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신드롬. 전무후무한 재능의 소유자. 정국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모두 그런 것들이었다. 천재 혹은 영재, 그것도 아니면 수재라는 말은 정국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에게 잘 어울렸다. 지휘자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길을 따랐다. 어릴 때부터 콩쿠르란 콩쿠르는 모두 휩쓸고 다닌 정국은 세계 대회까지 재패하며 대한민국 예술계의 자존심으로 불렸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울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의 열정적인 팬 중 한 명은 정국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마다 그의 손이 건반이 아닌 제 마음을 내려치는 것 같다고 엉엉 울며 인터뷰했다. 이어서 쭉 이어져 나오는 엘리트틱한 정국의 생애를 지루하게 관망하던 여주가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리모컨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다. 쏟아져 나오던 박수갈채가 뚝 끊겼다. 잠시 거실 한가운데 황망히 서 있던 여주가 악보집을 들고 현관의 손잡이를 잡았다, 열었다. 문이 열리고 이내 다시 닫혔다. 안타깝게도 여주는 정국의 연주를 듣고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그 단 한 명이었다.
"한여주 교수님?"
"네."
"도련님은 저 안에 계세요. 매일 레슨 하실 때마다 저기로 가시면 되고."
여주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물러나는 가정부를 속으로 마음껏 비웃어주었다.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닌데 도련님이라는 극존칭까지 붙여가는 꼴이 우습다며. 이 집에서는 제가 이 가정부보다 질 낮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발악이었다. 신경질적인 소나타 소리로 보아 정국의 어머니는 집에 있음이 분명한데도 나오지 않았다. 제 아들이 그를 가르치고 싶어 안달이 난 내노라하는 지휘자들과 피아니스트들을 거부하고 여주를 선택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임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주는 이름을 대면 한참을 생각해야 알 것 같다는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대학의 피아노과 교수였다. 바꿔 말하면 신문의 예술 1면을 밥 먹듯 장식하는 정국을 가르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라는 뜻도 되었다. 그러나 정국은 기어이 연고도 없는 그녀에게 레슨을 받아야겠다고 부득불 우겨댄 끝에 여주를 이 자리에 오게까지 만들었다. 여주는 가방 안에 들어 있을 담배를 피워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가정부가 '저 안' 이라고 칭한 긴 복도 끝에 방음 처리가 훌륭하게 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반가워요. 한여주예요."
"알아요. 교수님 유명하시잖아요."
여주는 화장기 없는 수수한 정국의 얼굴에 머리를 넘기고 꽃다발을 든 채 웃던 기사사진을 덧씌워보았다. 사진과 달리 앞머리를 내려 반쯤 가려진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직접 마주한 정국은 사진이나 영상 같은 것들보다 좀 더 유약해 보이고 그 또래 소년 같은 느낌도 났다. 여주는 외모 감상은 적당한 선에서 마치고 제가 여기에 온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악보집을 펼쳤다.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던 정국의 눈동자에 얼핏 비웃음이 스쳤다. 오선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한 음표로 채워진 악보였건만 이미 일곱 살 때 완곡을 끝낸 정국에게는 우스울 정도로 쉬운 수준이었다.
"한 번 쳐 볼래요?"
"예, 교수님."
정국은 여주의 무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최대한 서툴게 치기 시작했으나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손에 부질없는 노력만 한 셈이 되었다. 정국은 5분 짜리 연주를 3분만에 마쳤다. 악보를 넘겨주던 여주의 손이 수치스러워서인지, 창피해서인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굳이 보지 않아도 얼굴 또한 잔뜩 열이 받아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을 찢듯 넘긴 여주는 정국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악보집을 집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 미안해요."
"뭐가요, 교수님?"
"내가 학생 수준도 모르고 곡을 골랐네."
"괜찮아요. 전에 왔던 교수님들도 다 그랬어요."
정국은 나름 여주를 위로한답시고 건넨 말이었지만 그 밑에 깔려있는 미세한 비웃음을 여주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가방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떨어진 악보들을 집어 갈갈이 찢어발긴 후 저 잘난 낯짝에 집어던지고 싶었으나 정작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애꿎은 가방만 쥐어뜯는 것밖에 없었다. 정국은 저를 버리고 간 부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여주를 바라보았다. 여주는 눈을 뜨고 그 시선을 똑바로 받아치는 대신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휘둘려서는 안 된다.
"교수님."
"......"
"근데요."
"......"
"말 편하게 하시면 안 돼요?"
"......"
"오래 볼 사이잖아요, 저희. 오늘 레슨은 제가 아파서 일찍 끝내달라고 했다고 말씀드릴게요."
"......"
"아. 다음부터는 악보 준비 안 하셔도 돼요."
정국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숙여 악보집을 주워 건네는 성의까지 보였다. 물론 여주가 받지 않을 걸 알고 있었으므로 정국의 손은 내미는 대신 곧장 그녀의 가방으로 향했다. 구겨지고 상한 악보 뭉텅이들이 가방 속에 마구잡이로 쑤셔넣어졌다. 여주의 목울대가 분노로 울렁였다. 그 분노가 내뱉어지기도 전에 정국이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 윗층에서는 여전히 그의 어머니가 연주중이었으나 곡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왈츠를 들으며 여주는 차원이 다른 비참함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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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넘 늦었는데 우가도 안 쓰고 또 이상한 걸 들고 와서 죄송합니다... ㅠ 드라마 밀회를 안 봤지만 대충 제목이랑 줄거리만 따 왔읍니다 요새 치명적인 정국이가 글케 조크든요 그리고 제 모고 등급 실화냐???????????????????? 페스타 실화냐????????????????????????????????? 그럼 20000 쫀 주말 보내세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