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연극까지 볼 생각은 없었었다.
여자가 연극을 보러 들어가는 사진만 찍으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너를 너무 만만하게 본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아니라 현대의 시스템을.
"언제 예매했는데?"
"아까 지하철 타기 전에요."
어쩐지 핸드폰만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더라.
한숨을 내쉬며 네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미 끊은 티켓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이따 연극 끝나고 너한테 티켓값이나 줘야지.
과제하랴 알바하랴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이 정도의 휴식 정도는 즐길 수도 있으니까.
반존대하는 연하남이 설레는 이유
06
w. 갈색머리 아가씨
여자의 취향은 정말 나랑 안맞았다.
공포라니. 공포라니..! 아직 이제 막 3월이 끝나고 4월이 되어가는데 공포라니!
그건 그렇고 공포를 주제로 한 연극을 지금 시즌에 한다고? 한창 잘 나갈 시즌도 아닌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방금 전 비둘기를 만났을 때 보다 더 최악이었다.
나는 공포영화를 돈주고 보는 게 세상에서 제일 돈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걸 왜 돈을 주고 봐? 나는 나한테 돈을 준다고 해도 안볼 사람인데?
간판이 제대로 없던 것에서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다. 아무래도 마니악한 그런 연극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아니."
"나갈까요?"
"연극 시작했잖아..."
게다가 네가 예매한 자리는 중간에 나가기도 애매한 그런 자리였다.
정말 맨 가운데. 중간에 일어나서 나가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치는 그런 자리.
그냥 나갈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내 가방을 품에 끌어안았다.
도입부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다리가 떨려왔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대사를 듣지 않으려 귀를 틀어막았다.
주인공 여자의 독백과 더불어서 나오는 음악소리 때문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무대 효과인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길에 따라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1부 2부로 나뉘어진 연극이었다. 1부가 끝나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예매를 했을 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2부까지 보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듣기 싫은 소리는 들려왔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 주위에서 빨갛게 또 다시 하얗게 번쩍번쩍 거리는 조명.
모든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더욱 더 가방 위로 얼굴을 박으며 허리를 숙였다.
등 위로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야? 너무나 바보같게도 너였다.
하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너지.
"죄송합니다."
"..."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너는 내 손목을 그러쥔 채로 하나하나 양해를 구하며 극장 밖으로 나왔다.
너에게 이끌리다시피 밖으로 나온 내 다리는 아직까지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긴장을 하거나 풀리면 다리부터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지난번 교수와 이야기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너는 아무런 표정없이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늘 웃고 있는 모습만 봤어서 그런지 아무런 표정이 없는 네 얼굴이 낯설었다.
어느정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아 네 앞으로 다가갔다. 너는 여전히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민현아."
"..."
"미안."
"선배가 왜 미안해요."
"기껏 예매했는데 반도 못보고..."
"아니에요."
"그래도..."
"내가 미안해요."
"...응?"
"선배 공포 장르 무서워하는지 몰랐어요. 미안해요."
내가 말을 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 건데...
너는 그 당연한 일에 지금 미안하다 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야. 네가 미안할 일 전혀 아니야.
라고 말을 하고싶었지만 내 몸뚱아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떨리던 다리는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다만 바들거리는 두 손은 어찌할 수 없었다.
네가 보기 전에 두 손을 뒤로 감췄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이거 봐. 네가 예매했다는 이유 하나로 땅을 파고 있는 거잖아.
네가 미안할 일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네가 미안할 일 아니야."
"선배 지금 표정 어떤지 알아요?"
"..."
"나 선배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 처음 봤어요."
"내가 말을 안했으니까..."
"적어도 선배한테 물어는 봤어야 하는데..."
"황민현."
네가 무슨 의도로 예매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나름 서프라이즈를 하고 싶었겠지. 공포라는 장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너는 내가 공포를 무서워하는지 몰랐다.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보러 갈 만큼 그다지 무서운 연극은 아니라고 짐작을 하기도 했겠지.
너는 단지 실수를 한 것 뿐이었다. 그런 실수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는 전혀 없었다.
"잘들어."
"..."
"네가 잘못한 거는 단지 내가 공포를 싫어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그거 하나야."
"..."
"그리고 그건 내가 너에게 굳이 말을 하지 않았던 거고."
"선배."
"그러니까 너는 지금 잘못이 없어. 나한테 미안하다 그만 사과해도 괜찮아."
"선배 그래도..."
"사과는 하는 사람 마음대로가 아니라 받는 사람 마음대로야. 나는 이미 네 사과를 받았어. 그니까 그만해도 괜찮아."
"..."
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대로 끌어안아왔다.
순간 놀라 너의 가슴팍을 밀어내려했지만 네가 팔에 힘을 단단히 줘서 그런지 벗어날 수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려댔다.
아까까지는 추워서 미칠 것 같았는데 천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느껴졌다.
저기... 민현아...
내가 웅얼거리듯 말을 꺼냈지만 너는 요지부동이었다.
내 말이 그렇게 감동이었던 걸까... 나는 그냥 할 말을 한 건데...
"선배."
"어."
"나 이제 선배 진짜 좋아진 거 같아요."
"..."
"어떡하죠?"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네 품에 안겨있는 동안 나는 내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바빴다.
홍익인간마냥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
중간고사 기간이 점점 다가왔다.
그 말인 즉슨 조별과제도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ppt도 완성이 되었고 제명시킬 여자와 남자의 증거도 마련되어있었다.
발표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본도 써둔지 오래였다.
항상 벚꽃이 필 때 즈음에 중간고사는 시작되었다. 꽃놀이 갈 생각은 말고 열심히 공부나 하라는 교수들의 뜻인가.
그래봤자 일주일 차이일텐데 그 정도는 좀 봐주지. 조금만 일찍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텐데.
아.
일찍하는 게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너를 마주할 명분 중 하나가 사라지는 거니까.
"어서오세요."
나도 과제 때문에 바쁘긴 했지만 너 역시도 만만치 않았다.
너도 너 나름대로의 전공이 있으니 바쁜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너는 패디과였다.
바쁠 수 밖에 없는 과였다.
때문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오던 네 발걸음이 끊긴지 사흘 째였다.
사흘동안 안온 게 뭐 그리 큰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든자리 모르고 난자리 안다잖아.
"..."
"주문하시겠어요?"
"성이름 선배 맞아요?"
"..?"
나를 어떻게 알지?
처음보는 남자였다. 보자마자 든 생각은 나보다 예쁘게 생겼네 였고.
어디를 가더라도 눈길을 끌 것 같은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나같이 주위 신경 안쓰고 다니는 사람도 한 번 보면 우와 하고 탄성을 내뱉을 정도로.
너도 잘생긴 외모였지만 이 남자와는 조금 다른 잘생김이었다.
너는 주변에 있을 것 같지만 알고보면 전혀 없을 그런 잘생김이었고 이 남자는 아예 그냥 없을 것 같다 라고 단정을 지을 잘생김이었다.
어쨌든.
지금 이 남자가 잘생긴 게 중요한 게 아니지.
문제는 이 남자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였다.
"누구세요?"
"패디과 1학년 최민기 라고 합니다."
"아..."
네 동기였다.
"황민현 아시죠?"
"네."
"민현이 관련해서 이야기 하려고 왔어요."
"..."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애당초 최민기라는 이 남자가 나를 찾아온 이유부터 알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네가 나에게 좋아한다 라고 말을 하고는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너와 나는 단순히 조별과제를 같이 하는 선후배일뿐이었다.
어디가서 네가 나에 대해 떠들고 다닌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적어도 옆에서 본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
이 남자가 너와 어떤 사이냐에 따라서 또 달라지려나.
"사람 뒤에서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실례인 거 아는데..."
"네."
"민현이가 선배 많이 좋아해요. 생각보다."
"..."
"황민현 지금까지 고백만 받아봤지 자기가 먼저 누구 좋다고 나온 건 처음이거든요."
"..."
"혹시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가 할 말이 없지만 마음도 없는데 그냥 받아주시는 거면 그만해주세요."
"저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황민현 그 자식은 선배가 하는 말 하나하나에 울고 웃고 하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찾아와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넘기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모양이었다.
"실례라는 거 알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
"첫째. 지금 이 일은 나와 황민현 두 사람 사이의 아주 개인적인 일이에요."
"..."
"그런 개인적인 일에 제 3자가 들어올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둘째로."
"..."
"내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이라는 전제를 까는 거 부터가 실례 아닌가?"
"그게 무슨..."
"사람이 사람 마음 아는 게 쉬워요?"
"..."
"그래도 무슨 생각으로 이야기 했는지는 알아요.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실례했습니다."
"..."
남자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저렇게까지 인사를 할 필요가 있을까.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에 볼을 긁적였다.
남자는 고개를 들자마자 다시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응? 할 말이 아직 남아있는 건가?
"레모네이드 한 잔 주세요."
"...네?"
"방금은 황민현 친구로서 볼 일. 지금은 내가 볼 일."
"..."
"얼음 많이 넣지 말고 좀 진하게 타주세요."
"...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도 보통은 아닌 아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많이.
-
그 남자애 그러니까 최민기가 한 말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 내가 좀 기분이 나빴을 뿐이지. 처음 보자마자 다짜고짜 네 이야기를 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했으니까.
때문에 나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지.
사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정말 눈치고자가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너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로든 호감인 것은 확실했다.
나는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싫은 사람이라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과제만 하고 빠빠이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겠지.
카페에 오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해서. 내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몰라서. 그리고 너라는 사람과 만남을 이어갈 정도로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모르겠어서.
지금까지 내가 옆에서 봐온 너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 앞에서만 그렇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주관적으로나 제 3자의 입장으로 보나 너는 괜찮은 사람이 맞았다.
나에게 '좋아해요.'라고 말을 하는 게 과분하다 느껴질 정도로.
때문에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내 스스로가 굉장히 뭐랄까... 성격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더더욱.
["나 이제 선배 진짜 좋아진 거 같아요."
"..."
"어떡하죠?"]
이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할 말이 없기도 했고. 음... 어찌보면 되게 무책임한 말일수도 있는데 정말 그랬다.
...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거 자체가 너에게는 희망고문이려나.
나는 왜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거지?
언젠가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봤던 영화가 생각이 났다.
Rent 라는 뮤지컬 영화였다. 주인공들은 거의 최악의 상항이다 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행한 삶속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 다들 No day but today!
오늘이 아니면 안된다.
어차피 흘러가는 인생 그냥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이런 사람이고 네가 저런 사람이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 마음이 가는대로.
핸드폰 화면을 힐끗 보았다. 알바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다음 타임 알바가 올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들어 자판을 두드렸다.
[민현이]
바빠? -
오늘 잠깐 볼 수 있어? -
맥주 먹자 -
.
.
.
- 어디로 갈까요?
지금까지는 네가 표현을 했으니 이제는 내가 표현을 할 차례였다.
나는 생각보다 더 기브 앤 테이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
〈암호닉>
짱요 / 응 / 뿜뿜이 / 책상이 / 너우리 / 0713 / 모기 / 아몬드 / 황제님충성충성 / 책민현 / 샘봄 / 붐바스틱
여주 성격 아시죠...
속전속결입니다. 생각보다 입덕부정기는 길지 않아요.
아 글구
민기 특별출연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