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일째였다.
너는 5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시간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쯤되니 출근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데 그게 출근이지 뭐야.
"주문하시겠어요?"
"..."
"..손님?"
"저기..."
"..?"
"이름이 뭐에요?"
내게 이름을 물어온 너의 귀는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매일 네가 마시는 딸기 바나나 주스처럼.
반존대하는 연하남이 설레는 이유
01
w. 갈색머리 아가씨
"중간고사는 이 조별과제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학생들의 야유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도 한숨을 내쉬며 교수를 바라보았다. 졸업을 하기 위해서 꼭 들어야 하는 필교(*필수교양) 수업이었다.
그런 수업에서 중간고사가 조별과제라니...
생각만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나마 다행인건 조가 미리 정해져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조에 들어가야할까 눈치를 보다 적당히 들어가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떻게 보면 이게 제일 공평하게 조를 짜는 거이기도 하고.
"수업이 수업인만큼 당연히 팀워크도 채점 기준에 들어갑니다."
"..."
"요즘 무임승차다 뭐다 말이 많은 거 같던데..."
"..."
"조장이 조원들을 잘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이상."
최악이다.
저 말은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른 조원들까지 싸그리 점수가 깎인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최악이야. 입술을 깨물며 가방에 책을 집어넣었다. 교수가 칠판에 붙히고 간 종이에는 조원들의 이름이 적혀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각자 자신들의 조원을 확인하려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좀 빠지면 나도 가서 확인해야지. 많은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학교를 다닌지 2년이 지났고 이제 3년째인데 어째 다 처음보는 얼굴들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교양과목이다보니 과도 각자 다르고 나 자체가 그렇게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 흔한 동아리 하나 하지 않는 거 보면 답 나오잖아.
나 포함해서 여자 둘에 남자 하나.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조원이 총 4명이라고 들었는데..."
"아. 화장실 간다고 하더라."
"..."
언제봤다고 반말이야?
"우선 조장부터 정할까?"
"..."
"우선 나는 발표 못해."
"..."
"저도 발표는 좀... 피피티도 만들어본 적 없어서..."
최악이다.
남자와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턱을 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지금 저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조장할래?"
"발표 괜찮아요?"
조장이나 발표 떠넘기려는 거겠지.
이런 식으로 대놓고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려는 사람들은
"조장이고 발표고를 떠나서..."
"..."
"왜 다짜고짜 반말이에요?"
"어?"
"초면인데 왜 다짜고짜 반말이냐고요."
"에이. 신입생인데 뭐..."
"누가 신입생인데?"
"... 네?"
정말인지 질색이었다.
"문예창작과 3학년 성이름입니다. 통성명도 안하고 바로 역할부터 정하려고 했어요?"
"..."
"..."
"다들 급한 거 아는데 이름이랑 연락처 등등 말하는 게 우선이죠. 오늘 하루만 보고 안 볼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패디과 2학년 민영훈입니다."
"국문과 1학년 김선미에요..."
"..."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
"그럼 선배가 조장하면 안돼요?"
"싫어요."
"선배가 아무래도 가장 조장이나 이런 것도 많이 했을테고..."
"미안하지만 조장할 여유가 안돼서요. 전공 과제가 너무 많아서요."
"..."
그럼 발표라도...
정말 어떻게 해서든지 떠넘기고 싶은 건가.
역시나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자료 정리하는 걸 맡기면 인터넷 네이버만 그냥 창으로 긁어서 보낼 것이라는 게.
과 특성상 노트북은 매일 들고 다니는 나였다.
자료 정리와 ppt를 맡는 것이 내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화장실 다녀오느라고..."
뒤에서 꽤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패디과 1학년 황민현입니다."
너였다.
-
네가 들어오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모두 독박을 쓰면서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조장 그럼 제가 할게요!"
"발표 못하세요?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급한 약속이요? 진짜요? 어떡해... 빨리 가보세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
호구인가...
너를 보면서 든 생각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너무나도 바보같게도 너는 남자와 여자가 하는 말을 모두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걸 말을 해줘야해, 말아야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기 전에 편의점에서 김밥이라도 먹고 가려고 했는데 무리일 것 같았다.
쓸데없는 조정때문에 시간을 너무 오래 잡아먹은 탓이었다.
"선배."
"..?"
"연락처 안주셨어요."
"... 아... 미안해요."
네가 내민 핸드폰에 내 번호를 꾹꾹 눌러 다시 너에게 쥐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카페에서도 너는 이렇게 말을 했었지.
["아...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
"진짜진짜 이상한 뜻 아니고 이름이 궁금해서..."
"..."
"저는 황민현입니다! 다짜고짜 이름부터 물어봐서 죄송..."
"주문..."
"네?"
"주문하시겠어요?"]
그냥 매일 오는 단골 손님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세상이 참 좁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연락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나름 자신의 발소리와 기척을 숨기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았지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눈에 띄게 화들짝 놀래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큰 키와 날카로워보이는 눈매와 매우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왜 따라와요?"
"따라가는 거 아닌데..."
"..."
"알바가시는 거죠?"
"네."
"저 거기 단골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와서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사람이 단골이지 누가 단골이겠어.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매우 거슬렸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너는 나를 따라오는 게 아니라 카페에 가기 위해 나랑 같은 길을 걸을 뿐이었으니까.
...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어릴 때의 기억은 더욱더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너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겨우 세 테이블이 있는 카페 안에서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내가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너는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내 손에는 냉동 딸기와 바나나가 들려있었다.
매일 네가 주문하는 메뉴는 딸기 바나나 주스 그거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딸기 바나나 주스 하나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 캐리어에 담아드릴까요?"
"그냥 주세요."
말없이 믹서기에 딸기와 바나나를 집어넣었다.
카페 안에 울려퍼지는 믹서기 소리가 요란했다. 점장님 취향을 고스란히 담은 음악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료가 나올 때 까지 너는 카운터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다른 손님들은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던데...
널리고 널린 의자를 놔두고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는 조금 이상했다.
뭐랄까...
뭔가 남다르달까.
그런 거 있잖아. 다들 똑같이 행동할 때 누군가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을 하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거.
게다가 너는 객관적으로 봐도 눈길이 가는 외모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너의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두고 있다는 건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랑 주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너는 환하게 웃어보이며 딸기 바나나 주스가 담긴 잔을 집어들었다.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응?
"손님. 이거..."
"손님이 아니라 민현이."
"저기..."
"그거 제가 주는 선물이에요."
"네?"
"가만보니까 선배는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거 같아서."
"그게 무슨..."
"나 가요! 내일 봐!"
"..."
덩그러니 아메리카노 하나만 남겨져있었다.
괜히 빨대를 휘휘 저으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호구가 맞는 것 같았다.
"나 이거 그냥 마셔도 되는데..."
다른 사람들과 조금은 남다른 너에게 눈길이 가는 건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정말로.
-
00화는 두 사람이 만난지 꽤나 시간이 흐른 후 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