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왜." - 어디야. "중도 가는 중." 무거운 전공책을 한 손으로 들으니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요즘 이상하게 어깨가 계속 아프고 저려왔다. 디자인을 전공 할 수록 팔 관리를 잘해야 하는다는 교수님의 말이 들려오는듯 했다. 그런 의미에서 빨리 끊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눈치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왔다. - 밥은. "먹을꺼야." - 누랑 먹게. "......" ...딱, 딱히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건 아니고. 갑작스러운 녀석의 질문에 더욱더 미간을 찌푸리며 둘러 댈 궁리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가벼워지는 팔과 뒤에서 느껴지는 몸에 뒤를 돌자 녀석이 뭘 보냐는듯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가나, 내랑 먹어야지."
PING PONG!
PING PONG!
E
"뭐?" "오늘 집에 못 들어 간다고, 혜선이네 집에서 자고 가." 내 입가에 묻은 소스를 투박하게 닦아 준 손이 가만히 휴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조용해진 분위기에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눈을 들어 아직 한 숟가락도 안 뜬체, 마냥 나를 보고있는 녀석을 마주했다. "여자제?" "당연하지." "아 와, 합작을 집에서 하는데." 심통난 그 입술을 한 두번 보는게 아니라 으음. 저 새끼가 또 시작이구나아. 하고 넘기며 마저 수저를 들었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내 반응에 녀석은 테이블을 무릎으로 약하게 쳐 올렸다. ...씨잉. 녀석의 입에선 곧 저런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아 안 죽어!" "아 위험하잖아!" 너와 함께 걷는 밤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더 위험할꺼야. 그런 말을 삼키며 애써 녀석을 달랬다. "시간당 한 번씩 전화. 콜?" "...영통." "싫음 말어." 녀석은 당장이라도 식당 바닥에 누워 땡깡을 피울 판이였다. 알았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진정시키니 그제서야 해맑게 웃으며 만두를 집어먹는 녀석이였다. 허헝. 맛나당. "시간당 한 번이다. 알았제?" "화장 지우고 이마 다 까고 준비하고 있을테니까 그런 줄알어." "괘안타, 예쁘다." 재수없게 흥얼거리는 그 콧구멍을 만두로 틀어 막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는 성진오빠 파트지?" "어. 거기 옆에부터 다시 하면 돼." ...막막하다 막막해. 시계 바늘은 어느덧 새벽 2시를 넘겼지만, 어쩐지 끝이 보이질 않는 작업에 통증이 느껴지는 팔을 사정없이 휘돌렸다. "야 파스 있냐?" "어. 거기 너 휴대폰 옆에 있는 협탁 세번째 칸." 너 요즘 컨디션 안 좋다. 팔 관리 잘해라. 걱정 어린 혜선이의 말에 알았다는듯 손바닥을 보이며 파스를 뒤적이다 문득 눈에 들어 온 제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혜선아." "어?" "우리 시작한지 얼마나 됐지?" 제발 한 시간도 안됐다고 해.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게임에 목숨을 배팅한 여주는 이어 들려오는 혜선의 목소리를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4시간 됐지." ...좆됐다. 여주는 꺼진 휴대폰이 마치 자신의 모습과 같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 잠든 혜선을 뒤로한 체, 여주가 그녀의 집 베란다로 나와 깊은 새벽 하늘 같이 깜깜한 제 휴대폰 전원을 켰다. ...설마 아직까지 안자겠어. 불안한지 평소 깨물지도 않는 손톱을 특특 거리던 여주가 곧이어 화면에 띄여진 부재중 전화 목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그와 동시에 울리는 제 휴대폰에 여주는 다시 한번 좆됌을 느끼고 제 명이 무시하길 바라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 ...... "......" - 안 자나. 평소보다 더 깊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켜버려 들린 사레에 콜록 거리며 대답했다. ...켁 어, 어. - ...... "......" - 할 말 없나. "미안." 이라 하며 수그리고 들어가야할지, 아니면 뻔뻔하게 나갈지 고민중이야. 생각을 마친 여주가 민망한지 큼, 하고 괜히 목을 긁더니 입을 열었다. "...미안." - 일부러 전원 꺼둔 기가. "야,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 너는." 제가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은 아닌데, 얼떨결에 발끈함으로 나간 제 말에 당황한 여주가 바로 말을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 ...안졸려? 어? 예상외로 나른한 웃음과 함께 들리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긴장의 맥아리가 탁 풀려버린 여주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피곤하지." 제 쪽을 비추는 푸른 밤 하늘에 여주는 22년 인생 처음으로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새벽감성이냐. "야, 녤아." - ...응. "우린 떨어져 지내야 하나봐. 나 처음으로 너가 보고 싶어." 웃으라고 한 소린데. 정작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건 제 목소리 뿐이라고 여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 - ...... "자냐?" 뭐야 이거, 이빨 가는 소리가 안 들리는데. 천천히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낸 여주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느릿하게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었다. - ...내가 더. "......" - ...나는 맨날. "......" 녀석의 목소리에 낯설게 반응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길게 이어지는 정적이 괜히 어색하게 느껴져 뒷목을 긁적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 잘자고. 끊어. "......" 12분 10초. 녀석과의 통화기록을 마냥 바라보다가 훅 끼쳐오는 선선한 바람에 열이 올랐다.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덥냐. 새벽감성은 참 이상한거라고, 여주는 깊어가는 시간 속에서도 다니엘을 생각했다. "이리 내." "됐네요." "한 번 말할때 좀 퍼뜩 들면 덧나나." "너 네번째 말하는 거거든?" 10분째 실랑이 중이였다. 입을 앙 다문 다니엘이 기어코 내 손에 들린 가방을 빼앗어 갔다. 내 가방을 어깨에 매고 앞서 걸어가는 그 등짝을 후드려 팰래다가 손에 감긴 딱딱한 깁스를 깨닫고 쫄레쫄레 그 뒷모습을 따라갔다. "내 진작, 가라 캣잖아." "아 그래서 갔잖아."
우뚝. 멈춰선 그 눈이 매섭게 나를 쳐다봤다. 아, 알았어. 깨갱거리며 아픈손(사실 깁스해서 아프지도 않음)을 부여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이로케, 아푼데, 때리꼬야? 그 날 밤, 혜선이의 집에서 열라 빡세게 과제를 한 결과 우리 조는 조별과제 만점을 얻었지만, 덕으로 난 근육파열이라는 가산점도 얻었다. 거의 팔이 빠진 사람처럼 녀석과 길을 걷다가 툭, 힘없이 팔에서 떨궈진 내 가방에 녀석은 그제서야 피노키오 마냥 어색한 내 팔을 부여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떻게 버티셨데 이걸.' 병원에선 의사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셨다. 좋아라 한 손으로 박수치자, 옆에서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는 녀석의 손이 보여 그만 깝쳤다. 물리치료를 하루에 한 번 받아야 한다고 했다. 너무 자주 받는거 아니냐고 녀석이 걱정스럽게 물어봤지만, 그렇게 안하면 버틸 수 없는 지경이라고 또 칭찬 아닌 칭찬을 해주셔서 녀석의 따가운 레이저를 받아야만 했었다. "니 이제 이런 과제 같은거 또 있나." "방학 시즌이라 몇 주일 정도는 없지 않을까." 멀쩡한 손으로 스무디를 빨아 먹자 얼레가 따로 없다며 녀석이 손으로 내 입가를 쓸었다. ...묻었냐? 틴트와 스무디가 섞여 나온 녀석의 손가락에 민망해져 어쩔 줄 몰라하자, 녀석은 별거 아니라는듯 제 바지를 지분거렸다. "부려먹어." "뭘." "니 나을때까지 부려먹으라고." 내 가방을 고쳐 멘 녀석이 이리 온나, 하더니 내 멀쩡한 손에서 거의 빈 스무디 잔을 가져가더니 도려 내 손을 쥐어잡았다. 스킨쉽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그러려니 하다가 문득 웅웅거리는 심장에 나도 모르게 녀석을 부여잡은 손에 순간 힘을 주었다. "와." "어?" "또 어디 아프나?" 발걸음까지 멈춘 체 시무룩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익숙했다. "......" 그런데, 22년 인생 처음으로 녀석과 함께 있는 이 상황은 좀, 낯설었다. 이상했다. 지금은 새벽이 아닌 훤한 대낮인데, 여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훅 끼쳐오는 선선한 바람에 열이 올랐다. 날씨가, 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