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블리즈 - 지금 우리
나는 맥주를 마시는 걸 꽤나 좋아했다.
술집에 가서 먹는 것 보다는 혼자 집에서 먹는 걸 더 좋아했고.
때문에 이렇게 술집에 오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무리 혼밥을 좋아한다해도 혼자 술집 오는 일은 드물잖아.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왔다.
흰 티에 검은 바지 그리고 검은색 가디건. 깔끔하면서도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하긴. 갑자기 술먹자고 불렀으니 편하게 입고 나오는 게 맞겠지.
미리 주문해놓은 맥주잔을 집어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왔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많이 마셨어요?"
네가 내 앞에 앉았다.
반존대 연하남이 설레는 이유
07
w. 갈색머리 아가씨
"갑자기 왜 술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그건 아닌데..."
"아닌데?"
"그냥. 마시자고. 지금까지 수고했잖아."
지금까지 살면서 느끼는 건데 나는 가끔 이렇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빙빙 돌리는 습관이 있었다.
평소에는 할 말 못할 말 다 하고 지내면서 꼭 내가 진짜 직접적으로 말을 해야할 때 특히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 앞에 앉은 너와 마주하니 머릿속으로 수없이 곱씹고 곱씹었던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느정도 술을 마시고 말을 하던지 해야지. 절대 맨정신으로는 아무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냥 집 근처에서 그러니까 학교 근처에서 만나자고 한 건데 왜 잘생겼지.
객관적으로 보면 절대 차려입은 옷이 아닌데 왜 차려입은 것처럼 보일까.
패디과라서 옷 핏도 남다른 건가? 아니면 그냥 네 피지컬이 좋아서 뭘 걸쳐도 괜찮아보이는 건가?
나는 다리도 짤똥하고 그래서 옷핏이 막 이쁘지는 않은데.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누구는 저렇게 옷핏 예쁜데 누구는 안예뻐.
맥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그 위로 맥주를 따랐다.
숟가락으로 잔을 쾅 두드리자 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뭘 봐. 잘생긴 게.
"소맥 마시게요?"
"응."
"이미 맥주 마셨는데?"
"마실거야."
"선배 주량 괜찮아요?"
"괜찮아. 너도 마셔."
"저는 됐어요."
"... 그럼 왜 나왔어."
나쁜 놈.
내가 이렇게 맛있게 소맥을 탔는데 먹지도 않아.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잔을 그러쥐었다. 너 안먹을 거면 내가 다 먹을 거다.
같이 먹으려고 내가 안주도 탕으로 준비를 해놨는데.
소맥을 먹을 때 국물 안주는 필수였다. 사실 나는 술을 마실 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다.
기본 안주로 나오는 오뎅 국물이면 충분하거든.
근데 그런 내가 지금 응? 따로 탕을 시켰단 말이야. 너랑 같이 먹으려고.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너무해 너무해.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건데.
기억나지 않았다.
"저 주량 약해요."
"얼마나 약한데?"
"비밀."
"나보다 약해?"
"음... 그런 거 같아요."
"바보. 술도 못마시고."
"사실 맛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나왔대?"
"왜 나왔겠어요."
선배가 부르니까 나왔지. 진짜 몰라서 물어봐요?
예전부터 신경이 쓰였던 건데 어느샌가 너는 나에게 은근히 반말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이상한 말투를 배워와서 '편찮냐?' 이런 말을 하더니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누가 그거에 설렐 줄 알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면 얄미운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한테 왜 갑자기 들이대서 머리 복잡하게 만드는데?
자꾸 얼굴 가까이 들이밀면서 말하다 내 심장 터지면 책임질건가?
한 번 인정한 마음은 감자마냥 줄줄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 은근 너 예전부터 좋아했나봐.
그걸 마주하지 않았던 거지.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봤을 때..?"
"네?"
"너 진짜 이상했는데."
"헐. 상처다."
"생긴 거는 아메리카노 마시게 생긴 애가 갑자기 딸기 바나나 주스 주세요 하고."
"생긴 거랑 마시는 거랑은 상관이 없어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같은 메뉴만 주문하고."
"나 그거 선배 보려고 간 건데."
"갑자기 다짜고짜 이름 물어보지 않나."
"선배 그 때 안알려줘서 나 은근 서운했어요."
"조별과제 한다고 나타났는데 호구처럼 다 자기가 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선배 나 호구라고 생각했어요? 나 진짜 상처 받는데."
네가 손을 내밀어 내 손에 있는 잔을 슬쩍 가져가려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잔을 뺏어왔다. 어디서 감히 내 술잔을 가져가.
한 번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나는 멈출 수 없었다. ... 이래서 술집에 잘 오려고 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너 그렇게 웃지마."
"웃는 거요?"
"개죽이마냥 히죽히죽."
"오늘 선배가 하는 말 여러모로 좀 충격이다."
"또또 웃는다."
"왜 웃지마요?"
"너 자꾸 그렇게 웃으면..."
"웃으면?"
"나 얼굴 빨개진단 말이야."
"얼굴이 빨개져요?"
"응. 얼굴 빨개져서 못생겨져."
"안못생겼어요."
"그래서 네가 호구라는 거야."
"그래요?"
"바보."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씨. 나 아직 할 말 많이 남아있는데.
너한테 어디가서 옷 그렇게 입지 말라고도 말 해야하는데.
자꾸 그렇게 입고 다니면 너한테 관심 없던 사람도 관심 생긴단 말이야.
연극 보다가 나 데리고 나왔던 것도 고맙다고 말 해야하는데. 너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까지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의외로 공포의 트라우마는 강하거든.
그리고... 그리고... 어...
(풀썩)
"..."
"선배?"
"..."
"하아... 미치겠다, 진짜."
"..."
"제일 중요한 거만 말 안하고 자면 어떡해요."
"..."
"내가 못살아."
-
추웠다. 손을 더듬거려 이불을 찾으려 했는데 잡히지 않았다.
응? 지금 나는 누워있지도 않았다. 어딘가에 앉아서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집이 아닌가. 나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주위는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거 보면 집 같기도 한데... 아니. 공기가 차가웠다. 바람도 불어오고 있었다. 밖이었다.
"어..?"
"일어났어요?"
"어?"
그래. 밖. 밖이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너였다.
잠깐만. 내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나는 분명히 너한테 고백을 하겠다고 술을 먹자하면서 너를 불렀고.
네가 나왔고 너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고 내가 소맥을 타서 그걸 마셨고...
씨발. 성이름 드디어 미쳤나보다.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집이 어딘지 몰라서..."
"아..."
"딱히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어..."
"그렇다고 하숙집 데리고 가는 건 더더욱 아닌 거 같아서요..."
응. 그래. 매우 잘했어.
아마 네 하숙집에서 내가 눈을 떴으면 쪽팔려서 죽었을지도 모르거든.
내가 어디까지 말을 했던 거지. 중요한 건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으면 했지만 기억이 났다. 젠장. 기억이 났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스테레오로 들릴 정도로 기억이 생생하다고.
호구라니... 개죽이라니... 그게 사람을 불러놓고 할 말인가?
그것도 심지어 고백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사람이 할 말이냐고.
이와중에도 머리는 아직 남아있는 술기운 때문에 어질어질했다.
허리를 숙여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로 발을 동동 굴러댔다. 어떡하지.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져도 내가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게다가 너는 내가 일어날 때까지 어깨를 빌려주고 있었다. 젠장...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선배."
"말시키지 마."
"왜그래요."
"나 지금 쪽팔려서 미칠 거 같으니까."
"무슨 말 했는지 기억은 나요?"
"그래서 지금 엄청 쪽팔려."
"근데 선배 말 다 안한 거 같던데."
...
그래... 아마 내가 거기서 잠들지만 않았으면 무슨 말이든지 더 나왔겠지.
그게 무슨 말일지는 나도 상상이 가지 않는구나.
아...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된 건지 미칠 것 같았다. 애초에 너한테 고백을 하겠다 마음을 먹은 게 잘못이었나?
아님 너를 술집으로 부른 게 잘못이었나? 그래. 그게 잘못인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너를 술집으로 불렀을까.
술이 센 것도 아니면서 부릴 수 있는 진상은 다 부린 거 같네. 술이 약하면 너처럼 처음부터 입에 대지도 말았어야 하는데...
"미안..."
"뭐가요?"
"갑자기 다짜고짜 불러내놓고 진상짓해서..."
"알긴 아네."
"뒤진다."
"근데 진짜 왜 불렀어요?"
"어?"
"다짜고짜 술마시자고 부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고개 들고. 응?
고개를 들어 너를 힐끗 보았다.
너는 여전히 개죽이마냥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하자 너는 어느새 내 앞으로 와 쪼그려 앉아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저기... 갑자기 그렇게 눈 마주치면 내가 곤란한데...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 하자 네가 천천히 따라왔다.
젠장. 피할 곳이 없었다.
"진짜 왜 불렀어요?"
"..."
"할 말 있어서 불렀어요?"
"...어... 그러니까..."
"네."
"나는... 네가... 음..."
평소에는 아니지 방금 전까지만 봐도 말이 술술 나오던 입이 얼어버렸다.
이게 무슨 쪽팔림이야. 입만 벙긋거리면서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튀어나오지를 않았다.
좋아해 라고 말을 해야하나? 그건 너무 가벼워보이지 않나? 사랑해 라고 해야하나? 사랑..? 은 너무 오글거리지 않나?
후배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건 또 뭐야. 무슨 인소야?
순간 드라마 작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매우 간절해졌다.
그 사람들은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주인공들에게 끊임없이 사랑고백을 하도록 만든걸까.
처음 술집에서 앉아있었던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선배는 내가?"
"어... 어..."
"천천히 말해요."
"계속 조별과제하러 왔으면 좋겠어!"
"네?"
...
망했다.
"아니 그니까 굳이 조별과제를 하러 오는 게 아니더라도 우리 카페 와서 딸기 바나나 주스를 먹었으면 좋겠다는 거지."
"흐음..."
"그니까 어... 굳이굳이 딸기 바나나 주스가 아니더라도 가끔 카페 와서 나랑 책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좋고?"
"그러니까 갈비찜 먹었던 것도 좋으니까 다음에는 갈비찜 말고 다른 거 먹는 것도 괜찮은 거 같고..."
"선배."
"응?"
"그걸 세 글자로 줄여봐요."
멍청하니 두 눈을 깜박이며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손가락 세 개를 펼친 채로 입꼬리를 말아올리고 있었다.
세 글자... 세 글자라... 입만 벙긋거리다 혀로 입술을 축여냈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굳이 이유를 만들지 않더라도 같이 만나서 서로 마음을 키워가는 것. 이것을 세 글자로 줄이면.
"사귀자."
"..."
"나 너 좋은 거 같으니까 사귀자."
"조금 더 정확하게."
"... 나 너 좋으니까 사귀자."
"고마워요."
가슴에 막혀있던 웅어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
"선배는 이쪽이죠?"
"데려다 줄 필요 없다니까..."
"세상 얼마나 험난한데요."
"나한테 험난한 세상이 너한테는 안전하다니."
"그럼 그냥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 핑계대는 거라고 생각해요."
얘 어디서 연애 서적이라도 읽고 있나봐.
진짜 글로 연애를 배우면 저렇게 되는 건가?
네가 푸스스 웃으며 나랑 눈을 맞춰왔다. 한 번 의식을 하니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네가 웃을 때면 얼굴이 빨개지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막차도 끊겨있었다.
내가 자지만 않았어도 막차 타고 집 갈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앉아있던 공원에서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어느정도 걷다보면 너와 내가 헤어져야하는 갈림길이 나왔다. 너는 오른쪽 나는 왼쪽으로 가야했다.
네 핸드폰은 거의 불이 나고 있었다.
같이 하숙하는 친구들이 나름 걱정을 하는 건가 싶어 괜시리 미안해졌다.
"아까부터 톡톡톡 거리잖아. 빨리 가봐. 다들 걱정할라."
"이거 걱정하는 거 아닐걸요?"
"그럼 뭔데."
"비밀."
"뭔 비밀이 그렇게 많아."
"그니까 빨리 가요. 선배 집 앞까지만 데려다줄게."
"... 너 그거 하지마."
"뭘요?"
"반말 하지마."
네가 갑자기 씩 웃으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어허. 어디서 갑자기. 나는 짐짓 엄함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아무리 사, 사, 사귀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이렇게 다가오면 내가 놀라겠어 안놀라겠어.
너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키가 작은 게 다시 한 번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진짜 하지마요?"
"하지마."
"정말?"
"또또!"
"알았어요. 안할게."
"하지 말라니까..."
나 갈거야.
그대로 너를 놔둔 채로 집 쪽으로 다다다 달려갔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따라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 상태일지 너무나도 뻔했다.
지금 내 얼굴이 화끈거려 미칠 것 같거든.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톡 소리가 났다. 너였다.
/민현이/
- 조심해서 들어가요
- 따라가면
- 진짜 뭐라 할 거 같아서
- 안갑니다
- 다음에는 얄짤없어요
- 자기야♥
뭔 개소리야 -
- 자기야
- 말은 예쁘게 해야지요
"..."
☆★♥ 뭔 개소리야 ♥♠♤ -
- 예쁘게 꾸민다고 예쁜 말이 아니지요
"진짜 무슨 개소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
핸드폰을 꼭 쥔 채로 집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배실배실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
〈암호닉>
짱요 / 응 / 뿜뿜이 / 책상이 / 너우리 / 0713 / 모기 / 아몬드 / 황제님충성충성 / 책민현 / 샘봄 / 붐바스틱
아가베시럽 / 다녜리
(((((((((쓰니 손발))))))))
사실 쓰면서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슴다...
고백씬이 제일 어려워요...
그래도 드디어 둘이 이어졌으니까
참고로 여주 술버릇 = 취중진담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