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훈이 사랑할 때 B
000.
약속 끝났어
나와 2:35 pm
약속 있다고 했었는데, 존나 관심 없네. 투덜거리면서도 실실 입꼬리가 올라가던 지훈이었다.
- 박지훈이 (짝)사랑을 부정할 때 -
001.
누가 봐도 지훈은 요즘 이상했다. 특히 여주에게는 더 이상했다.
"야, 너 오늘 뭐 하냐?"
"나 오늘 황제님이랑..."
"꺼져."
"너 내일 뭐 하냐?"
"나 내일 알바..."
"아, 존나."
"?"
지훈아, 그렇게 친구가 없냐. 여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니 그니까 내가 평소에 사람들한테 좀 잘하라고 했잖아. 동기들 슬슬 다 군대 가고 카니까 이제 좀 외롭나?"
"김여주. 얘가 더 예쁘냐, 얘가 더 예쁘냐. 아니면 얘? 다 별로인가."
"얘도 예쁘고, 얘도 예쁘고, 방금 가도 예쁜데. 다 예쁘다, 다. 이거 다 누군데."
"궁금하냐, 어? 왜? 예뻐서 심술 나냐?"
"?"
"다 누군지 안 궁금하냐고, 너."
"궁금하긴 한데 그다지... 왜, 니 소개받게?"
"어."
"야, 잘 생각했다. 니 안 그래도 요즘 좀 힘들어 보이더라, 옆구리도 시려 보이고... 다 니 주기엔 아깝지만 니도 얼굴 하나는 괜찮으니까."
"...닥쳐라, 그냥."
요새 늘 이런 식이었다. 딱 봐도 지훈 본인은 딱히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여자들의 사진을 가져와서 여주에게 구태여 계속 물어봤다. 무슨 원하는 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주는 지훈이 무슨 다른 일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으나 굳이 먼저 물어보진 않았다. 지훈은 개인적인 얘기를 별로 즐겨 하는 편도 아니고 누가 캐묻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으며, 묻는다고 얘기할 사람도 아니었다. 때 되면, 답답하면 지가 알아서 얘기하겠지.
여주는 늘 그렇게 선을 지키며 지훈을 대했고, 지훈은 그런 여주의 모습을 특히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인지 지훈은 오히려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는 여주를 유독 귀찮게 했으며, 둘은 그런 방식으로 우정을 지속해 왔다.
박지훈이 사랑할 때
002.
"아, 귀찮아."
지훈은 정말 그중 한 명과 연락을 하게 됐다. 김여주 주변에 남자가 있다는 사실로 짜증이 나다니. 여주 말대로 지훈은 본인이 정말 외로운 줄 알았다. 그래서 딱히 끌리지 않아도 정말, 진짜, 리얼, 대박, 완전, 혼또니 예쁘다는 타과 학생을 소개받았는데... 너무 재미없다. 귀찮기만 하고, 더럽게 어색하고.
여주에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게 꽤나 충격이었던 것일까. 지훈은 답지 않게 친하지도 않은 여자와 며칠 카톡을 달고 살아도 봤고, 오늘은 만나기까지 했는데 영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곧 지훈의 폰에 카톡이 울렸다. 보나 마나 아까 그 여자일 거 같은데. 자연스레 연락을 끊으려면 안읽씹이 최고... 어? 여주의 카톡이었다.
김여주
나 휴강이래 ㅠ
화장 다 했는데 썅
니 오늘 공강이잖아
놀자 2:22 pm
나 오늘
약속 있다고 했잖아 2:22 pm
김여주
아 맞다 ㅈㅅ
잘 노셈 ❤️ 2:23 pm
야
ㅇ
야
야 야
이렇게 쉽게 포기하냐? 2:23 pm
김여주선
약 있다며 ㅡㅡ 2:25 pm
ㅡㅡ 2:26 pm
김여주
지훈아
약속 취소하고 내랑 놀아 줄 거가? ㅠ 2:26 pm
여주 화장 다 했다니까
짜증 나 2:27 pm
ㅡㅡ 2:27 pm
김여주
먄; 2:28 pm
약속 끝났어
나와 2:35 pm
약속 있다고 했었는데. 존나 관심 없네. 투덜거리면서도 실실 입꼬리가 올라가던 지훈이었다.
박지훈이 사랑할 때
003.
여주는 상당히 열이 받은 상태였다.
박지훈 개새끼, 씨발 새끼, 미친놈...
"야, 오늘도 못생겼네. 아까 진짜 예쁜 여자랑 있다 왔는데 내 눈한테 실례다, 실례."
"김여주 너는 치마 같은 건 안 입냐?"
"땅바닥에 붙어 다니면서 당당하게 운동화만 신는 이유는 뭐냐?"
"너 그렇게 먹다가 살찐다."
왜인지 계속 기분 나쁜 말만 골라서 하는 지훈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장난삼아 종종 서로 디스하곤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스타일이나 단점에 대해, 외모에 대해 콕콕 짚어대며 시비를 걸진 않았다.
친구에게도 여자란 이유로 이것저것 따져대는 많은 남자들과 다르게 지훈은 사적인 취향을 존중할 줄도 알고, 간섭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지훈 덕에 여주는 지훈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거라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평소엔 여주가 뭘 입던, 뭘 먹던 키가 몇 센티던 전혀 신경 안 쓰던 놈이 얄밉게 말을 던져댔고 얼마 못 가 폭발한 여주였다.
"니 진짜 돌았나."
"뭐?"
"니가 뭔 여자랑 있었건, 씨발. 그게 내 알 바가. 언제부터 니가 내를 여자로 봤다고 옷이 어떻고 살이 어떻고. 뭐 잘못 먹었냐고."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내가 할 소리를 지가 하고 있네. 좆같아서 같이 못 있겠다. 니 와꾸에 맞게 실컷 예쁘고 잘생긴 애들이랑 좀 다녀라, 이제. 내 얼굴은 이게 한계네요."
"아니, 야. 여주야, 김여주!"
근데 나 그렇게 거지처럼 다니나.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여주였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샤랄라 하진 않아도 이 정도면 깔끔하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과하지도 않고. 자존감이 높진 않은 여주는 좀 우울해졌다.
박지훈이 사랑할 때
003 - 1.
개강총회, 개강파티, 신입생 환영회, 그리고 곧 있을 MT 준비, 여주의 알바... 등등으로 인해 서로 바빴던 터라 지훈은 여주와 오랜만에 밖에서 노는 게 조금 신이 났었다. 괜히 장난이 치고 싶은 지훈이 보자마자 여주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오늘도 못생겼네. 아까 진짜 예쁜 여자랑 있다 왔는데 내 눈한테 실례다, 실례."
여기까진 평소와 다름없었다. 여주의 반응도 평소처럼 먹금이었고.
"김여주 너는 치마 같은 건 안 입냐?"
난데없이 여주의 착장이 눈에 들어온 지훈이었다. 흰 티 위에 깔끔하게 걸친 남방, 밑은 핏이 예쁜 청바지. 아까 만난 여자는 원피스 입었던데. 원래 치마를 즐겨 입는 편인진 몰라도, 아무튼 나름 남자와의 약속이니까 더 신경 써서 치마를 입은 건 아닐까. 그럼 나를 만나는 여주는?
"치마? 아, 버릇이 안 돼서. 난 바지가 더 편해."
"편한 거만 입으면 어떡하냐. 원피스도 좀 입고 그래라. 요즘 날도 좋은데, 칙칙하게."
"뭐?"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여주의 착장이었다. 방금 만나고 온 다른 여자 때문에 바지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사실은 캐주얼한 청바지가 여주에게도 잘 어울렸고, 지훈이 보기에도 예뻤는데.
"땅바닥에 붙어 다니면서 당당하게 운동화만 신는 이유는 뭐냐?"
여주는 키가 평균보다는 조금 작은 편이었다.
카페에서 자리에 앉아 문득 앞을 보는데 지훈과 여주의 음료를 받아 오는 여주를 보니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키가 작으면 구두나 워커 신을 법도 한데, 꼭 운동화를 좋아하던 여주였다.
"뭐가, 또. 왜 시빈데. 니도 작잖아."
"난 잘생겼잖아."
"하,"
아까 그 여잔 키도 큰 편이면서 구두까지 신어서 괜히 키가 작은 편인 지훈을 신경 쓰이게 했는데. 넌 운동화 신어도 예쁘기만 하고. 여주와 자신의 키가 안성맞춤이라 생각하는 지훈이었다.
여주는 지훈의 계속되는 시비에 슬슬 열이 받았으나 화를 내고 싶진 않았다. 커피의 휘핑이나 퍼먹는 중이었다.
"너 그렇게 먹다가 살찐다."
다디단 휘핑은 어떻게 그렇게 잘 먹는지. 신기하게 쳐다보던 지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퍽이나 듣기 좋았다.
"니 진짜 돌았나."
지훈은 카페에 앉아 머리를 잔뜩 헝클였다. 따라 나가 봤자 말싸움이 더 크게 번질 게 뻔했다.
"진짜 돌았지..."
혼자 카페에 앉아 있던 지훈은 곧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지훈의 실수고 잘못이었다.
지훈은 단지 평소보다 꽤, 많이 신났던 것이다. 술 한 방울 안 들어가고도 왜 그렇게 들떴는지 모를 일이다.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받을 리가 없다. 고민하던 지훈은 여주에게 진지한 태도로 카톡을 보냈다. 몇 번을 지웠다 다시 썼다. 너무 길게 보내면 괜히 찌질해 보일 것 같아 정말 간결하게 사과 중심으로 카톡을 보냈건만.
"미치겠네."
돌아온 건 없어진 1뿐이었다.
박지훈이 사랑할 때
004.
지훈은 여주와 연락이 안 되는 주말 동안 예민 모드였고, 심지어 잠까지 못 자고 뒤척였다. 아니,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김여주 때문에 잠도 못 자야 하나?
평소 연애는 물론,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지훈은 잘못의 주체와 상관없이 오는 놈 안 막고 가는 놈은 붙잡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근데 왜?
여태 여주와 크게 싸웠던 일도 없었고, 자잘한 일로 삐쳤어도 몇 시간 만에 풀렸던 게 다였다. 여주는 생각보다 훨씬 지훈에게 신경 쓰이는 존재였고, 이삼일 사이에 지훈의 기분은 오르락내리락이었다. 인간관계에 있어 한 번도 고민이란 걸 해 본 적 없던 지훈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야, 쟤 네 친구 아니냐?"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학식을 먹던 지훈은 재환의 말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서는 여주가 있었다. 여주는 본인의 과 동기들과 함께 학생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
따뜻한 날씨에 맞게 꽤 살랑이는 원피스를 입고.
"존나 예쁘네..."
짝사랑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더 늦어지기 전에 머릿속에 있는 대로 B편을 적었습니다.
분량... 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첫 화보다 적은가...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게 되면, 그게 또 가까운 사람이라면 믿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괜히 평소랑 조금 다르게 비뚤해지기도, 센 척하게도 되고... 그렇잖아요? 곧 지훈이도 인정한 본격적인 짝사랑이 시작되겠군요. 아무튼, 이번 편에는 지훈이가 되게 객관적인 외모를 중요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눈에 예쁜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조금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잘 보였는지는 모르겠네요. ㅠㅠ 잘 안 보였다면 이런 제 말을 보고라도 알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말 댓글이 엄청 큰 힘이 되더라구요. 달아 주신 분들에게도 너무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