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트라이앵글
written by. 글리아
비상, 비상. 만사태평이던 지훈의 머릿속은 요즘 온통 비상이란 단어로 가득찼다.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여기는 여주의 상태가 핑크빛이었기 때문이다.
여주는 캠퍼스에 딱 들어가는 순간부터 항상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러다 저 혼자 깜짝 놀라 수줍게 미소 짓는다.
여주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항상 한 사람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역시도 여주를 어떻게 찾았는지 늘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했다.
강다니엘.
지훈은 초조해져 입술을 물어뜯는다. 같은 사내로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강다니엘이 김여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차라리 아주 별로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불안해할 필요도 없이 못 만나게 내가 잘라낼 수 있는데. 지훈의 꿈은 외모에 성격까지 완벽한 다니엘 앞에서 무너져버렸다.
사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여주를 좋아하는 남자는 꽤 많았다.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달라는 남자들의 요청을 죄다 잘라버린 박지훈 덕분에 몰랐을 뿐.
지훈은 그땐 그냥 나랑 제일 친해야하는 친구가 다른 친구랑 친해지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순수한 소유욕으로 시작한 감정이었다.
좋아한다는 게 무슨 감정이야? 그걸 몰랐던 지훈이 사랑에 눈을 뜬 건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바로 지난 주까지도 찬바람이 불고 춥다고 느꼈는데 한 주 사이에 대낮부터 27도를 웃도는 한여름 날씨가 되었던 날.
지구가 아프다, 지구가 아파. 하며 여주네 집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던 지훈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김여주 하복 입었... ...
지훈은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다지 덥지 않다고 느꼈는데 갑자기 확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그 날을.
하복을 입은 여주의 모습이 지금까지 살면서 본 여자 중에 가장 예쁘다고 느꼈던 그 날을.
지훈은 그제야 알았다. 왜 여주가 다른 남자와 친해지는 게 싫었는지, 왜 여주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쓰였는지.
여주는 친구였지만 친구가 아니었다. 여자였다.
그걸 깨닫고도 자꾸만 의식한 행동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평소처럼 지내는데, 여주가 자기를 떠나 대학을 가고 싶다는 충격 발언을 내뱉는다.
공부 진짜 싫어했는데, 18년을 붙어있던 여주와 진짜로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코피 터지게 공부했고, 결국은 여주와 같은 대학까지 왔다. 대학에 왔으니 이제 연애, 그런 것 좀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주와. 멋진 고백 멘트도 많이 생각해두었었다.
" 진짜, 짜증 나... "
지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머리를 헝클였다. 속이 상해도 보통 상하는 게 아니다. 내가 어떻게 지켜온 여잔데.
" 지훈아. 술 먹자. "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술, 그렇지. 고뇌와 고통엔 술처럼 좋은 친구가 없지. 우진은 지훈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 흡족한 듯 엄지를 내밀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동기 진영과 대휘가 같이 먹자며 끼어든다. 술 먹을 생각에 의기투합한 남자들 사이로 여주가 들어와 지훈의 옆자리에 앉는다.
가방을 내려 놓고 필기도구를 꺼내면서 넷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본다. 너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 김여주, 너도 껴라. 동기 술자리 함 갖자. "
같은 조가 된 후로 친해진 우진이 자연스럽게 여주에게 묻는다.
지훈이 어? 여주는 좀, 하고 말하려는데 이미 술자리의 즐거움을 알아버린 여주는 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 콜. "
" ... 가시나, 남자애들 밖에 없는데 좀 망설이기라도 해라. "
" 너 있는데 뭐가 문제죠?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
여주의 말에 대휘와 진영이 환호성을 지른다. 이렇게 털털한 성격인 줄 몰랐네. 마음에 든다, 김여주! 하며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웃는다.
이미 술을 한 병씩 한 것 같은 텐션이었다.
아, 멍청아.
내가 문제라고, 내가.
지훈에 대한 신뢰로 가득한 여주의 표정을 보는 지훈은 괜히 씁쓸해졌다.
.
.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술이 들어가기도 전에 들떠버린 다섯명의 분위기는 금방 뜨거워졌다. 특히 제일 신난 건 여주였다.
애초에 고민 좀 잊으려고 시작한 술자린데 너무 신이나서 자꾸만 술을 마시는 여주 때문에 지훈은 정작 제대로 못 즐기고 있었다.
" 너 왜 이렇게 마시는데. 내일 속 다 뒤집어진다? "
" 내일의 걱정은 내일로 미룰래. 마시고 할 거야... 내가 할 거야... "
" 뭘 한다는 거야, 도대체. 야, 배진영. 잠깐만. 얘 빼고 술 따라 봐. "
" 알았어! 나! 화장실 다녀와서 다시 달릴게! 기다려, 내 동기들! "
여주의 객기에 다시 지훈을 제외한 셋의 환호가 터진다.
살짝 비틀대며 일어나는 여주를 지훈이 급하게 따라 일어나며 어깨를 감싸지만 여주는 단호한 표정으로 혼자할 수 있느니라. 라는 이상한 말투를 남기고 화장실로 향했다. 진짜 김여주, 사람 정신 못 차리게 하는데 뭐 있다. 본인은 모르지만.
지훈은 여자화장실로 걸어가는 여주를 걱정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다 우진이 건넨 술잔을 받았다. 금방 오겠지, 뭐.
" 다니엘... 다니엘 오빠... "
화장실에 들어가 눈 밑에 살짝 번진 아이라인을 티슈로 닦아내던 풀린 눈의 여주는 문득 보고 싶어졌다. 다니엘이.
술에 취했을 땐 일단 생각이 들면 하고 본다. 그게 참 위험한 건데. 해도 되나, 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 같은 건 어지러운 머리로는 판단이 안 서는 법.
여주는 카톡으로 다니엘을 찾아, 프로필 밑에 있는 전화번호를 보고 충동적으로 전화를 누른다. 술기운 때문에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통화연결음을 듣다가,
잠깐 연결음이 끊기고는.
" 여주? "
조금 당황한 듯 다급하게 받는 전화. 낮고 허스키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오빠... "
" 어, 여주야. 왜? "
다니엘은 굉장히 당황했다. 평소 따로 연락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무슨 일이지. 심장이 답지 않게 쿵쾅거렸다.
여주의 조금 남아있는 이성은 미쳤어, 지금 전화를 걸었어? 하고 난리가 났지만, 이미 여주는 꽤 취해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 보고 싶어요... "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고,
" ... "
한참을 답이 없던 다니엘은 벌떡 일어나 제 자취방을 나선다.
" 어디야? 내가 갈게. "
.
.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여주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지훈은 조금 상기되어있는 듯 보이는 여주를 이상하게 쳐다보다 물을 따라 건넨다.
여주는 두손으로 받아들어 꿀꺽꿀꺽 마시고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 김여주, 괜찮아? 힘들면 집에 갈래? "
" 아니... "
" 너 많이 취했어. 이대로 들어가면 나 너희 엄마한테 혼난다. 나가자, 어? "
" 올 거야. 다니엘 오빠. "
뭐?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이름이 나오자 지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이름이 나온 것도 모자라서, 온다고? 지훈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니엘이 온다며 좋아했다.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새로 술잔과 수저를 셋팅하고, 맛있게 먹은 안주 하나를 추가로 시킨다. 지훈만 빼고 모두가 신났다.
지훈은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서 죽을 맛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셋은 취해서 지훈의 표정에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당장, 여주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오늘 다니엘과 여주가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것도 큰일. 아주 큰일.
딸랑.
출입문이 열렸다. 지훈의 심장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 와, 다니엘 형! "
" 아이고, 많이도 마셨네. "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다니엘이 들어와 대휘와 우진, 진영에게 인사를 한 후 자연스럽게 여주와 눈을 맞춘다.
여주는 취해서 살짝 벌어진 입술에 풀린 눈으로 다니엘을 향해 손을 흔든다. 오빠다. 오빠다. 다니엘을 보니 웃음이 난다.
여주쪽을 바라보느라 등을 돌리고 있던 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표정관리가 안 되는 터라, 무표정으로 다니엘과 시선이 겹쳤다.
지훈이 표정이, 많이... 힘들어 보인다.
다니엘은 살짝 웃으며 지훈에게 인사를 건넨다. 지훈은 예. 하고,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형, 여기 앉으세요. 하고 우진이 제 옆자리를 가리켰지만 다니엘의 시선은 오직 여주를 향해 있었다.
여주 옆자리로 가려면 지훈이가 비켜줘야했다. 지훈의 옆에 선 다니엘은 살짝 지훈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 지훈아. 나 여주 옆자리에 앉을게. "
" ... "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여주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보고 싶었다. 매일. 같은 수업이 있는 날은 전날부터 설렜다. 수업이 없는 날은 만날 이유가 없어 힘들었다.
그랬는데, 보고 싶다고 했다. 박지훈이 아니라, 다니엘이.
지훈은 평생 이 날을 잊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제 스스로 여주의 옆자리를 넘겨주게 된 이 날을.
" 여주야, 괜찮아? 많이 취했어? "
다니엘은 지훈이 자리를 비켜주자마자 여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여주는 무거운 머리를 잠깐 다니엘의 어깨에 기댄다.
다니엘은 여주가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쳐 앉는다. 조금 더 가까이에 앉아서. 지훈은 아무말 없이 다니엘의 맞은 편에 앉아 저 혼자 술을 따라 마신다.
우진과 대휘, 진영은 아무리 바보라도 이 분위기가 어떤 분위긴지 모를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바삐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그러다 대휘가 먼저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난다.
" 이제 그만 가야하지 않을까요? 우리 곧 시험이기도 하고. "
" 그래, 그게 좋겠다. 나도 아버지가 부르시네. "
" 일어납시다, 예. "
순서대로 대휘, 진영, 우진이었다. 다니엘은 난처한 듯 웃으며 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우진에게 건넨다.
형이 살게, 계산하고 와.
한사코 거절하며 됐다는 후배들을 타일러 결국 제 카드로 계산을 하게 한 다니엘은 먼저 나가있으라고 한 뒤, 여주의 양 볼을 잡고 고개를 들게 한다.
볼이 뜨거웠다. 취해도 무척 취한 모양이었다.
" 여주야, 집에 가자. 데려다 줄게. "
" 나 집에 가기 싫은데... 오빠랑 더 있을래요. "
" ... 그런 말은 막 하는 거 아니고. 가자. 일어날 수 있겠어? "
지훈은 다니엘과 여주를 빤히 쳐다보다 먼저 술집을 나간다. 속이 타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더 죽을 맛이었다.
여주가 다니엘을 쳐다보는 눈빛이 저가 여주를 쳐다보는 눈빛과 같다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어쩌면 여주 본인 보다도 지훈이 먼저 알았을 것이다. 여주가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걸.
지훈은 그래서, 그걸 알아서. 누구보다 잘 알아서 막을 수가 없었다.
늘 여주의 집에 데려다주는 건 자신의 일이었는데, 그걸 욕심낼 수 없어서 슬펐다.
근데 여주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애처럼 막아설 수 없었다.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는데, 여주야.
두 사람에겐 시작의 밤, 한 사람에겐 슬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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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너무 늦었죠... 독자님들 죄송해요 ㅠ_ㅠㅠ_ㅠㅠ_ㅠ 저는 덕심이 불타야 글도 나오는 그런... 그것이라(?)... 프듀 끝나고 정신차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다시 타오르는 덕심으로 다음편을 가지고 왔습니댜 ㅠㅁㅠ 오늘은 좀 길게 써보았는데... 분량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사옵니댜...
[미리보기로 다시 보니까 왜 짧아보이는 걸까요...? 쓸 땐 매우 길다고 생각했는데.. ^_ㅠ]
늦게라도 댓글 달아주신 독자님들 너무 감사해요 싸랑해요... 정말 글도 엉망인데 예쁘게 봐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고..ㅠ_ㅠ
다음편도 열심히 빠르게 써오겠습니다! 그때까지 감기 조심하세요! ♥
답글은 암호닉 독자분들께만 달겠습니다!
하지만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다 읽고 있어요 너무 감사해요ㅠㅠㅠㅠ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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