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트라이앵글 2
written by. 글리아
교수님이 분명 열정을 다해 강의를 진행하신 것 같긴 했는데, 나는 조금도 집중할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여자들이 설레는 순간 top 10에 있던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을 때'를 보면서 개도 아니고 왜 저게 설레?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욕하느라. 등신아, 엄청 설레거든.
그리고, 살짝 눌려 시야를 가린 앞머리 사이로 보이던 다니엘 오빠의 미소가 자꾸 생각이 났고, 너도 예뻐. 라고 말하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도 자꾸 들리는 것 같았고, 앞자리에서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는 오빠의 듬직한 어깨와 등은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고. 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강의를 듣죠, 교수님?
툭.
내가 자꾸 멍 때리고 있는 걸 봤는지, 교수님이 판서하시는 틈을 타 박지훈이 내 어깨를 툭 친다. 아, 방금 오빠랑 손을 잡는 상상으로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는데. 왜 치고 난리야. 어깨를 으쓱이며 박지훈과 눈을 마주치자, 살짝 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입모양으로 말한다. 근데 쟤는 저런 표정을 지어도 잘생기고 난리. 코찔찔이 시절부터 다 봤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잘생긴 건 잘생긴 거다.
' 강의 들어. '
참나. 자기가 언제부터 내 학업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고? 솔직히 말하는 건데, 내가 유일하게 박지훈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공부였다.
어딜 가도 예쁨 받는 성격과 외모 탓에 지훈이에겐 늘 사람들이 몰렸고,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천성인 박지훈은 그들 모두와 우정을 쌓느라 공부가 뒷전인 녀석이었다. 근데 이기적인 박지훈은 늘 내가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걸 질투했다. 자기는 친구 존... 매우 많으면서.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박지훈 없는 대학을 가서 연애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멋진 대학생이 되는 것이 꿈이 되었던 것이다. 일단 박지훈이 있으면 곤란할 것 같았다. 박지훈이랑 다니면 다 박지훈을 원하니까.
근데, 고2 때까지 탱자탱자 놀기만 하던 녀석은 내가 전교 2등을 하자 갑자기 그날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늘 공부를 하던 나와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같이 하느라 중위권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었는데, 어느새 성적이 쑥 올라버린 나를 보고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 야, 너 뭐야? 왜 전교 2등을 해? '
' 나는 지훈아, 너랑 다른 대학을 갈 거야. 가서 화장 빡세게 하고 연애하고 친구 사귀고 다 할 거야. '
하여튼 저 새끼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는 꼴을 못 본다. 도대체 무슨 심보야? 아니면 지도 친구 만들지 말고 나랑만 놀아주든가. 그것도 아니면서.
" 오늘 강의는 좀 빨리 마치겠습니다. 강의 오티 때도 말했지만, 중간고사 전에 팀 프로젝트가 있다는 거 아실 겁니다. "
" 아.... "
" 반장으로 지원한 강다니엘 학생에게 팀을 꾸려 이름을 적고 가시면 되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강의 게시판에 올려두겠습니다. 이상, 마칩니다. "
팀 프로젝트에 놀란 가슴, 강다니엘 이름으로 진정되는구나. 교수님이 나가심과 동시에 친한 동기들과 선배들이 서로 모여 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전공 수업이라 친한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듯했다. 대부분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심 다니엘 오빠와 하고 싶어 하는 듯 힐끔힐끔 오빠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다. 내가 계속 보고 있으니까. 오빠는 우선 먼저 온 사람들 위주로 열심히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다. 박지훈은 전공 책을 덮고 여전히 넋이 나가있는 내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 보인다.
" 너 오늘 진짜 이상하네. 아, 늘 이상했나. "
" 너는 오늘 진짜 맞는 말만 하네. "
아까부터 깐족, 깐족. 열심히 태클을 걸어대는 게 얄미워 두 손가락으로 팔을 살짝 꼬집었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킥킥 웃는다. 그러다 대충 주위를 휘 둘러보다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동기 박우진과 눈이 마주친다. 늘 무표정하게 술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성격을 가늠하기 힘들었는데, 웃을 땐 꽤 귀엽다. 나랑 같은 과(아웃사이더)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친한 사람도 많은, 성격 좋은 녀석이었다. 지훈이가 우진이를 한번 가리키고 우리 둘을 다시 가리키며 OK? 하고 바디랭귀지를 하자, 우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제 한 명 남았는데, 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아예 몸을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 오빠와 눈이 마주친다. 헉, 깜짝이야.
" 지훈아, 형이랑 같은 조 할래? "
" 어, 예. 형. "
박지훈. 사랑한다.
오늘 하루는 네가 더 깐족거려도 어여쁘게 대해줄 테야.
.
.
모든 학생들의 팀 꾸리기가 완료된 후, 우리는 우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 주제를 정하고 강의 게시판에 그 주제를 선점해두어야 했기 때문에. 하지만 과제도 식후경, 우선 음료를 시키기로 했다. 2층으로 올라가 창문 쪽 테이블에 가방을 두고, 다니엘 오빠가 노트북을 꺼낸다. 와, 손이 크니까 노트북이 엄청 작아보이네. 아무래도, 내가 변태가 된 게 틀림이 없다.
" 뭐 마실래?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셔야겠다. 여준이는? "
" 아, 저는. "
" 아이스 초코. "
아직 커피의 맛을 깨닫지 못한 내가 매일 아이스 초코만 먹는 걸 아는 박지훈이 대신 대답한다. 다니엘 오빠는 나와 지훈이를 번갈아 보며 오, 하는 입모양으로 고갤 끄덕였다. 우진이는 한참 메뉴판을 들여다보곤 아이스 바닐라라떼를 골랐다. 내가 주문해서 나의 똘똘함을 오빠에게 어필해야겠다. (별걸 다 어필함)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 초코 하나, 아이스 바닐라라떼 하나. 야, 너는. "
" 난 너랑 같은 걸로. "
" 웬일이래? 초코 달다고 싫어하는 놈이. "
" 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오늘은 먹어야겠어. "
평소에도 안 깐족거린 건 아니지만 오늘 유독 심하다. 내가 어제 그렇게 꽐라였나. 그래서 힘들었나. 하지만 다니엘 오빠와 같은 조가 되게 해준 귀한 몸이기 때문에 착한 내가 참기로 했다. 어쨌든 고개를 끄덕이곤 카운터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감싼다. 뭐여, 박지훈인가?
" 여준아, 여기 계단 높더라. 조심. "
" 헉, 오빠. 깜짝이야... 저 혼자 다녀와도 되는데. "
" 아니야, 나 원래 쟁반 드는 거 좋아해. "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래요. 하지만 오빠가 날 위해 따라와 주었다는 건 틀림이 없었다. 진짜 스윗하네, 이 오빠. 박지훈은 친구란 놈이 안 따라오고 뭐...
... 어? 뭐야, 쟤 왜 째려봐? 얼핏 본 거긴 하지만 지훈인 분명 이쪽을 노려보았다. 계단을 내려가느라 금방 고개를 돌렸지만,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옆에서 다니엘 오빠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잊혔다. 뭐 때문에 삐진 건가 싶지만, 그것도 피시방비 한번 쥐여주면 다 풀릴 일일 것이다. 박지훈은 그랬다, 여태껏. 나한테 큰소리 한번 낸 적 없고, 서운하다 말한 적 없던. 내 유일한 친구.
" 너랑 지훈이가 고등학교 친구라고 했나? "
" 20년 지기요. 부모님끼리 친구라서. "
" 뭐? 그렇게 오랜 친구였어? 와, 어쩐지. "
오빠는 진심으로 놀란 듯, 내가 주문을 하는 그 순간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나와 지훈의 인연을 들으면 하나같이 저 반응이었지.
지훈이랑 친해서 부럽다고 하고. 그러면 난 늘 어색하게 좋긴 뭐가 좋아. 하고 웃어넘겼었다. 주문을 마치고 카드를 내려는데 옆에서 불쑥 카드가 내밀어진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슬쩍 쳐다보니 오빠가 씩 웃는다. 가볍게 내 머리를 도닥이면서.
" 20년 지기 친구한테 이기려면 이 정돈 사야지. "
모태 솔로인 김여준 오해하게 만들기 딱 좋은 발언을 덧붙이면서.
농담인지도 모를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모태솔로가 여기 있습니다. 예...
" 감사해요, 오빠. 제가 다음에 밥 살게요. "
" 어, 그래? 감당할 수 있겠어? 나 엄청 먹는데. "
" 이럴 때를 위해 제가 돈을 모아온 것이 아니겠어요? "
내 말에 오빠는 또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제보니, 이게 오빠의 버릇인 것 같았다. 아주 설레는 버릇.
음료가 나오고, 오빠는 자연스럽게 쟁반을 들고 먼저 계단을 오른다. 내가 잘 올라오고 있나 계속 살피면서. 아기가 된 것 같은 이 기분, 아주 좋다. 맨날 박지훈한테 사내놈 취급 당했었는데. 나와 오빠가 돌아오자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우진이와 지훈이가 벌떡 일어나 우리를 맞이한다. 정확히는 음료를.
" 오빠가 사주셨어. 감사하다고 말씀하시죠. "
" 역시, 완벽한 우리 형님. 마음도 잘생겼습니다. "
" 고맙다, 지훈아. 과제 끝나면 술도 살 테니까 그때까지 더 좋은 칭찬을 생각해 두도록. "
" 알겠습니다, 형님. "
아무튼, 내 친구지만 능청스럽게 사람 기분 좋을 말을 잘한다. 저러니까 예쁨을 받지. 자리에 앉아 음료를 나눠 마시고, 오빠가 노트와 펜을 꺼냈다. 오빠는 미리 뽑아둔 과제 설명 안내문을 한 부씩 우리에게 돌린 뒤, 찬찬히 읽으며 어떤 방향으로 과제를 수행하면 좋을지를 말해준다. 볼펜으로 이따금씩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그게 또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다. 이 오빠는 웃을 땐 아기 같고, 진지할 땐 섹시하다. 그러니 내가 안 반해?
" 주제는 뭐가 좋을까. "
강다니엘의 일생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오빠. 저 정말 궁금한데요.
" 놀이공원 비교 어떨까요. 한 세 개 정도 다니면서 비교하면 좋을 것 같은데. "
나와 오빠가 음료를 주문하는 동안 먼저 대화를 나눴나 보다. 우진이가 지훈이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놀이공원?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안 가봤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설레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오빠를 쳐다보자 오빠가 나를 한번 보더니 피식 웃는다. 아, 저 오빠 그만 좀 웃으라고 해주세요. 심장이 계속 쿵쿵거려서 집중을 못하겠어요.
"여준이가 놀이공원 가고 싶은 것 같다. 그럼, 그렇게 하자. 놀이공원은 인기 좋으니까 빨리 글 올리는 게 좋겠네. "
오빠는 말을 마치고 바로 노트북을 꺼내 강의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다행히 먼저 올린 조들과 겹치지 않는 주제였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가 공강인 금요일에 우선 함께 모여 놀이공원에 가기로 약속을 잡고, 과제의 큰 윤곽을 잡아둔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는 마지막까지 젠틀하게 쟁반과 빈 컵들을 정리해 카운터에 갖다 두셨다. 나의 똘똘함을 어필하고 싶었는데, 오빠의 젠틀함이 어필되고 말았다.
" 자, 그럼 이제 같이 저녁이라도. "
" 아, 형. 오늘 저랑 여준이랑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요. 다음에 제가 저녁 살게요. "
" ... 그래? 아쉽네. 우진이는 형이랑 밥 먹을래? "
" 예, 저는 좋습니다. 형. "
아니, 나랑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어? 없어요, 없습니다. 나도 오빠랑 저녁 먹을래.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박지훈이 좀 세게 내 어깨를 감싸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살짝 울상 지으며 오빠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오빠와 우진이가 함께 가는 모습을 지켜보려는데, 지훈이가 내 손을 잡아 끈다.
얘 오늘 진짜 이상하네.
" 야,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는데? "
" 오버워치. "
박지훈 사랑한다는 말 취소.
얘를 진짜 어떡하지? 내가 주먹을 웬만하면 안 쓰고 싶었는데.
" 너랑 형이랑 더 붙어있으면 안 될 거 같아서. "
" 뭐라고? "
" 못 들었으면 말고. 오늘 피시방비 네가 내는 거다? "
박지훈이 낯설다. 20년 동안 못 봤던 표정을 요 며칠간 자꾸 보인다.
이상하다 생각할 틈이 없게 지훈이는 빠르게 피시방으로 날 잡아끌었다. 뭐...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내가 같이 게임 해준다.
넌 이런 친구 둔 걸 고맙게 생각해야 돼, 지훈아.
***
둔탱이 친구를 둔 걸... 고맙게...
요즘 제가 우진이에게도 치여서 우진이를 살짝 등장시켜보았습니댜...ㅎ 동기 이름으로 몇명 더 등장할지 몰라효..ㅋㅋㅋㅋ
사실 어제 글을 올리고 싶었는데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확실히 글이 좀 막히더라구요 ㅠㅁㅠ 흑흑 재밌게 써서 가져오고 싶은 이 마음...
하지만 댓글 하나하나 다 읽으면서 힘 많이 얻었습니다! 다들 넘 감사드려요... 초록글까지.. ㅠ^ㅠ.. ♥
여러분 읽으시면서 예쁜 얼굴도 보시라고 제가 짤도 열심히 줍고 있답니다.. ㅎ 목요일이 됐으니 내일은 드디어 프요일이네여ㅠㅠㅠㅠㅠ 신난다..
아무튼 저는 여기서 물러갑니댜... 사랑합니다 S2
추신. 조별과제는 사회악입니다. 그래서 조별과제 부분은 훅훅 넘어갈 겁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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