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雨時節
1991년, 아빠가 다니시는 회사가 대만 진출을 하게 된 덕분에 아빠가 속해있던 부서가 대만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우리 집안의 사정 상 한국에서 나 혼자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나도 아빠를 따라 대만에 가서
그 곳의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결정이 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한다는 것이 사실 엄청난
부담감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배워온 중국어 실력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아빠와 함께 비행기에 오른 것이었다.
"大家好. 我叫 麗皗. 從韓國回來了."
(안녕하세요. 여주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왔어요.)
내가 외국인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생각보다도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내 말문이 트이지가 않는다는
것이었다. 3년동안 배워온 중국어인데, 대화를 하려고 하면 자꾸만 말문이 막히는 게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떠듬떠듬 중국어로, "아직 중국어로 대화를 하는게 익숙하지가 않아." 하며 친구들에게 얘기하니,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있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천천히 말하겠다며 여김없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한다.
1교시 영어 수업은 반은 알아듣고 반은 정신없이 휩쓸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하시는 이야기의 반이라도
알아듣는게 어디냐 하는 마음으로, 이번주 안에 꼭 언어 중점 교실을 신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나였다.
1교시가 끝나고 영어 선생님과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 잠깐 상담을 하러 도착한 교무실은 꽤 한적한 분위기였다.
우리 교실에서부터 함께 온 영어 선생님 이외에 다른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이라곤 영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남자애 하나 뿐이었다.
" 賴冠霖 , 再等等吧."
(라이관린은 조금만 더 기다려주렴.)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로 시작된 상담은 한 오분 쯤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저 남자애 영어 선생님을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하는 생각까지 미쳤을 때 다시금 영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他叫 賴冠霖."
(얘는 라이관린이야.)
느닷없이 남자애의 이름을 나에게 소개시켜주시는 선생님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니,
영어선생님은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나의 얼굴을 보고 소리내어 웃으시며 마저 말씀을 이으셨다.
"賴冠霖, 他叫 麗皗. 她是韓國人."
(라이관린, 얘는 여주이고. 한국인이야.)
당황스러운 감정을 넘어 나의 낯가림 지수를 최대치까지 이끌어올려주신 선생님의 대리소개에 내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을때 쯤, 남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你好."
(안녕)
약간 낮고, 덤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남자애를 바로 마주 봤을 때, 무표정해 보이는 그 남자애의 얼굴이
참 말갛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이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계시던 선생님은 "其他班的朋友都交得."(다른 반 친구도 만들어야지.)하시며
나 또한 라이관린이라는 남자애한테 인사를 하기를 기대하는 눈빛을 마구 보내셨고,
나는 그저 어색하게
"你....好."
*
담임 선생님과의 방과후 상담까지 끝낸 뒤의 하늘은 생각보다도 많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 뿐이 아니라 내리는 소리가 무섭게도, 비는 억세게 쏟아붓고 있었다.
늦여름에 갑자기 쏟아지던 비가 그렇게나 사람을 서럽게 만들줄이야.
중국어 좀 배웠다며 나름 자신이 있었을 때는 언제고, 대만에 와서 막상 현지인들과 대화를 하려니
입을 열기가 어려워 말을 하더라도 자꾸만 버벅이는 바람에 속이 상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1교시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의 절반을 이해하던 나의 뇌는 2교시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과부하가 되었는지
그 뜻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채 남은 교시 동안 쏟아지는 중국어를 말그래도, 듣고만 있었다.
하룻동안 쌓인 긴장감, 그리고 낯선 공간, 친절하긴해도 여전히 낯선 사람들.
아빠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데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는 이 상황에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열일곱이나 나이를 먹었지만 이제 막 적응하려고 시작한 곳에서 우산도 없이, 억세게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는 것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고.
낯선 대만에서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아빠와의 연락도 되지 않는 상태에 놓인 나는.
혼자 외딴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기분에 눈물도 찔끔씩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을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친구가 매우 소수였고, 쉬는 시간마다 과목 선생님들과 상담을 하는 바람에,
우산을 함께 쓰자고 쉬이 부탁을 할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
아니, 지금은 상담을 하느라 늦어진 시간 탓에 애초에, 돌아다니는 학생들조차도 보이지가 않았다.
아빠와 연락이 되기까지 기다려보자는 결심을 한 채로 나는 학교 현관 계단에 앉아 몸을 웅그렸다.
늦여름이었지만 비가 내리고 있는 터라 살짝 서늘한게 가만히 있으니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덜 추우려나 싶어 몸을 더 웅크리자니 전보다 더욱 서러운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在這裏幹什麼呢?"
(여기서 뭐해?)
세찬 빗소리만 울리고 있는 이 곳에서 들려온 남자애의 목소리는 우울하게 잠겨있는 나를 끄집어내는 듯했다.
여기서 뭐하고 있냐는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날 조금은 들뜨게 만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목소리가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나름대로의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반가웠던 것 같기도...
"一起去吧."
(같이 가자.)
이내 무릎 위에 올려있던 나의 손을 잡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긴 그 애의 표정은 꽤나 담담했다.
"謝謝."
(고마워.)
우산에 튕겨나가는 빗물, 빗소리에 내 인사가 잘 들렸을지 몰랐다.
곧, 쑥스러운 듯 살짝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그 애의 얼굴만이 느리게, 보여졌다.
살짝이 나른한 느낌이 묻어나는 그 애의 웃음을 보고 있자니 한 때 꽂혔었던 한시의 구절이 떠올랐다.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밉던 비였는데.
그 애와 함께 있는 지금 우산 너머로 보이는 이 빗줄기들이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을 보면,
너 또한 마찬가지로 나의 호우시절임이 분명했다.
"我的名字,賴冠霖. 還記得嗎?"
(내 이름, 라이관린. 기억해?)
너의 입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내 시선이 민망했던지 "我的名字的意思是梅雨季節."(내 이름 뜻, 장마야.) 하고
자신의 이름 뜻을 말해주며 어색한 웃음 소리를 내뱉는 너의 얼굴이 또 느리게 스쳐갔다.
"今天正好和搭配, 梅雨,"
(오늘이랑 딱 어울리네, 장마.)
그 애의 이름이 가진 뜻은 장마였고, 그 애는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그 애가 우산을 씌워줬건만, 어쩐지 나는 이 빗줄기들에 자꾸만 흠뻑 젖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애는 장마이고, 호우지시절이었다.
때를 알고 내린 좋은 비.
아, 장마가 세상을 덮었다.
*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서는 내가 내릴 정류장에서 자신의 우산을 넘겨주던 그 애의 웃는 얼굴을 며칠동안이나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였다. 가끔씩 학교 복도를 지나다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고, 하교시간에 학교 현관에서 만나게 될 때면 같이 버스를 타기도 했다.
그렇게 몇 주가 빠르게 지나갔다. 학교는 곧 다가오는 개교기념일 행사를 기다리는 학생들로 활기가 넘쳤다.
우리 학교는 개교기념일의 큰 행사로 학교 전체 학급이 퍼레이드와 캠프파이어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이런 재밌는 행사는 절대 해보지 못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친해진 반 친구들과 퍼레이드를 위한 준비를 자율 학습이 끝난 늦은시간까지도 계속 하는 중이었다.
개교 기념일 당일, 아침에 잠시 마주친 라이관린을 보고, 그 애가 퍼레이드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궁금해졌다.
얼른 행사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니, 시간이 더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
.
.
우리 반은 영화 빽투더퓨처 테마의 퍼레이드를 하였다.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따라해 한껏 부풀린 머리를 하고 빽투더퓨처의 마스코트인 자동차를 따라 걸어가다보니 우리가 걷고 있는 트랙가까이 빨간 후드를 입고 손을 흔들고 있는 라이관린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에도 분명 인사를 나누었지만,이렇게 인사를 하니 더 반가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행사 자체로도 마음이 붕 떴는데, 평소와 다르게 교복 차림을 하지않은 라이관린의 모습은 충분히 새로웠기 때문이다.
우리 반의 퍼레이드가 끝난 후 자리에 앉아 그 애의 반이 퍼레이드를 하기까지 기다렸다.
행사의 진행이 술술 되어가던 때, 학교 건물 안에서, 앞 바구니에 수건을 두른 외계인 인형을 실은 자전거를 탄 남자애 하나가 빠르게 페달을 밟고 나왔다.
낯익은 빨간 후드를 입은 채였다. 라이관린 반은 영화 이티를 주제로 했나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눈은 온통 그 애를 쫓았다.
아까 라이관린이 인사를 했던 것 처럼 나도 가까이서 그 애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에 곧바로 자리를 퍼레이드 트랙 가까이로 옮겼다.
자전거를 탄 채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가던 그 애는 자신이 타고 있던 자전거를 옆에 있던 친구에게 건네주더니,
내가 앉아있는 트랙 가까이로 뛰어오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검지손가락을 내미는 라이관린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 있으니, 그 애는 나의 검지 손가락을 가져가 자신의 손가락과 마주대었다.
한 3초 정도 그렇게 있었을까, 다시 손을 흔들며 저만큼 뛰어가는 그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사람 얼굴이 이렇게나 화끈거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캠프 파이어를 설치할 무렵은 이미 하늘에 어둠이 깔린 후였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에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전교생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모여앉아 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는게 새롭고 신기했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 아이들의 곁을 살짝 벗어나 운동장의 외곽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음료수를 사와야겠다며 일어선 친구들에게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을 건넨 뒤 꽤나 높게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아까 입고있던 빨간 후드를 걸친 채로 서 있는 그 애의 모습이 보였다.
"旁邊坐嗎?"
(옆에 앉아도 돼?)
얼굴이 또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當然了" (당연하지.)하고 대답한 뒤, 옆자리에 털썩 앉는 그 애의 옆모습을 보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이 춤추고 노는 모습만을 한동안 구경하였다. 옆에서 그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上課怎麼樣?"(수업은 어때?) , 이런 얘기까지는 여러번의 하굣길에서도 나눠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아직도 선생님들의 말이 너무 빨라서 반 정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얘기했다.
"我教你?"
(내가 가르쳐줄까?)
*
캠프파이어 앞에서 스터디 약속을 잡고, 스터디 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혹시나 그 애의 앞에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망신을 당할 까봐, 약속 전날에는 새벽까지 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다. 약속 장소인 맥도날드까지 걸어가는 길에서는 심장을 몇번 쓸어내려야 했다.
학교 이외의 장소에서 그 애와 만나는 게 처음이라 생각보다도 많이 긴장이 됐거든.
약속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맥도날드에는 이미 그 애가 자리를 맡아놓고 앉아있었다. 퍼레이드 때 말고는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료수와 간단한 튀김 간식을 시킨 뒤, 그 애는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을 펼치고선 강의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개념을 설명하는 그 애의 모습을 아닌 척, 감상했다. 그 때, 내가 잘 집중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 고개를 든 라이관린의 눈과 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무언가 받아적으려 했던 것처럼 허겁지겁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들었다.
그 아이의 시선이 공책으로 옮겨졌다. 공책에는 '여주' 라고 내 글씨체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모양새가 앞면의 귀퉁이를 채우고 있었다.
그 글씨를 본건지 그 애는 한글로 적힌 나의 이름에 관심을 보이며 물어왔다.
"韓國語,你的名字,就會變成這樣?"
(한국말로 너 이름 적으면 이렇게 돼?)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그 글씨를 이리저리 구경하더니, 또 다시 그 애의 입술이 열렸다.
"我的名字都寫上吧"
(내 이름도 써줘.)
'라이관린' 하고 최대한 예쁘고 반듯하게 그 애의 이름을 적어 보여주니, 그 글씨를 따라 자신의 공책에 옮겨적으려는 듯 펜을 집은 그 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펜을 꽉 잡고 자신의 공책 표지에 한글을 적고있는 라이관린의 얼굴은, 한껏 집중을 한 채였다.
또박또박 적으려고 노력한 듯한 글씨체에 괜스레 웃음이 지어졌다. 흐뭇한 표정으로 '라이관린'을 적어놓은 공책 표지를 바라보는 그 애의 얼굴을 보니 나도 같이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麗皗,我也想學習韓國語."
(여주,나도 한국어 배우고 싶어.)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그 애의 말에 나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가르치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어떤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그 애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나는 "我教你"(내가 가르쳐줄게.)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
그 애와 주말마다 함께 스터디를 해서 그런지, 내 중국어는 날이 갈 수록 늘었고, 가르치는 소질이 없는 나에게 한국말을 배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라이관린의 한국말 실력 또한 꽤 괜찮았다. 일상적인 말 몇마디는 간단한 한국말로 나눌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한 학기가 끝나고 방학 중에도 스터디를 계속 하였다. 덕분에 그애와 나는 서로 장난을 칠 정도로 많이 가까워졌다.
그 애의 웃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살짝 휘어지는 눈도, 한 쪽 볼에 생기는 보조개도, 완벽했다.
이 곳 대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라이관린과 함께이고 싶었다.
이런 나의 소원이 생기기가 무섭게, 엄청난 사건이 닥쳤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규모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어마어마한 파도를 그대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여주야, 뉴스 봤지. 우리나라가 대만이랑 수교를 끊는 바람에, 여기서 아빠 회사 상황이 굉장히 안좋아졌어.
대만에서 계속 회사를 운영하기에 너무 손실이 클 것 같아. 대만사람들이 느끼는 한국에 대한 반감이 엄청 심하더구나."
1992년 8월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구나."
*
그 애에게 그만의 수업을 듣고 싶었고, 한국말을 마저 가르쳐주고 싶었고, 스터디를 하던 주말에 가끔 놀러도 가고 싶었다.
아직 함께 해보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잠시 머물다 이렇게 일찍 떠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라이관린과 그저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 너무나도 큰 바램이었나? 이럴거면 시작부터 하지 말아야 했다. 이렇게 금방 헤어지기에는 그 짧은 시간동안 그 애와 같이 보낸 시간들이 그저 기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가슴속 깊이 차지한 추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그 애에게 직접 하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내가 한국으로 다시 가야한다는 것을 끝까지 그 애가 끝까지 모르고 있는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나는 그 말을 라이관린,에게 영영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말을 하기 위해 그 애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만 있어도 눈물이 울컥울컥 올라와 목을 턱하고 막아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주말은 찾아왔고, 나는 라이관린을 만나야 했다. 한국 귀국을 일주일하고도 이틀 남겨둔 날이었다.
전학 수속은 이미 아빠가 해결해 놓은 상태였고, 내가 할 일은 오로지 이 일을 그 애에게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평소처럼 라이관린은, 무표정한 듯한 얼굴 속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나도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아무 일 없는 것 처럼 인사를 했다.
맥도날드까지 가는 길,우리 둘 사이에는 그 애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그 애의 말 속에는 간혹 의미없는 농담도 몇가지 있었다.
그 애와 남은 시간동안 최대한 즐겁게, 될 수 있는 한 많은 대화를 나눠야된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내 신경은 온전히 한국에 돌아가는 것에 쏠려있었다.
아무래도 이 날 스터디는 오로지 라이관린의 수업으로만 이루어졌다.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컨디션이 별로인 것을 눈치 챈 듯한 라이관린은
오늘은 일찍 스터디를 마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아무런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평소같으면 시답지 않은 얘기들만 나누더라도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낯선 분위기가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분위기도 다 나 때문에 이렇게 망쳐진 것이라는 생각에 어쩐지 울컥하였다.
긴 침묵 끝 내가 내리던 정류장에 도착하자, 항상 그랬듯 내가 먼저 내리기 전, 라이관린은 살짝 미소를 띈 채 나에게 조심히 들어가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애에게서 등을 지는 순간
"或許去的時候,去吧.千萬."
(혹시 갈 때는 간다고 말해줘, 제발.)
내리기 전 뒤에서 들려오는 담담한, 마지막 그 애의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말을 하고 있는 라이관린의 표정을 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쩐지 그 덤덤하던 목소리처럼 무표정할까봐 무서워서.
*
나는 그 애의 집에, 아프다는 핑계로, 이번 주말 스터디는 못하겠다는 거의 통보 수준의 전화를 걸었다.
정말 이기적이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내가 떠나고나서야 뒤늦게 듣게 될 라이관린의 기분을 짐짓 헤아리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말을 전하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당장 내일 모레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흘러가는 시간은 막을 수가 없었다. 매일을 여기없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일어났다. 잠을 잔 건 아니었고, 그저 아빠가 걱정을 하실까 침대에 몸만 눕힌 것이었다. 그 애와 헤어지는 것으로 아파하는 요즘, 어떻게 내가 맘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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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공항으로 떠나기 몇시간 전, 나는 그 애에게 전화 한통이라도 걸려오길, 내심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면서도.
공항으로 떠나는 새벽, 나는 이미 지나가버린 그 며칠을 후회했다.
떠난다고 미리 말할걸, 말하고나서 어제 얼굴을 마주보고 잘 지내라고 인사 한마디를 해줬어야 했는데.
그 후회를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부터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부르는 아빠를 뒤로 한 채, 공중 전화로 달려갔다.
그리고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로, 전화기를 들었다.
어느새 너무 익숙하도록 외워버린 그 애의 집 전화번호를 누르는 중이었다.
"관린아, 제발 받아줘."
음성사서함으로 들어갈 내용이 녹취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나서야 그 애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신없이 말들을 쏟아부었다.
"我回韓國. 事先我想說的,和你分手的,感覺這就是討厭."
(나 한국으로 돌아가. 미리 말해주고 싶었는데, 너랑 헤어지는 걸 실감하는 게 싫었어.)
"我現在在機場.你真的非常多,我會想念."
(나 지금 공항에 왔어. 니가 정말 엄청 많이 그리울거야.)
"這段時間你很喜歡他了"
(그 동안 너를 많이 좋아했어.)
놀란 아빠가 나를 잡아끌고 나서야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대만에 와서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토록 소중한 사람을 만들 거라고는 오기전엔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얼른 심사를 받아야한다는 아빠의 애원어린 재촉에 겨우 절차를 밟고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대만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을 밟는 중에도, 그 애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아까 음성사서함에 남긴 메시지에서 잘 지내라는 말을 빠트린 것이 문득 생각이 나서 또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제 정말, 정말 마지막인가보다.
관린아 잘 지내.
*
아프다는 여주에게 스터디를 못하겠다는 전화를 받은 이 후로 단 한통의 연락조차 없는 것을,
관린은 이불을 덮고 누운 와중에도 여주 걱정 뿐이었다.
여주가 많이 아픈건지 도저히 걱정이 돼서 잠을 설친 관린은 아침 일찍, 음성사서함 메세지라도 남기기 위해 항상 외우고 다니던 여주네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語音信箱,語音短信 1-
(음성 사서함, 메시지 1통)
어쩐지 메시지를 남길만한 사람이 없는데 음성사서함에 한 통의 메시지가 와있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던 관린은
조용히 음성을 들으려 숨을 죽였다.
"我回韓國. 事先我想說的,和你分手的,感覺這就是討厭."
(나 한국으로 돌아가. 미리 말해주고 싶었는데, 너랑 헤어지는 걸 실감하는 게 싫었어.)
"我現在在機場.你真的非常多,我會想念."
(나 지금 공항에 왔어. 니가 정말 엄청 많이 그리울거야.)
"這段時間你很喜歡他了"
(그 동안 너를 많이 좋아했어.)
여주의 목소리였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니.... 요즘 여주가 내뿜는 분위기가 부쩍 가라앉아있길래,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 챈 관린이었다.
하지만,설마 여주가 한국으로 떠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던 관린이었기 때문에 여주가 무슨 일인지 말해주기 전까지는 섣부른 상상을 하지로 않기로 한 것이었다.
가야할 때엔 제발 간다고 말해달라는 말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졌던 지난 주 스터디 날, 빠르게 버스를 내려버리던 여주의 뒷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소수의 확률이었지만, 지금 공항으로 달려가면 마지막 여주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며
관린은 아무렇게나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집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 아저씨를 재촉하여 도착한 공항 입구에서 공항 로비까지 온 힘을 다해 달려온 관린은 빠르게 제 앞을 스쳐가는 사람들 속에서 두리번 거리며
여주와 비슷한 모습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 넓은 곳에서, 여주가 몇시에 떠나는 지 정확한 시간도 모르는 상태로, 무작정 여주를 찾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저절로 여주를 찾고 있는 관린이었다.
"麗皗, 我來得太晚了吧."
(여주야, 내가 너무 늦게 왔나봐.)
*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열아홉이라는 나이를 먹도록 라이관린과, 그 애가 있던 타이베이를 잊지 못했다.
아직도 우리나라와 대만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으므로, 나 혼자 성인이 되기 이전에 무작정 대만으로 가는 것에 아빠의 극심한 반대가 뒤따를 거라는 것이 당연하게끔 여겨졌다. 아빠의 허락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고, 나는 고민 끝에 타이완 대학에 원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아무것도 하지않으면 자꾸만 관린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죽어라 공부만 했다.
그 결과로 나는 당당히 아빠에게 타이완 대학의 합격서와 입학 통지서를 보여드리고 대만으로 가는 길에, 다시금 오를 수 있었다.
타이베이에 있으면 언젠가 한 번이라도 그 애를 마주칠 수 있을까 하던 기대감은, 날이 갈수록, 무모함으로 바뀌어갔다.
*
잘 풀리지 않는 과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중, 갑자기 예전에 그 애와 함께 스터디를 하던 맥도날드가 생각이 났다.
어느 새, 내 발걸음은 우리 동네의, 우리가 함께 갔던 그 맥도날드로 향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맥도날드로 가는 길의 지난 추억이 떠올라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우연히 자리를 잡아 앉은 곳의 벽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코르크 보드에 꽂혀있었다.
주문시킨 메뉴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사진들을 쭈욱 살펴보는데.
낯익은 빨간 후드의 남자애와 머리를 한껏 부풀린 여자애가 손가락을 마주대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정말 우연인걸까? 아니야, 진짜 그 애가 해 놓은 거면 어떡해.
자세히 들여다본 사진 밑에는 또박또박 적힌 한글이 보였다.
가슴이 너무 빨리 뛰었다.
[여주야. 그 날 내가 공항에 너무 늦게 도착했어.]
그 애의 반듯한 글씨만 쳐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그 애와 같은 공간에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어 허겁지겁 우산을 챙겨 일어났다.
그 동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막 튀어나오려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체가 안돼서 바닥을 보며 빠르게 출입문 쪽을 향하는데, 누군가가 우두커니 그 앞을 막고 서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쳐다 본 얼굴이 참 말갛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의 시선이 한참 동안 공중에서 얽혔다.
"我的名字,賴冠霖.... 還記得嗎?"
(내 이름, 라이관린. 기억해?)
......
바깥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너는 오늘도 나의 호우시절이었다. 안부를 나눌 겨를이 어디있어. 지금 나의 호우시절이 눈 앞에 있는데.
그저 와락 껴안을 뿐이었다.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나의 호우시절.
나는 열여덟 그 때처럼 흠뻑 젖었다.
아, 장마가 세상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