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민윤기와 짜고 보기 좋게 나를 엿먹였다. 민윤기는 제 불우한 출생을 알려주는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전정국과 손을 잡았고, 전정국은 좆같게도 나를 좋아한다는 명목으로 민윤기를 이용해먹었다. 민윤기는 일이 바쁘다는 아주 적절한 핑계로 더 이상 집에 식사하러 오지 않았으며 내 번호를 수신 거부하는 것까지 모자라 새 번호를 만드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나는 몇십 번째 전화를 받을 수 없는 민윤기의 음성 사서함에 무수한 욕을 남기고는 비참한 기분으로 울었다. 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모든 짓들은 더한 밑바닥으로 내려가기 위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새아버지는 다시 불친절해졌고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는 건 불가능했으며 그 바쁘다는 민윤기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해 여유로운 미소를 띄운 채로 경영이 어쩌고 따위의 얘기나 내뱉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건 전정국뿐이다. 전정국은 그런 개 같은 짓을 저질러 놓고도 여전히 뻔뻔한 얼굴로 여전히 나와 손을 붙잡은 채로 등교하고 같은 밥을 먹는다. 아니, 어쩌면 제일 많이 변한 것도 전정국이다.
"여주야."
"꺼져."
"학교 가자."
"꺼지라고."
전정국은 냉담한 내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내가 가방을 메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다. 그 빌어먹게 성공적인 연극이 끝난 뒤로 전정국은 제 본모습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이 소유욕만 가득한 그 본성에 어떻게 가슴 절절할 정도로 애끓는 순정파를 연기했는지 이를 악물고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전정국의 어깨 너머로 걱정스레 기웃대는 엄마가 보인다. 씨발. 나는 피곤한 표정을 하고 가방을 집는다. 전정국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내 허리에 팔을 감는다. 엄마가 희미하게나마 웃어보였다. 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전정국의 팔을 거칠게 떼어낸다. 기사 아저씨는 더이상 우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차를 출발시킨다.
"적당히 해, 미친 새끼야."
"왜?"
"그 말이 지금 잘도 나온다?"
"너 지금 바닥이잖아, 여주야."
전정국이 눈을 크게 뜬다. 순한 눈매가 벌어지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다. 네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할 처지가 돼?
"나 이용하라는 거, 거짓말 아니었어."
"......"
전정국이 한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내 턱을 들어올린다. 예전 같으면 순순히 딸려서 올려갔겠지만 지금의 나는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으므로 거세게 저항한다. 전정국은 손가락이 힘에 부치는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 쥐었다. 마주친 눈빛이 차갑고 뜨겁고 끈적하다.
"나는 몇 번이고 기회를 줬어."
"......"
"민윤기 눈에 들기 위해서든 뭐든 나를 이용하라고."
"......"
"그런데 네가, 그 기회를, 차버린 거고."
"......"
"그래서 선택한 게 바닥이면 너무 우습잖아, 여주야."
전정국은 가장 좆같은 구절을 부각시키며 또박또박 내뱉는다. 붙잡힌 얼굴이 쓰라렸다. 동시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전정국은 아직도 내가 바닥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틀려도 한참 틀렸다. 내 보잘것없는 야망은 민윤기의 거짓 통화를 도청하는 순간 박살났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난 뒤 처음으로 전정국의 눈을 똑바로 마주본다. 한없이 순수하고 맹목적이만 하던 눈동자는 여전히 맹목적이었지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탁해졌다.
"정국아."
"....."
"넌 내가 아직도 주제도 모르는 주제에 날뛸 거라고 생각해?"
"......"
"나, 이제 닥치고 살 거야. 인정받겠다 뭐다 이런 멍청한 짓 다시는 안 해. 어차피 너도 이런 거 원하고 민윤기랑 짜고친 거 아니야? 얌전히 네 옆에 붙어있는 거."
"......"
"원한다면 할게. 지금 키스할래? 사랑한다고 할까?"
"......"
"네가 하라는 대로 입 닥치고 할 테니까, 그러니까 너도 내 성질 긁지 마. 이 씨발 새끼야."
나는 웃으며 내 얼굴을 감싼 전정국의 손을 마주잡는다. 전정국의 표정이 굳어진다. 기사 아저씨는 우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몇 달 전의 나는 정말 주제를 몰랐으므로 내가 갈 수 없는 곳을 가고 싶어했다. 내 잘못은 그것뿐이었으므로 목표를 바꾸면 되었다. 애초의 내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사는 것. 그게 나의 목표였고 애초의 내 위치는 바닥이었다. 근본 없는 더러운 출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까지만 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부터 나는 철저히 전정국에게 이용당하고 또 전정국을 이용할 생각이다. 민윤기 때처럼 미친개처럼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지 않는다. 두 번 실수는 없다. 전정국 쪽으로 체중을 실어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전정국이 원하는 바닥이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더 싸구려처럼 굴 수 있다.
"정국아."
"......"
"나 네 말대로 이제 바닥이야."
"......"
"바닥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줄게.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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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두 번이나 올라가서 겁나 놀랐네요 워;;;;;; 늦어서 죄송합니다 달려보아요 시즌 2는 내용이 이어지지만 스토리는 많이 다릅니당 서브도 달라요 이번에는 끝까지 책임감 있게 완결해보겠읍니다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