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마 - 기억에 머무르다
강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비 내릴 거라고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우산이 없는 학생들이 꽤나 많은 듯 싶었다.
옷으로 대충 가리고 뛰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건물 내 편의점에 들려야겠다며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가방에 있던 우산을 꺼냈다.
아침에 네가 나에게 챙기라고 했던 우산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알았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산을 폈다. 빨리 집 가서 샤워해야지.
조금이라도 빨리 이 끕끕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건물 앞에 한 남자가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달려가지도 우산을 사러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냥 멍한 표정으로 비를 맞고 있을 뿐이었다.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감기 걸리고 싶어 환장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내 갈길을 가려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성이름 선배 맞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내 이름이었다.
반존대 연하남이 설레는 이유
09
w. 갈색머리 아가씨
[(아. 맞다. 선배.)
"응?"
(오늘 우산 챙겨요.)
"우산?"
(네. 우산.)
"우산은 왜?"
(오늘 비 올거래요.)
"일기예보에서?"
(그건 아니고 종현이라고. 내 친구가요.)
"... 친구가 기상캐스터니?"
(것도 아닌데 애가 좀 비에 많이 예민하거든요.)
"예민하다고?"
(비오는 걸 싫어한다고 해야하나... 오늘 하숙집 애들한테도 다 우산 챙기라고 하던데요? 혹시모르니까 챙겨요.)
"우산 무거운데."
(작은 걸로 챙겨요. 감기 걸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네. 네. 알았네요. 챙기면 되잖아."]
아침에 네가 말한 네 친구가 이 사람일 줄이야.
남자는 내게 자신을 '김종현' 이라고 설명했다. 강원도에서 왔다나.
누구는 제주도에서 누구는 부산에서 누구는 강원도에서. 아주 전국 각지에서 다 모인 그런 하숙집인가보다.
응답하라 1994 돋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 했는데 뭔가 마음에 걸렸다.
하숙집 애들한테 다 우산 챙기라고 말했던 사람이 정작 자기는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고 있다는 게 말이 돼?
다른 사람들에게 딱히 관심을 주지 말자가 내 신조이긴 했지만... 뭐라고 해야할까.
비를 맞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싫다기보다는 슬퍼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글을 써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어쨌든 지금 나는 남자와 함께 우산을 쓰고 네 하숙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남자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직은 제가 좀 불편해서요."
남자는 말이 많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힐끗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직 '남자' 보다는 '소년' 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 내가 너무 괜힌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사실 네 하숙집이 궁금하지 않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내가 네 하숙집에 불쑥 찾아가는 건 또 좀 아니잖아.
이렇게 말없이 찾아가도 괜찮으려나.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키가 좀 크네. 아까 비맞으면서 있을 때는 좀 작을 줄 알았는데. 비율이 나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체구가 작았다.
너를 볼 때 나오던 버릇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 관찰하는 이 이상한 버릇 말이다.
"민현이가."
"..."
"선배 이야기 많이 해요."
"그래요?"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고."
"흐음..."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먼저 입을 연 건 남자 쪽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내뱉고 있었다. 본래 말투가 조금 느릿느릿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봐온 네 친구인 최민기, 강동호와는 조금 달랐다.
강원도 사투리가 원래 말투가 느리나? 하지만 사투리 억양은 따로 느껴지지 않았다.
"우산..."
"네?"
"왜 우산 안챙기셨어요? 민현이 말로는 종현씨..? 가 우산 챙기라고 했다고..."
"아. 오늘은 비 맞고 싶어서요."
나 그냥 집에 가버릴까.
"오랜만에 비 맞아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안될 거 같았거든요. 우산 씌워주셔서 감사해요."
"..."
나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남자가 울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와서 그런가. 남자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당장 눈물을 흘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지금 울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
"선배! 김종현!"
네가 문을 박차고 나왔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 너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 넌 공강이라고 했었나. 휴강이라고 했었나. 역시나 너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냥 나도 대충 편한 옷 입을 걸 그랬나보다. 괜히 원피스 입고 나왔어.
"선배 오늘 나 보려고 이쁘게 입고 왔어요?"
"아니거든."
"우선 안으로 들어와요. 지금 안에 사람들 없어."
"들어가도 괜찮아?"
"물론이죠. 종현아. 넌 우선 좀 씻어라. 웬일로 네가 비를 다 맞고 있었어?"
남자는 아니 김종현은 내게 짧게 인사를 하고는 화장실로 추정이 되는 곳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아무도 없네.
그래도 조심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갖고 있던 우산은 네가 베란다로 가지고 갔다. 우산을 말리기 위해서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깔끔했다. 내가 온다는 말을 하지 않고 왔으니 평소 모습도 이렇다는 거겠지.
너 몰래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는 네가 돼지 우리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닌 가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
"생각보다 깔끔하네."
"오랜만에 청소하고 있었죠."
"나 올거 알고 있었어?"
"그건 아닌데... 아. 선배 부침개 먹을래요? 김치부침개."
"너 할 줄 알아?"
"아니요."
"..?"
"종현이가 해줄 거에요."
음...
보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이 집에서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왠지 모르게 화장실에서 씻고 있을 김종현에게 우산을 씌워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맞고 와서 부침개 하면 서러울 거 아니야.
괜시리 드는 뿌듯한 마음을 가득 안고 쇼파 위에 앉았다.
계속해서 딱딱한 강의실 의자에만 앉아있다 푹신한 쇼파 위에 앉으니 노곤노곤한 느낌이 들었다.
"선배."
"응?"
"졸리죠?"
"조금."
"지금 선배 눈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너 요즘 나 디스 많이 하더라."
"그런 의도는 아닌데."
너는 내 옆에 앉아 내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려주었다.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네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자세 익숙한데...
아. 생각났다. 내가 너랑 술마셨던 날 (정확히 말하면 나 혼자 퍼부으며 마셨던 날) 내가 이렇게 잠들었었지.
그 때는 술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네 어깨는 기대기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뼈 때문에 딱딱하거든.
김종현이 다 씻었는지 밖으로 나왔다. 나도 씻어도 괜찮으려나.
고개를 들어 너를 보는데 네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선배.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게요."
"신기한 거?"
"김치부침개 만드는 법."
무슨 짓을 하려고...
너는 부엌으로 가서 왔다갔다 분주히 움직이며 재료를 하나둘씩 꺼내놓았다.
테이블 위에는 네가 올려놓은 재료들이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첫째. 김치와 밀가루 등등 재료를 준비한다."
"..."
"둘째. 종현아! 김치부침개 할 때 이거 김치 그냥 넣으면 돼?"
"..."
"비켜. 그냥 내가 할게."
"짜잔!"
"..."
다시 한 번 김종현에게 우산을 씌워주길 매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비 아직도 오네."
"이따 집갈 때 괜찮겠어요?"
"우산 있는데 뭐."
김종현이 만든 부침개는 맛있었다. 집에서 종종 요리를 하는 편이라고 했다.
다들 엄청 많이 먹는 편은 아닌데 유독 먹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나.
그 말을 듣자마자 토스트를 베어물며 지나가던 강동호를 떠올린 나였다. 그 때 그 표정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이었지.
너는 새삼 나른한 표정으로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네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팍이 뭔가 신기했다.
손바닥을 네 가슴팍 위에 올려놓았다. 오오. 내 손도 네 가슴팍을 따라 같이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김종현은 쇼파 아래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긴 건 동글동글한 귀염상인데 뭔가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김종현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한 번 들었던 호기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묻고 싶었지만 입술을 다물었다. 왜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지.
"근데 너 왜 비맞고 왔어?"
"응?"
"선배가 너 우산 씌워준 거 아니야?"
"맞아."
"너 우산 안갖고 나갔어?"
김종현은 그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작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비오는 날에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는 것을.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네 가슴팍을 꾹 눌러 너를 다시 곱게 눕혀주었다.
내 손길의 뜻을 알아챘는지 너 역시도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볼게요."
"부침개 맛있었어요."
"들어가서 좀 쉬어. 너 감기 걸릴라."
"나 좀 잘게."
김종현은 그대로 문을 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네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싶다는 건가.
고개를 숙여 너와 눈을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개구진 네 표정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손가락으로 네 볼을 꾹 눌러보았다. 하얗고 네가 웃을 때마다 불룩 튀어나오는 게 뭔가 만지고 싶게 생겼거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네 볼은 참 말랑말랑했다. 그 모찌처럼.
"말랑해."
"어릴 때 별명 찐빵이었어요."
"몸은 말랐는데."
"볼살이 제일 안빠지더라고요."
"하긴. 그래."
"...고마워요."
"뭐가?"
"종현이 우산 씌워줘서."
"고마울 일인가?"
너는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너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김종현이 왜 비오는 날을 안좋아하는지.
단순히 옷이 젖어서, 날씨가 끕끕해서 라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짜증부터 내거든.
"감기 걸리면 빨리 낫지도 않는 녀석이거든요."
"알던 사인가봐?"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어요."
"서울에서?"
"서울에서."
상경을 빨리했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네 손 하나를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꽤나 큰 네 키에 비해 네 손은 참 작은 편이었다. 여자치고 작은 편인 내 손하고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걸 보면.
손가락이 짤똥한게 귀여워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누군가와의 스킨십을 할 때 가장 간질간질한 곳이 바로 손이었다.
그 사람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때문에 아직 나는 너와 손을 제대로 마주잡은 적은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가 네 손을 이렇게 잡고 있는 것은.
"선배."
"응."
"손 차가워요."
"내가 손발이 좀 차."
"잠깐 고개 숙여봐요."
"고개?"
"네. 고개."
내가 고개를 숙이자 너는 잠시 나를 마주보더니 이내 '아니다' 락 작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뭐가 아니야? 네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돌려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네 한 손을 두 손으로 그러쥔 채였다.
네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 위로 부드럽고 따듯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조심스레 눈을 떴다. 내 눈 앞에 바로 네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더워. 손에 힘을 줘 네 손을 더욱 세게 그러쥐었다. 너는 다시 내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그런 입맞춤이었다.
"입술은 안차요."
"...민현아."
"네?"
"너 입술에 립스틱 묻었다."
"어. 그러면 다음에 선배 립스틱 하나 사줘야겠다."
"립스틱은 왜?"
왜긴 왜에요.
내가 다 가져갈 거 같으니까 그러지.
꺼져. 내 거는 내가 살거야.
차가웠던 손이 조금은 따듯해졌다. 따듯한 네 손을 자꾸 만지작거려서.
-
〈암호닉>
짱요 / 응 / 뿜뿜이 / 책상이 / 너우리 / 0713 / 모기 / 아몬드 / 황제님충성충성 / 책민현 / 샘봄 / 붐바스틱 / 아가베시럽 / 다녜리
수 지 / 과자 / 민현29 / 윙팤카 / 0846 / 슬 / 융융 / 댕댕민현 / 애정 / 숨
드디어 첫 키스신이 나왔네요.
정확히 말하면 뽀뽀지만요...ㅎㅎ
그리고 이번에 특별출연한 종현이는
단편 소나기에 나오는 그 종현이가 맞답니다.
소나기 속 종현이는 중학생 15살이에요.
평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종현이가 맞답니다! 비가 오는 날에만 분위기가 가라앉아요.
아 글구 자랑은 아니지만 저 이번에 유입한 늦덕이거든요?
하나하나 덕질해가면서 민현이 글 쓰고 있는데 민현이가 갈비찜 좋아하는 건 알았단 말이에요.
근데
커피 못마시는 거
책 읽는 거 좋아하는 거
몰랐는데 맞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