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을 원합니다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죠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무지개를 볼 수 없어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멜로디가 이제 막 1절을 끝냈을 때, 주문한 아이스티가 얼음을 녹이며 딸각-, 소리를 냈다.
- “나는 널 왜 한 번도 못 봤지?”
- “나도.”
학교 정문에서 어젯밤처럼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그를 이번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커피라도 마시고 가. 진짜 미안해서 그래. 구깃한 목소리로 가방 고리를 소심하게 잡는다. 도무지 입을 벌리지 않는 상대방을 살피며 거부의 기운을 느끼고 있을 때, 먼저 카페로 걸음을 옮긴 건 다름 아닌 그였다.
- “학교는 빨리 오는 편이야?”
- “그냥, 닫히기 전에.”
- “지각 많이 해?”
- “지각은 부승관이 많이 하지.”
- “아, 하긴 그래.”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바로 옆 반이었음에도 서로를 보지 못한 것이 용할 따름이었다. 사실, 그는 부산에서 살다 지난해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전학을 왔다고 했다. 전학생이면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텐데, 왜 나는 듣지를 못했는가. 어색한 분위기에 붉은 빨대를 잘근 깨물었다.
- “내가 교실 지박령이라 다른 반 애들은 잘 몰라.”
- “그래 보여.”
- “그거 욕이야?”
- “욕은 아니야.”
……욕 같은데 그거.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입구가 구겨진 빨대를 휘휘 돌리다 문득 상대방 말투 속에 숨어있는 억양을 깨닫고는 옅게 미소 짓는다. 사투리였구나, 귀엽게.
장난기가 솟구치고 입이 근질거렸다. 승관이와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닌 영향 때문인지, 본래 심심하게 살던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항상 승관을 닮아갔다. 자, 목소리 가다듬고.
- “내, 내도 부산 말 쓸 줄 안다이가. 밥 묵나.”
근본 없는 사투리 공격에, 그는 입속에 머금은 아이스 라떼를 뱉어냈다. 테이블에 흩뿌려진 커피 향, 덕분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우릴 향한다. 열정적인 관심에 쑥스러움을 느낄 무렵, 그는 꽤나 크게 웃으며 냅킨으로 손을 닦아냈다.
- “그런 거 누가 알려줬어. 데려와.”
그의 웃음기 가신 목소리는 누구든 데려오지 않으면 큰일을 치룰 듯 싶었다.
……승관아 어쩌지.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Chapter. 3 〈두근거려>
‘공부 같이하자. 나 19번 알려주면.’
#12.
꼬맹이 승관이와 나는 그 당시 방영했던 인기 드라마를 챙겨보는 것이 낙이었는데, 특히 주인공의 사투리를 따라 하는 놀이를 자주 했었다. 표준말과 다르게 그루브 넘치는 사투리가 어린 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또 나름 잘 한다는 주변 어른들의 칭찬에 두 꼬맹이의 어깨는 더욱더 기세등등 했으리라.
그런데 승관아, 우리가 여태껏 알아 온 사투리는 사투리가 아닌가 봐. 아마 그 주인공도 글로 사투를 배웠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지금 앞에 있는 현지 사람이 당황했거든. 몰려오는 부끄러움은 지난날을 상기시키며 미친듯한 창피함을 얹었다. 아, 괜히 했어.
- “이제 몸은 괜찮아?”
- “응?”
- “어제 아팠던 거.”
그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며 아이스 라떼를 들이켰다.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한 채.
- “아…… 덕분에 많이 나았어. 약도 먹고 있고.”
- “반성문은?”
- “아팠다니까 반절 줄여 주기는 했는데, 그래도 손 떨려 죽는 줄 알았어."
볼펜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손바닥을 펴며 울상을 지었다.
- “이것 봐.”
- “자국났네.”
- “수전증이 오지 않을까?”
- “그러기엔 너무 멀쩡하지 않아?”
- “내일부터 손 떨리면 어떡해.”
- “그럼 전화해, 병원 가게.”
얼음을 아작 씹으며 장난스럽게 답하던 그가 대뜸 인상을 구긴다. 손이 아파도 윤정한 선생님을 볼 수 있냐는 물음 때문이었다. 윤정한 이미 여자친구 있어. 매우 단호한 목소리로 꿈 깨라는 말을 돌려 말한 거다. 너는 절대 안 된다는 의미잖아. 괜한 심술이 불어 눈을 가늘게 뜨는 나였다.
- “뭐야, 그래서 물어본 거 아니거든.”
- “아님 말고.”
- “떠 본 거야?”
- “그럴 리가.”
대화가 계속될수록 느껴지는 패배감은 반드시 기분 탓이어야 한다. 응, 그래야만 해. 삐죽 내민 입술로 빨대를 덮는다. 숨을 크게 들이키면 곳곳에 퍼지는 진한 복숭아 향. 맛있다. 달달해.
- “그거 맛있어?”
- “생과일 마시는 느낌?”
- “인공료잖아.”
- “……느낌이 그렇다구요.”
시시콜콜한 대화는 별다른 진전 없이 과거로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승관이 떠오른 것은, 조금 전 그가 남긴 한 마디 때문이었다.
- ‘하긴, A대 갈 거라고 쌤들이 맨날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데 당연히 유명하겠지.’
테이블에 난 물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머릿속에 박히는 끝도 없는 질문들, 그것들을 압축할 수 있는 문장은 단 하나였다.
- “이지훈, 너 공부 잘해?”
- “아니.”
- “승관이가 잘 한다고 그랬는데.”
- “걔가 더 잘해.”
수리 19번. 우리 반에서 딱 한 명 맞췄는데 그게 부승관. 아직도 19번의 쓰라림을 잊지 못했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콧잔등을 긁었다.
- “나는 머리 좋은 애들 부럽더라.”
- “다 노력으로 하는 거지.”
- “공손함이 오늘의 주제야?”
- “난 진심.”
어깨를 으쓱이며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어낸다.
그마저 여유로워 보였다.
사실, 혼자 공부하는 일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터였다. 승관이 속한 ‘ABC대 스터디 그룹’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운영하는 심화 반까지도 참여해 봤지만, 어쨌거나 둘 다 있어 ‘김여주의 실패작’이었다.
뭐든 혼자 생각하고 해결하는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학업이든, 사적인 만남이든, 타인과 어울린다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보다 곱절은 더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두 명도, 세 명도 아닌 단 한 사람과 같이 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라면.
- “저기, 있잖아.”
무슨 부탁을 하든 간에, 말하기 직전의 윗배는 늘 간지러움을 느낀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 “너랑 같이 공부하면 안 돼?”
- “내가 왜.”
분위기의 판도가 바뀌는 건 겨우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까칠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가 반문한다. 내가 왜 그래야 해.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카드를 갖는다는 건 오히려 그에게 마이너스가 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눈을 맞춘다. 눅눅한 아이스티 바다에서 헤엄치는 빨대가 회오리를 만든다.
- “그냥…… 너랑 같이 공부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너랑 같이 있으면, 이 지독한 시간들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아서.
- “언어도 그렇고.”
오늘 새벽, 버스 기사 아저씨께 인사를 건넬 때도.
- “수리도 그렇고.”
아침에 매점에서 얻은 삼백 원짜리 요구르트 마실 때도.
- “외국어도 그렇고.”
점심시간에 흘러나온 팝송을 들을 때도.
- “탐구도 그렇고.”
'국민'인지 '대학생'인지 이상한 모집단 문제를 풀 때도.
- “같이 하면 의지도 생길 거고…… 아무튼 더 낫지 않을까?”
오늘 하루 내내, 정말 다 네 생각만 나서.
널 생각하는 순간마다 웃는 내가 좋아서.
그래서…….
마지막 얼음 조각을 아작 씹으며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였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상대방의 눈치를 본다. 두 손 모아 하는 기도 주문은 오직 하나. 제발 거절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 “너, 19번 맞았지.”
- “……어?”
- “수리, 19번.”
김이 폭-, 새어 나온다. 기다리는 답은 고사하고, 그는 지나간 수리 문제를 들춰내며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알았냐는 추가적인 물음에, ‘부승관’이라는 간단한 대답과 함께 말이다.
수리 시험 직후, 너나 할 것 없이 한창 예민한 상태였다. 옆 반에서 시험지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온 승관이 보름달 같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19번 답 뭐야? 17 아니야? 당시 난 매우 피곤한 상태였으므로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19번을 맞춘 순간이 고등학교 3년 생활 중,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라 했다.
어쨌거나 지훈이 알고 있다는 것은, 승관이 19번을 쟁취한 자신의 영웅담을 전파할 때 사이드 메뉴로 내 얘기까지 덤으로 얹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너구리 같은 자식.
- “일부러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닌데……. 네가 틀린 문제라고 하니까…….”
- “…….”
- “아무튼, 답은 진짜 우연히 찾은 거야. 배운 공식이 아니라 약간 꼼수…….”
- “야.”
- “……응?”
말을 다 마치기도 전, 날 향한 그의 두 눈이 물고기 꼬리처럼 살랑거렸다.
- “공부 같이하자. 나 19번 알려주면.”
여태 잘게 터지던 기침이 사라진 건, 아마 이때쯤이었으려나.
#13.
- “주말에 5시부터 8시까지.”
……
- “나도 공부해야 하니까 시간은 길게 못 빼. 과목 순서는 나중에 보내 줄게.”
불쑥 내미는 휴대폰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키패드를 꾹꾹 누르며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 상황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부탁을 쉽게 응한 것도, 나보다 더 신난 모습도. 오히려 본인이 더 힘들 텐데 말이다. 휴대폰을 울리는 낯선 번호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곱게 박힌 열 한자리. 이지훈, 네 번호.
- “문자 할게.”
- “응, 내일 봐.”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사거리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입 밖으로 깊은 한숨이 터진다. 혹여 거절할까 불안했던 마음을 연소하려 두 손으로 발갛게 물든 볼을 덮는다. 같이 공부하자는 말을 앞세워 간접적인 고백을 한 터라 심장은 계속 쿵쿵댔다.
- “이지훈…….”
여전히 카페 앞에서 부재중 목록에 띄워진 낯선 번호를 바라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냐. 호호 숨을 뱉는다. ‘이지훈’, 세 글자를 입력한 손가락은 무언가를 적고 지우고, 또다시 적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한참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으며 웃는다.
자주 걷는 길거리가 유독 예뻐 보이는 까닭은 햇살이 좋아서, 바람이 좋아서, 공기 냄새가 좋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향기가 좋아서다. 내가 기분이 좋다거나 행복하다거나 두근댄다거나 하는 것들 따위가 절대 아니라는 거지.
보도블록을 색깔별로 밟으며 가게 스피커에서 흐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릴 때였다. 주머니에 꽂은 휴대폰이 진동을 낸다. 발신자를 확인한 즉시, ‘보도블록 색깔별로 밟기 미션’는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내 임무는 이지훈, 너 하나.
- “……여보세요?”
- “그냥, 번호 맞나 확인 차.”
아까 전에 내 휴대폰으로 자기 번호 뜨는 거 바로 옆에서 봤으면서.
이거 오해해도 되는 거지.
- “뭐야, 싱겁게. 끊는다.”
망설임 없이 종료 버튼을 누르는 가혹한 내 손가락.
하나.
둘.
셋.
마음 시계로 정확히 3초를 센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면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신호음. 곧 휴대폰 너머로 퉁명스럽지만 여전히 듣기 좋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귓가를 기분 좋게 울린다.
- “왜.”
- “그냥, 나도 확인 차.”
……그 있잖아, 사람 진짜 목소리하고 통화할 때 목소리 분위기 자체가 다른 거. 이지훈, 네가 딱 그래. 낮게 웃는 것도, 숨을 고르는 것도…… 지금 되게…….
- “왜 따라 해, 바보야.”
- “내가 언제.”
- “지금.”
- “아니거든.”
- “맞는데.”
기다렸던 초록 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발을 통통 튀기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서로의 번호가 맞는지 확인 전화를 했다던 우리의 통화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심심하면 자기 전에 문자 보내라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잔뜩 열 받은 휴대폰이 한 사람의 이름을 남긴다.
‘이지훈’이 아닌, ‘지훈이’라는 이름으로.
#14.
스터디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만남의 주 장소는 학교 근처 스터디 카페 [썬팁스]였고, 가끔 주말에 무를 수 없는 사정이 생기면, 전날에 미리 약속을 잡아 진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했다. 꼬박 한 달이 넘도록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문자와 통화의 빈도수도 높아져 갔다. 최신 통화, 문자 목록의 첫 번째는 승관이 아니라 지훈이일 정도였으니.
- [어디야?]
- [썬팁!]
- [한 십 분 정도 늦을 듯]
- [알겠어!]
- [느낌표 뭐야]
- [오늘은 느낌표를 쓰고 싶어!]
- [!!!]
- [지훈아]
- [왜]
- [십 분 지났는데 언제 와?]
- [문자 보낸 지 30초도 안 지났어]
6월 모의고사를 일주일 앞으로 남겨둔 시점이었다. 총정리를 위해 까페에 앉아 그를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정류장 앞에 있는 사람이 지훈이였으면 좋겠다. 골목길에서 나오는 사람이 또 지훈이였으면 좋겠다.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지훈이로 보이는 마법 같은 착각에 문제집에 얼굴을 박는다. 이건 병이야. 한 마디로 속앓이 병. 빌딩 전광판 광고를 멍하니 쳐다보다 톡톡 맺히는 물방울에 고개를 들었다.
비가 내린다. 소나기인 듯 회색 콘크리트 바닥이 삽시간에 젖어간다. 아직 보이지 않는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산은 챙긴 건지, 옷은 따뜻하게 입었는지. 아무렴, 여름이어도.
- “이지훈, 여기!”
카페 문 앞에서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는 그에게 손을 흔든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가 천천히 다가온다.
- “많이 기다렸지.”
- “아니, 괜찮아. 밖에 비 많이 와?”
- “어, 빨리 그치면 좋을 텐데.”
하얀 티셔츠, 까만 자켓., 그리고 곧게 뻗은 청바지와 슬립온까지. 오늘도 완벽하다 지훈아. 넌 보면 볼수록 괜찮은 것 같아. 학교뿐만 아니라, 밖에서 그를 만날 때도 하루에도 몇 번씩 드는 생각이었다.
교복을 입어도, 사복을 입어도, 심지어 무릎이 다 늘어난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넌 멋질 것 같아. 눈을 뗄 수도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김여주 취향 제대로 저격해 주시고.
얼음물을 들이키며 웃는 귀여운 얼굴에 소리 없는 심호흡을 해 본다. 아, 심장에 해로워. 진정하자.
- “오늘은 외국어부터.”
- “이거 뭐야? 내 꺼야?”
- “네 꺼야.”
- “평생?”
- “수능 평생 보게?”
- “그런 말은 농담이라도 하지 말자.”
- “첫 페이지 펴 봐.”
그가 노트 한 권을 꺼내 필통을 집는다. 겉표지에는 ‘김여주 영어’라는 투박한 제목이, 속지는 내가 계속 틀리는 문항이 유형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중요한 부분은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다. 살면서 이런 배려를 받아봤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역시나 그가 처음이다.
- “……아, 스펠링 하나 틀렸다. 미안.”
민망한 듯 수줍게 웃으며 안경을 매만졌다. 그는 공부를 시작할 때면 항상 얇은 테가 둘러져 있는 동그란 안경을 썼는데, 이따금 그것이 흘러내리면 예쁜 손가락으로 살짝 올리며 눈웃음 지었다. 그럴 때마다 현재 천문학 과학자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초승달은 하늘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 앞에 있는 소년은 온종일 가지고 있는 걸요.
그에게서 환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면, 모두가 날 미친 사람이라 취급할 거야. 뭐, 그러거나 말 거나. 오늘도 예뻐 지훈아.
- “여기서 왜 5번 인지 알아?”
그의 입술은 마치 벚꽃 잎으로 물든 작은 꽃송이 같았다.
- “김여주.”
살짝만 스쳐도 손가락에 벚꽃 물이 스며들 것처럼 그의 입술은 촉촉하고 말랑해서…….
- “여주야.”
- “……어?”
동그란 안경 너머 마주친 예쁜 반달 눈에 더욱더 발그레해지는 내 얼굴.
- “이제 알겠지.”
- “……응, 알아.”
- “진짜?”
- “이해했어.”
질문이 무엇이든 내 대답은 아마 같을 것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으로 내 볼을 콕 찌르며 웃는다.
-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응?”
- “네가 정신 빼나 안 빼나 확인해 본 거.”
- “……나도 아무 말도 안 했어.”
- “다 안다며.”
- “요즘 덥지 않아?”
- “미치겠다.”
본인 말에 집중하는지 가끔 떠보는 어부에게 오늘도 나는 대어처럼 낚임을 당했다. 넋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그는 가끔 얼굴 닳는다며 장난을 걸었다. 더불어 입술 근처에 있는 양 보조개가 쏙 들어간 채 수줍은 인사를 건네면……. 그래도 뭘 어떡해. 공부하다가 지겹거나 졸려도 네 얼굴만 보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비타민이라는 게 약으로만 섭취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자연환경에서도 충분히, 효율적으로 섭취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예로 들면…….
- “요약한 거라서 빠진 부분도 있을 거야. 그건 네가 집에 가서 확인하고 시험 전날까지 계속 봐. 매년 출제한 문제도 많으니까 이번엔 틀리지 말고.”
라고 말하는 이지훈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만.
꽃받침까지 해대며 빤히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에, 그는 피식 웃으며 딱딱한 문제집으로 시선을 던졌다. 더는 차가운 별을 품은 밤바다가 아니다. 녹녹한 온기가 서린 부드러운 물결이 가끔 별을 적셨다.
- “언어 많이 올랐더라.”
- “내가 또 하면 하잖아.”
가볍게 펜을 돌리던 그가 먼저 눈을 맞추며 칭찬을 베푼다. 바로 어제, 작년 6월 모의고사 언어영역을 풀어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지금 돌려받은 시험지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한 장씩 넘기며 폭설을 맞이한다.
- “그런데 비문학은 그대로야. 특히 과학기술 파트.”
- “…….”
-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는데.”
김여주 아킬레스건의 한 획을 긋고 있는 비문학. 그중에서도 과학기술은 내게 똥을 주는 파트였다. 그래, 이건 3번이야 무조건 3번이라고! 자신감이 가득한 채 OMR 위로 3번을 마킹 하면 정답은 1번, 2번, 4번 또는 5번이었다. 쉽게 말해, 과학기술 파트에서 내가 확신하는 번호가 정답일 확률은 지금과 같이 햇볕이 쨍쨍하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딱 그만큼의 확률이었다.
- “……이과가 아니어서 그래.”
- “언어에 문과 이과가 어디 있어.”
- “여기 있다, 왜.”
- “언어는 그냥 언어적으로 풀면 돼.”
안경을 치켜 올리며 수능 과학기술 지문에 젬병인 나를 포함한 전국 수험생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는 공부 잘하는 애. 손가락 사이로 돌리던 샤프가 문제집을 강타한다. 흔히 이러지 않나, ‘쒸익쒸익’이라고.
- “그래, 좋겠다. 너는 다 잘해서.”
- “그 뜻이 아니잖아.”
- “서러워.”
모의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탓이었는지 울컥 지수는 다분했다. 항상 초심을 잃지 말자 다짐하는 의지가 흔들릴 만큼, 현재 내 기분은 마치…….
- “과학기술 같아.”
- “뭐가.”
- “지금 내 마음이 과학기술 풀 때와 같다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다. ‘나 삐졌어요’를 ‘과학기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본다. 사실, ‘삐쳤어’, ‘화가 났어’ 등등 직접적인 서술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부러 돌려 말하는 이유는, 그때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그가 있었기에.
- “삐쳤네.”
야야, 광대야 내려와 줘. 지금 난 화가 나 있어야 한단 말이야.
- “아닌데, 지금 완전 기분 좋은데.”
- “맞는데.”
- “아니거든.’
- “알겠어. 근데 맞잖아.”
오늘도 단 한 번을 져주지 않는다. 내 말이 맞다, 네 말이 맞다 티격태격 말을 섞다 먼저 백기를 든 선수는 당연히 김여주. 내가 봐준 거야. 진짜로. 자존심을 굽히기 싫어 허세 따위를 부려보지만, 그에게 먹힐 리가 없다.
- “지금 난 굉장해.”
- “뭐가, 또.”
- “분노가.”
- “이리 와 봐.”
그가 얼음물 잔을 들어 내 볼을 찜질했다. 지훈아, 이러면 두 시간 동안 공들인 화장이 지워지…… 아니야, 난 괜찮아. 이지훈이면 뭔들.
- “괜찮아, 이제.”
- “진짜?”
미심쩍은 표정으로 뜬금없이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자신의 체온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정상인 것에 대해 괴이하게 여기는 소년을 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 “…너 뭐 하니?”
- “아픈 건가 싶어서.”
- “멀쩡해.”
- “이렇게 빨리 얌전해 질 리 없는데.”
욕 같은 걱정을 오늘도 듣는다. 자주 듣다 보니 이젠 인사만큼이나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아직 차가움이 남은 볼 위로 따뜻한 온기가 닿는다. 그가 해주는 꽃받침이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 “또 감기몸살은 아니지?”
- “아니야.”
- “잠은 많이 자?”
- “응.”
절대 밤은 새지 말자 그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복사와 코팅처리까지 한 나는 별다른 반항 없이 하늘이 지면 꼬박꼬박 잠을 청했다. 뭐, 그와 했던 문자를 재탕, 삼탕, 사탕을 하느라 밤을 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건 내 비밀.
안경테를 올리던 그 예쁜 손가락으로 내 잔머리를 넘겨주며 눈꼬리를 접는다. 우리는 이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 “우리 이제 남은 거 뭐지.”
- “수리 4점짜리 모아둔 거.”
테이블 한가득 기출 문제와 요약 노트를 집어 들며 한창 집중력을 뽐내고 있던 때였다. 구석에 놓인 휴대폰이 짧은 진동을 울린다.
- [와, 김여주 남친있어ㅠㅠ]
칭찬도 아닌, 그렇다고 욕도 아닌 이런 애매모호한 문자를 보낼 사람은 단 한 명. 아니, 한 마리라고 해야 하나.
- [누나 옆에 누구예요? 커피 맛있어요?]
뒤통수가 따끔했다. 순간, 창밖을 기웃거리던 눈앞을 훔치는 너구리의 꼬리. 길 건너편 횡단보도 앞에서 하늘색 우산을 쓰고 우는 시늉을 하는 승관과 그의 친구들 있었다. 아, 젠장.
신호가 바뀌고 의미심장하게 웃는 승관이 다가올수록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은 계속됐다. 지나가. 좋은 말 할 때 지나가라. 일생일대의 텔레파시를 보내 본다. 그러나 승관은 방향을 틀기는커녕, 우산을 돌리며 발로 뜀뛰기까지 해 보였다. 창밖 상황은 전혀 모른 채 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샤프 끝을 깨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 “y가…….”
- “…….”
- “아, 이거 그건데.”
테이블 보자기로 그를 감싸고 날라볼까 약 1.3초 정도의 고민을 하다, 창문 가까이 다가온 승관에게 입 모양으로 협박을 보냈다. 부승관, 사라져. 사라지라고. 그러나 커피 향을 맡은 너구리는 좀처럼 떠날 줄을 모른다. 아아,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눈꼬리가 휘어지고 이가 다 보일 만큼 훤히 웃던 승관이 손을 동그랗게 말아 창문을 톡톡 치고 있었으니까.
……오, 망했다.
- “이제 난 끝났어.”
- “왜, 안 풀려?”
창문을 두드리는 너구리를 보며 기겁하자, 그도 고개를 돌려 주인공을 확인했다. 하지만, 승관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이다. 승관은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지훈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욱 확장하며 입을 막았다. 제자리에 곱게 자리하던 승관의 눈썹이 올라간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표현이었다.
#15.
친구들을 먼저 보냈는지, 카페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승관이 혼자였다. 카페를 샅샅이 뒤지던 너구리는 금세 날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엉덩이를 털썩 붙였다. 다른 자리 많은데 왜 하필 내 옆자리야. 떨어져. 승관은 호기심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두 눈으로 나와 지훈이를 잠시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내 팔뚝을 툭 치며 능글맞게 물었다.
- “둘이 뭐야?”
시작됐다. 부승관만의 특기.
- “아하, 둘이 뭐 그런 거야?”
- “도대체 뭘 그랬는데.”
- “학교도 아니고 밖에서?”
- “그게 왜.”
- “평일도 아닌 무려 주말에?”
- “그럴 수도 있지. 평일은 바쁘잖아.”
- “그것도 연인들의 안식처인 카페에서?”
- “스터디 카페거든.”
그렇다. 승관은 10대 끝자락에 서 있는 표본 중의 표본, 열아홉 살 한창 궁금증 많은 남자애였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을 거부하고 싶었다. 노골적인 시선을 부러 피하며 창밖 빗물을 세어본다. 한 빗방울, 두 빗방울. 아니다, 경부터 시작해야 하나.
- “왜 김여주만 말하냐? 이지훈 너도 말 좀 해봐.”
- “뭐 마실래?”
- “이야, 우리 지훈이가 사주는 거? 그럼 난 밀크티 주세요.”
- “꼭 지 같은 것만 마셔요.”
- “너야 말로 인생이 허망하냐? 얼음물을 굳이 카페까지 와서 시키는 이유는 뭐죠?”
- “시끄러워.”
갑작스러운 승관의 출현에도, 그는 오히려 자연스레 지갑을 챙기고 카운터로 유유히 사라졌다. 방금 작곡했다는 ‘밀크티 송’을 불러 젖히는 승관의 볼 따귀를 꼬집는다. 눈치 없는 너구리야, 이것만은 꼭 명심해.
- “학교에 소문내지 마.”
- “뭐야, 진짜 둘이 사귀고 막 그래?”
- “그런 거 아니야. 헛소리하고 다니지 말라고.”
- “사귀기 직전이구나?”
- “아니라고, 좀!”
엄지와 검지 사이 두툼하게 자리한 승관의 볼 따귀가 빨갛게 물들어 한 철 이른 추수를 했다. 밀크티와 함께 돌아오던 지훈이 고개를 내젓는다. 또 시작이네. 승관은 아야야 앓는 소리를 내다 지훈이 건넨 아이스 잔을 보며 입술을 댓 발 내민다.
- “야, 나 뜨거운 거 달라고.”
- “빨리 마시고 가라는 뜻이다.”
- “그래? 그럼 아껴 먹어야지.”
- “십 초 줄게.”
지훈의 엄포에도 승관은 가볍게 한 귀로 흘려보내며 빨대를 물었다. 밀크티는 여름이 제격이죠. 이지훈 앞에서 먹는 그런 맛. 짜릿하죠. 공공장소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단독 작사 작곡은 가능하면 빨리 때려치웠으면 좋겠어.
- “야…… 근데 너희들 왜 같이 공부하냐?”
- “…….”
- “뭐야…… 김여주 네가 갑자기 이지훈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것도 이상했는데, 이런 장면까지 보여주면 더 이상하잖아.”
겹겹이 쌓인 문제집을 툭툭 건드리며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렇지 않아도 부러 옆 반을 기웃거리다 승관에게 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네가 미쳤다고 우리 반을 찾아오냐? 오늘 무슨 날이야? 본인을 만나러 온 거라 내심 기대한 승관은 내 포커스가 오직 맨 뒷자리에서 자는 그에게 향한다는 걸 알아챘을 때, 애꿎은 머리끈을 잡아당기며 심술을 부렸다. 내 친구 건드리지 마라. 죽는다. 눈치 빠른 승관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 “몰래 족보라도 공유하냐?”
- “있으면 진작 보여줬지.”
- “이번 모의고사 답지 미리 빼돌려서 너희만 보냐?”
- “평가원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 “둘이 좋아하냐?”
눈치 하나 겁나 빠른 너구리는 시한폭탄이었다. 표정관리는 둘째 치고 입꼬리가 왜 위로 올라가며 머리는 왜 이리 뜨거워지는지. ‘맞아요, 네 말이 다 맞습니다.’ 하는 거랑 뭐가 달라. 너구리는 곁눈질로 주변을 훑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밀크티 송’ 2절을 불렀다. 스터디 카페서 마시느은- 밀크티느은- 너무 달아요오-. 약 올리는 건 네가 최고다, 진짜. 애초에 야생으로 방생했어야 하는 건데. 변명이라도 해볼까 띄엄띄엄 머리를 굴렸다.
- “그게 아니고……. 모여서 공부하면 더…….”
- “내가 같이하자고 했어.”
나보다 한 뼘 더 빠른 목소리.
- “김여주 공부 잘하잖아.”
그가 남은 음료를 들이키며 잔을 비워냈다. 승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흡사 취조실에 당도한 형사 너구리가 그를 조사하는 느낌이랄까.
- “……네가 먼저 부탁한 거라고?”
- “어.”
- “네가 왜?”
- “뭐야, 그 질문은.”
- “아니, 네가 부탁받으면 받았지 먼저 도움 요청할 레벨은 아니지 않냐?”
쉽게 말해, 부족함 없는 이지훈 네가 굳이 스터디 그룹이 필요하겠냐는 뜻이었다. 사실은 나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다이아몬드보다 비싸다는 수험생의 시간을 내게 쓰는 이유가 내심 궁금했던 터였다. 그러나 승관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그의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외로 간단하고 또한 명료했다.
-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 ‘그냥…… 너랑 같이 공부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 "같이 하면 좋잖아. 6월 모의고사 잘 봐야 하니까."
- ‘같이 하면 의지도 생길 거고…… 아무튼 더 낫지 않을까?’
……뭐야, 이지훈.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었네. 오버랩 되는 지난날을 생각하며 그를 향해 살짝 미소 짓자, 대답이라도 하듯 그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거 윙크한 거 맞지. 나 오해해도 되는 거지. 풉-, 새어 나온 헛바람에 손으로 뒤늦게 입술을 막는다. 두 볼에 발갛게 핀 꽃송이를 숨기려 고개를 숙이면 내 배경은 분홍 잎이 흐드러지지.
- “얘 왜 이래? 시험 보기도 전에 미친 건 아니겠지?”
승관은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돌리며 심각한 사태가 터졌음을 어필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내 두 볼을 붉게 만든 주인공의 매끄러운 입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예쁘고 달달한…….
- “그래 보여. 병원 데려갈까 봐.”
예쁘고? 달달한? 개뿔.
- “OMR 뒤집어서 찍을지도 몰라.”
- “연필로 마킹 할지도.”
- “모의고사 날짜는 알까?”
- “글쎄, 지금 멍 때리고 있는 걸로 봐선 6월이 아니라 9월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아주 만담 꾼들 나셨다. 참나, 눈은 왜 찡긋거렸대? 뭐가 들어갔으면 불어 달라고 하던가. 구시렁구시렁 대며 가늘게 눈을 뜨자, 그는 손을 들어 당차게 흔들었다. 이거 몇 개야? 뽀얗게 흔들리는 다섯 손가락, 잘근 깨문 입술을 떼고 가장 예쁘게 웃어 보이는 나.
-“만 이천 개.”
- “정답.”
아스팔트를 적시던 소나기가 잠시 이별을 고했다. 틈틈이 기회를 엿보던 햇살은 그 자리를 대신해 습기를 말렸고, 카페 옆 곧게 자란 나무 잎새는 별처럼 반짝였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Epilogue.
새벽바람이 좋아 달과 함께 등교하던 내 패턴이 달라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교문 닫히기 30초 전부터 언덕을 올라 느긋한 등교를 즐기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햇살이 유독 쨍쨍한 날이었다. 교문 기둥 앞에서 손거울을 보며 주변을 의식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학주는 긴 대나무 막대기를 휘적거리며 선도부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문 닫으라. 저 봐라, 개미 떼들 몰려온다이.
- “안 됩니다, 선생님. 잠시만요.”
- “넌 뭐야, 인마.”
- “아직 시간 남았어요.”
대나무 광선검을 휘두르는 위협적인 자태에도 언덕을 오르는 수많은 머리통을 샅샅이 뒤졌다. 왜 안 와, 나처럼 빨리 등교하면 좀 좋냐고. 코딱지만큼도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실타래의 출현은, 선도부가 있는 힘껏 교문을 닫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 “야! 이지훈!”
한 손에 넥타이를 쥐고 빠르게 달려오는 그를 보자마자 발까지 동동 구르며 손짓했다. 학주는 팔토시를 벗어 화단 계단에 던져두고는 끌끌 혀를 찼다. 하이고, 아침부터 남자친구 챙기느라 바쁜갑네. 대나무 검으로 가볍게 내 머리를 찍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학주의 비아냥도 무시한 채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 분홍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지금은 이게 가장 중요해.
- “왜 이렇게 늦었어?”
- “넌 왜 나왔는데.”
- “……일단 들어가고!”
얼마 남지 않은 교문 틈으로 몸을 구겨 넣는 개미 떼들 속에 그를 밀어 넣는다. 아 좀, 제발 들어가 주세요. 선생님 한 번 만요. 그의 가방을 안으로 욱여넣으며 힘을 주었다.
철컹-, 굳게 닫히는 지옥의 문은 너와 나 사이에. COME ON, COME ON, COME ON.
- “야…….”
- “아, 지각했다.”
대나무 검은 소리 없이 다가와 내 머리통을 가격했다. 네 남자친구는 저-어기 있고 넌 여-어기 있네. 혼자만 살아서 어쩔꼬. 학주는 지옥 입성을 하지 못한 개미떼들을 마주하러 친히 교문을 넘었다. 문제는, 그들 중 이지훈이 있었다는 것. 내 노력이 헛수고가 됐다는 말이다.
- “너는 이게 웃겨?”
- “그러니까 왜 안 하던 짓을 해.”
- “네가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걸, 왜 나를…….”
- “몰라.”
그는 자신의 등을 미는 손을 잡아당기더니 오히려 내 몸을 안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발밑에 가방을 내려놓고 대충 넥타이를 둘러메던 그가 교문 철창을 잡고 오만상을 구기는 날 보며 피식 웃는다.
- “오늘 수행평가 아니야?”
-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 “학주 온다.”
- “그것도 문제가 아니야.”
- “부승관도 오네.”
분명 학주의 대나무 광선 검을 봤음에도 더욱더 천천히, 그리고 껄렁하게 다가오는 부승관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학주는 지훈의 머리를 가격할 찰나,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기까지 하는 승관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아무래도 오늘을 마지막으로 대나무 광선 검은 사라질 듯하다. 이유는 승관의 도발, 부도발.
- “쌤, 안녕하세요?”
- “부승과이-, 또 똥 싸다 늦었냐.”
- “예?”
- “귓구멍 빼라 했다.”
- “예, 오늘 날씨 좋죠!”
- “마지막으로 말한다. 귓구멍 빼.”
- “예! 사랑합니다!”
- “새끼야, 이리 와.”
- “아악! 쌤!”
귓바퀴를 잡힌 채 질질 끌려오듯 교문 앞에 당도한 승관은 교문 안에 갇혀 있는 내게 손가락질을 하다, 교문 밖에 서 있는 그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야아-, 이 녀석들이 학교에서도?”
- “닥쳐.”
- “김여주, 네가 왜 거기 있냐?”
- “왜, 뭐.”
- “이지훈이 아니라 네가 지각한 거 아니야? 이거 음모지?”
내 생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막으며 큰 눈을 부라린다. 부승관 아침부터 보고 있으니까 진짜 싫다. 응, 그건 나도 마찬가지. 네 뒤에 선생님. 아악! 쌤! 학주의 대나무 검은 승관의 엉덩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대나무치고는 취향이 참 독특하구나.
- “김여주, 너도 여기 남을래 아니면 조용히 들어갈래.”
- “쌤, 김여주는 이지훈 옆에 남게 해주십쇼.”
- “씁-, 조용히 해라.”
- “교실에는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알아주셨으면 하고요.”
- “넌 좀 맞자.”
결국 잔꾀를 부리다 덤으로 얻어맞는 녀석이다.
- “아아! 쌤! 어제 배구 중계 안 보셨어요? KGC 인삼공사 연패했다니까요?”
- “그게 네 놈 지각이랑 뭔 상관이여?”
- “얼마 만에 돌아온 연패인데 제가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스파이크가 팍팍 꽂히는데 제 마음도 거기에 팍!”
- “진짜 팍 한번 맞아야 정신 차리지! 내가 너 때문에 잠을 못 잔다!”
- “쌤의 카페인이 바로 저였군요?”
학주의 광선 검은 그렇게 또각-, 소리를 내며 운명을 달리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한심한 눈빛으로 애도를 보낼 쯤, 지훈은 고개를 숙여 끅끅거리기 바빴다. 하지만 매의 눈은 다 안다. 여기서 매의 눈은 항상 화가 나 있는 학주를 말하는 것이다. 어색한 공기 속 선생과 제자의 달콤한 눈맞춤이란.
- “넌 또 뭐야, 인마.”
- “슬퍼서요.”
- “학생부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A대는 날로 먹을 수 있다디?”
- “날로 먹는 거, 제가 한번 해볼까요?”
- “이지훈 부승관 이 새끼들이 쌍으로 돌았나. 공부하다가 미쳤는갑다.”
- “저는 좀 빼주십쇼.”
- “넌 입 다물라 했다.”
- “저도 좀 빼주세요.”
머리를 짚는 학주의 뒷모습이 안쓰럽다.
저 둘은 아무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 “배구 재밌냐.”
- “야, 완전 끝장나지! 오늘 한번 땡길래?”
- “시간 있으면.”
- “시간은 있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 “누가 그래.”
- “볼드모트가.”
- “미친놈아.”
- “김여주보단 아니야.”
- “여기서 김여주 얘기가 왜 나와.”
- “쟤 봐, 너 잡아 먹을 것 같아.”
덤앤더머의 바보스러움이 내게 향하면, 슬쩍 등을 돌리며 피하는 나.
그런데 있잖아.
……왜 이렇게 행복하지.
*
- “돌았냐?”
- “말 걸지 마.”
- “이지훈 이런 거 안 좋아해.”
- “……그럼 뭘 좋아하는데?”
- “맨입으로?”
- “꺼져.”
3교시 쉬는 시간, 메로나 두 개를 양손에 쥐고 창문으로 흘끔거리며 그를 살폈다. 피곤한 듯 잠을 자는 뒷모습에 입술을 쭉 내밀며 고민하던 찰나, 승관이 하나를 뺏어 들며 제 입으로 퐁당 넣어버렸다. 메로나 안 좋아한다고. 이건 내가 좋아해. 주먹을 쥐고 얼굴 앞에 들이밀자 되려 제 얼굴을 내민다. 아오, 진짜.
- “야, 이지훈이 좋아하는 거 알려줘?”
- “장난이면 메로나가 어떻게 변할 지 몰라.”
- “진짜로.”
- “……뭔데?”
딱딱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는 귓가에 소곤거렸다.
- “너.”
- “아이스크림 코로 먹어 봤어? 죽을래?”
- “메로나는 네가 준 뇌물인 걸로.”
퀘스천 앤 앤써! 또 메로나인 척! 괜히 친구인 척 해 봐도-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교무실로 반성문 쓰러 가는 자세가 영 마땅치가 않다. 또다시 교실을 훔쳐보며 레이더망을 좁혔다. 한 손에는 여전히 아이스크림 하나. 용기 따위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사각형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두 다리. 옆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보면, 그는 때마침 얼굴을 돌리며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 “뭐야…….”
- “…….”
입술에 닿은 차가움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한 소년이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는다. 입술을 앙다물고 상황파악에 나선 소년에게, 난 대뜸 이런 고백을 했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에 의거해서.
- “난 메로나 좋아해.”
- “……뭐?”
- “너도 메로나 좋아해.”
……내가 널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