딘가 한층 가라앉은 얼굴을 한 태형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낮게 잠긴 태형의 목소리가 조용히 여주를 불렀다.
“갑자기 일이 좀 생겼어.”
“......”
“...급히 미국으로 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태형은 어딘가 불안에 떨고 있는 듯했다. 뭔가 정말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지 제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리는 태형의 손이 거칠었다. 그런 태형의 곁으로 자연스레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려던 여주가 이내 주춤거리며 제 발을 멈췄다. 짧은 정적이 이어졌고, 태형이 이내 다시 여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태형의 입을 곧장 가로막은 건 바로,
“설마, 같이 가자는 건 아니죠?”
냉기가 도는 싸늘한 표정의 여주였다.
그런 여주의 표정을 바라보던 태형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져갔다. 총기를 잃은 여주의 두 눈엔 더이상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여주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하는 태형을 보며 여주가 이내 짧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리만큼 갑작스러운, 너무도 낯설기만 한 여주의 태도였다.
“...뭐야. 정말 날 데리고 여길 뜨기라도 할 작정이었던 거에요?”
“......”
“난 못 가요, 절대. 내가 미쳤어?”
태형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런 여주의 얼굴만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태형의 얼굴을 보고도 거침없이 이어지는 여주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날을 세웠다. 여주는 어젯밤 김 씨의 앞에서 내뱉은 자신의 변명들을 태형의 앞에서 보란 듯이 다시 한번 쏟아냈다. 그리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당신한테서 본 건 단순 재력이 전부였다는 말들만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여주의 손으로 끈적한 땀이 배어났다. 하지만 그럴수록 제 주먹 쥔 손을 안으로 더 세게 말아 쥐는 여주였다.
“...상관없어.”
힘이 빠졌다.
“여주 너라면, 나 모른 척할게.”
분명 태형을 상처 주기 위해 악을 써가며 뱉어낸 말들이었으나 그런 여주의 목소리는 되려 태형이 아닌, 여주에게로 다시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히고 있었다.
“...그러니 이용해줘.”
나를.
참으로 미련한 사랑이었다.
-
하늘로 끊임없이 터져 오르는 불꽃이 여주의 좁은 방 안을 비췄다.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침대 위에 앉은 여주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큰 저택 하나를 바라보았다. 불꽃 하나가 터질 때마다 침대 옆의 벽 위로 여주의 왜소한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초여름의 찬란한 밤하늘에 당겨진 화려한 불꽃이었다.
‘15일 새벽, OO 지역 인근 뒷산 부근에서 불법 투견 도박장을 열어 돈을 베팅하는 등 도박을 벌인 이들이 무더기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OO 경찰서는 불법 투견 도박장을 연 A 씨와 그 외 40명을 불구속 입건하였으며…….’
멍하니 창밖의 불꽃을 바라보던 여주가 시선을 돌려 9시 뉴스가 한창인 티브이 화면을 응시했다. 모자이크 처리가 된 탓에 잡혀들어간 사람들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저 가려진 얼굴들 중 어딘가엔 김 씨의 얼굴 또한 끼어있었을 터였다. 도박 현장에서 경찰을 따돌리지 못하고 맥없이 경찰에게 잡혀 수사를 받게 된 김 씨는, 어찌 된 영문인지 여주를 꾸준히 학대해 온 사실까지 드러나게 되면서 경찰로부터 여주에게 접근 금지 명령을 받게 되었다. 누군가 신고 전화를 넣었다고 했고, 때문에 여주는 요 며칠간 경찰서에 들락거리며 긴 수사를 받아야 했다.
-
티브이 전원을 끈 여주가 젖은 수건을 대충 의자에 걸쳐두며 현관에 놓여있던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었다. 여주의 집 철문이 끼이익, 하고 오래된 소리를 냈다. 처음엔 그저 우연히 여주가 학대 당하는 모습을 보거나 듣게 된 동네 주민의 신고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방금 전 창문 너머의 저택 위로 솟아오르는 불꽃을 본 순간,
“.......”
여주는 단번에 제 예상이 틀렸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불꽃이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펑, 하고 터져 올랐다. 막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태형이 철문 밖으로 나온 여주를 바라보며 자연스레 입가로 가져가던 담배를 천천히 아래로 내려 보였다.
“...여주야.”
자그마치 사 년 만에 다시 들려온 태형의 목소리였다. 그런 태형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 하고 저 밑에서 차오른 뜨거운 뭔가가 여주의 가슴팍을 강하게 짓눌렀다.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여주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쓰레기봉투를 철문 앞에 내려놓고는 그 뒤로도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 부르는 태형을 외면해 등을 돌렸다. 잠깐이었으나 한껏 야윈 태형의 얼굴이 여주의 뇌리에 깊게 파고들었다.
“사 년 전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테러를 기억해?”
그렇게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 철문의 손잡이를 붙잡으려던 여주의 손이 덜컥 허공에 멎었다. 갑작스런 태형의 목소리에 여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 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 여주가 태형을 두고 마지막으로 저택을 빠져나오던 그 순간까지도 티브이 속으로 재생되고 있던 미국의 항공기 추락 장면. 여주가 멍하니 태형을 바라보며 사 년 전 그날의 상황을 떠올렸다. 태형 또한 사년 전 여주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비행기 안에, 우리 부모님이 있었어.”
뭔가 불안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인지 조금씩 빨라지던 여주의 심장이 마침내 난동을 부리듯 강하게 뛰어댔다. 여주의 눈으로 빠르게 물기가 어렸고 얼마 못가 참았던 눈물은 여주의 얼굴 위로 죽죽 흘러내렸다. 여주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고 만 것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덩그러니 절벽 끝에 홀로 남아버린 태형을, 여주 저 자신까지 떠나버린다면 정말 아무도 없이 혼자가 되어버렸을 태형을 마침내 철저히 혼자로 만들어 버린 사람이 바로 제 자신이란 것을. 이용을 당해도 좋다는 태형의 그 말은 단순히 사랑에 목매단 한 남자의 미련한 목소리가 아니라,
‘제발 날 혼자 두지 말아줘.’
그와 같은 목소리가 숨겨진 무언의 간절함이었음을.
“정리할 게 많아서 조금 늦었어.”
“......”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고, 나 좀 안아주라.”
응? 여주야.
그럼에도 태형은 아직도 여주를 향해 저렇게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사년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태형의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한 개비에선 여전히 실처럼 얇고 기다란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늘로 터져오르던 불꽃은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지 오래였다. 흘러내린 눈물을 벅벅 닦아낸 여주가 잠시 숨을 고르곤 마침내 그런 태형의 앞으로 발을 옮겨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태형의 눈이 그런 여주를 오롯이 쫓았다. 여주가 태형을 처음 만났던 초여름의 그날처럼, 태형의 손에 쥐어진 담배 쪽으로 제 손을 길게 뻗었다.
“담배 못 피우잖아.”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태형이 손이 조금 더 빨랐고, 재빨리 제 손을 뒤로 빼내며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를 뒤로 내던진 태형이 곧장 제 코앞으로 다가온 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아 그대로 입을 맞췄다. 태형은 사 년 전 여주와 헤어지던 그날, 여주가 저택을 나선 뒤 창문 너머로 보았던 여주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택의 후문을 나서며 오늘처럼 제 얼굴로 넘쳐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닦아내리던, 그런 여주의 뒷모습을.
지독히도 그리웠던 태형의 향기가 여주의 숨결을 타고 여주의 가슴팍으로 가득히 스며들었다.
가히 위대하다 할 수 있는, 태형의 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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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完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맘이 급하니까 더 안써져서 혼났네요..
제가 개츠비에서 따오려던 건 개츠비 그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개츠비의 헌신적인 사랑 이렇게 딱 두 가지였는데요
근데 쓰다보니 대체 그것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네요...
암튼 마지막까지 정말 급전개 클라스...ㅎ
이런 명작을 망쳐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잊어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