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FM 4U가 오전 열 시를 알려드립니다.
적막한 거실을 깨우는 라디오 소리에 뻐근한 기지개를 켰다.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 더위에 절절 끓는 바깥세상을 담으며 곧게 허리를 세웠다. 침대가 아닌 좁은 소파에서 잠은 청한 것은 밤새 문자질을 하느라 깜빡 잠이 든 탓이었다. 분명 지훈이는 잠이 많은 아이라 했다. 승관의 말에 따르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교실에서 수면을 청하는 일명 ‘숲속의 요정님’이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지막 문자는 오전 네 시 정각, 읽지 못한 채 잠든 바보는 아침이 되어서야 내용을 확인했다.
- [자?]
……
- [이불 덮고 창문 잘 닫고]
……
- [잘 자]
손을 흔드는 흰둥이가 귀엽게 웃는다.
이모티콘도 꼭 그를 닮아서.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Freesia (프리지아)-
올해의 두 번째 계절을 맞았다. 시간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그 속에 아직은 내가 있었다. 오늘은 교복 바람에 토스트를 깨무는 분주한 아침이 아니다. 다만, 전신 거울 앞에서 한참을 눈만 깜빡대다 옷장으로 향했다. 이게 문제였다. 이 짓을 벌써 열 번도 더 반복했으니까. 침대 한구석, 어제 꺼내 놓은 옷가지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폭 내쉰다. 또다시 결정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환자를 구해줄 단 한 사람, 승관에게 이 상황을 그대로 전송하면 된다.
응급 환자 발생. 신속한 구조 바람. 문자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휴대폰을 늘 손에 달고 사는 승관은 오늘도 나노 속력으로 답장을 보낸다. 국내 어디든 와이파이 속도가 이렇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 [어우, 방 봐 혼자 전쟁하시는지 ㅠㅠ]
- [뭐가 더 나은지 골라 줘]
- [지금 입고 있는 나의 큐티 파자마]
……부승관이 보낸 셀카 안 본 눈 삽니다. 별 박은 파자마를 입은 채 눈을 크게 뜨고는 츄-, 입술을 내민 허름한 사진이 눈알을 괴롭혔다. 감성적인 흰둥이 이모티콘으로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부승관 이놈 때문에 다 망했어.
- [시간 없으니까 빨리 대답 좀]
- [어디 밭매러 가냐? 감자 수확 철임?]
-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 집 곡괭이가 어딜 향할지 몰라]
- [학교 체육복이 더 나을 듯]
- [네가 입고 올래?]
- [야, 우리 누나 옷 빌려줘? 많이 작긴 하겠지만ㅋㅋㅋ컄ㅋㅋㅋ]
애초에 부승관을 친구로 둘 때 우정의 서약서를 작성해야 했다. ‘비웃기는 일주일에 1회’ 정도로만 낙인을 찍었어야 분노가 덜 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일생에 도움은커녕, 훼방만 주야장천 놓고 있는 별 박은 파자마. 휴대폰을 침대에 던져 놓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리 좀 준비해 놓을걸. 용돈의 절반 이상을 의식주의 ‘식’에 투자했던 과거의 나야, 왜 그랬니. 서랍을 열어 철 지난 치마와 티셔츠를 몇 번이나 걸러냈을까, 최근 충동구매의 결실이었던 원피스 한 벌을 골라 몸을 구겨 넣었다. 거울 앞에서 빙그르르, 주변으로 그려지는 부드러운 물결.
이거 봐, 원피스 득템했다. 오후에 영화 보러 가지요. 인증샷과 함께 문자를 보내면, 전투적인 속도로 답을 하는 옆 동네 친구. 뭔데 예쁘게 입냐? 영화? 설마 데이트 가냐? 그래, 김여주. 우리의 하찮은 우정도 여기 까지다. 벌써 머릿속에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짜 놓고 이리 담판을 짓는다. 누가 질투장이 아니랄까 봐 펑펑 울고 있는 이모티콘의 향연이 펼쳐졌다.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인 옆 동네 친구는 안 봐도 훤했다.
- [나랑 볼 때는 추리닝 따위 입고 오면서 뭐 하는 짓이냐 이 배신자야야ㅏㅇ약!!!!]
- [넌 신발 짝짝이로 신고 오잖아]
- [네가 뭘 모르네~ 그걸 앞서가는 패션이라고 하는 거야]
- [제발 너무 많이 앞서가지는 마]
영화가 아니라 밭에 감자 캐러 가시는 분이 굳이 원피스를 입어야 하냐는 승관의 씩씩거림을 가볍게 젖히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두 볼에 퍼진 발그레함에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떨지 말자, 후후 심호흡을 내쉬면 거울 속 또 다른 나는 내게 말했다.
지훈이 색이네.
네 볼 말이야.
*
5층입니다.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U-PLEX)에 자리한 영화관.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달콤한 팝콘과 커피가 코를 자극했다. ‘식’에 관심 많은 내게 여간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일단 표 먼저. 시선은 오로지 박스 오피스와 번호표 기계에 두려 노력했다. 사각형 전광판 앞에서 상영 시간을 확인할 즈음, 내 번호를 찾는 불빛이 깜빡였다.
- “좋아해 줘, 두 시 반이요.”
- “좌석 눌러주세요.”
- “……저기, 커플이 많이 앉는 곳이 어디예요?”
아, 저희가 커플은 아닌데…… 그렇다고 친구도……. 스크린 앞에서 갈 곳 잃은 손가락이 방황했다. 자리 하나 얻는 게 이렇게 힘들다. 그와 내 사이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고심하고 있을 때, 상대방은 상영관 맨 뒷줄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혹여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영화관에 몰래 잠입한 미어캣은 레이더망을 가동했다. 다행이야, 아직 안 왔나 봐. 쫑긋 세운 귀를 내리며 앞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개미만 한 목소리에 이번엔 상대방이 쫑긋거린다.
- “커플 석, 맨 뒷자리 두 장 주세요.”
- “크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 “이런 건 처음이라서요…… 그렇다고 부끄러운 건 아니고요…….”
괜한 쑥스러움에 지갑 모서리를 매만진다. 표를 건네받으며 어색하게 웃는 어색한 나.
- ‘좋아해 줘.’
어젯밤, 미처 흩어지지 못한 비눗방울이 톡톡 튀어 오르는 건 아마 기분 탓이려나.
*
대기실 앞에 설치된 전자시계가 오후 두 시를 넘겼다. 분명 정각에 만나자 내게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던 그였다. 뻑뻑한 허리를 세워 기지개를 켰다. 목 운동을 하는 척,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머리칼 한 올 보이지 않는다. 설마, 진짜 설마. 약속을 잊어버렸다거나 잊어버린 건 절대 아니겠지. 응, 아닐 거야. 휴대폰 키패드를 빙빙 돌던 손가락이 결국 그의 이름을 찍는다. 짧은 통화 연결음 뒤,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을 건네는 가여운 미어캣.
- “이지훈, 지금 몇 시게? 맞추면 사탕 준다.”
- “……미안해, 거의 다 왔어.”
- “삼십 분 기다렸으니까 딱 삼십 초 줄게. 빨리 달려와.”
- “정확히 어딘데.”
- “나…… 영화관 앞에. 대기실 의자 많은 곳.”
- “던킨 쪽?”
- “아니, 스타벅스.”
- “……아, 보인다.”
- “지금? 내가 보여?”
파블로의 개는 종을 흔들면 침을 흘렸고, 난 이지훈의 목소리에 실시간 반응하는 반사적인 인간이었다. 어디, 어디야.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그를 찾는다. 곧이어 맞은편 의자를 끌어 내 앞에 앉는 한 사람. 코끝에 스미는 비누 향은 언제나 참 좋다.
- “예쁘게 하고 왔네.”
-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 “예쁘네.”
- “……좋고.”
양 보조개가 피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한 점을 입안에 가득 넣으면 분명 이런 기분일 거야.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한 구름 젤리를 먹었어’라고 그에게 자랑도 하고 싶은데 말이지.
- “잠깐 여기 있어. 영화표를…….”
- “이미 내 손에 있는데에-.”
- “뭐야.”
- “네가 늦게 온 거거든.”
- “그럼 먹고 싶은 거 말해 봐, 사 올게.”
뭐든, 다. 멋쩍게 웃는 그가 입술을 앙다물며 웃는다. 분명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최대한 많이 먹어야 해. 골똘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한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결정했어, 오늘은 치즈 카라멜 팝콘.
- “콜라도 같이 딸려왔으면 좋겠어.”
- “또.”
- “또? 난 그게 다야.”
- “츄러스는.”
- “아, 까먹을 뻔했다.”
- “나초도.”
- “역시, 영화관의 꽃은 나초지.”
두 눈을 찡긋거리는 그를 따라 일어나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내 눈치를 짐짓 살폈다.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궁금증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이지훈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말이다. 뭐해, 허리 아파? 왜 뒷짐을 쥐고 계세요, 어르신. 내 장난에도 등 뒤로 두 팔을 숨긴 채 어색하게 웃는 것이, 꼭 조금 전 발매에 고통받던 미어캣의 미소와 같음을 느낀다.
- “이지훈 어르신, 진지는 드셨어요?”
- “아니요, 지금 할머니 팝콘 사주러 가고 있잖아요.”
- “누가 할머니야?”
- “김여주 할머니.”
궁지에 몰려도 할 말은 다 하는 그였다. 영화관 내에 ‘좋아해 줘’ 입장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리자, 그의 머뭇거림은 더욱 짙어졌다. 팝콘 말고 콜라만 사서 가자. 빨리 앉고 싶어. 팔을 당기려 하자 한 걸음 더 멀어진다. 뭐랄까, 평소 날 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보이고 불안해 보였으며 또한 스스로 당혹감에 서린 얼굴이었다. 대체 원하는 게 무엇일까, 궁극적인 그의 목표에 아리송해질 때쯤,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음에 문득 깨달음을 얻는 나였다.
- “너, 설마…….”
- “…….”
- “오답 노트 가져왔어?”
- “뭐?”
-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 “어떻게 하면 생각이 오답 노트로 빠지냐.”
- “왜, 우리 고3이잖아.”
엄밀히 말하면 현재 우리의 신분은 열아홉도, 졸업을 앞둔 일반 학생도 아닌, ‘수험생’ 그 자체였다. 언제, 어디를 향하든 문제집을 끼고 오답 노트를 보고 하물며 영어 단어를 외워도 전혀 꺼릴 것 없다는 말이다. 휴대폰으로 찍어 둔 문제 몇 개 있는데 영화 끝나고 보여줄게. 정직한 내 대답에, 그는 두 눈을 찌푸리며 귀엽게도 웃었다. 오답 노트 그런 거 아니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본다. 뽀얀 얼굴이 홍당무가 될 때까지, 그 길고 긴 시간을 서로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영관 입장 줄이 길어지자, 참을성 없고 답답함이 가득한 미어캣은 눈썹을 한껏 구겼다.
- “솔직히 말해. 나랑 영화 보기 싫어서 그래?”
- “그럴 거면 처음부터 여길 왜 와.”
- “그럼 도대체 뭔데. 너 자꾸 이러면 나 집에…….”
- “……네 꺼.”
한참을 머뭇거리던 아이가 건넨 것은, 노란빛을 한 아름 먹은 프리지아 한 떨기였다. 팝콘이랑 또 뭐라고 했지. 아무튼 여기 있어, 금방 올게. 품 안에 직접 꽃을 안겨준 그가 스낵바로 몸을 틀다, 옷깃을 그러쥐는 손길에 뒤를 돈다. 정각에 꼭 만나자며 새끼손가락을 걸던 그가 늦은 이유도, 지금까지 등 한번 보여 주지 않은 이유도, 비껴가는 답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던 이유도. 모두다.
- “오늘 이것 때문에 늦은 거야? 꽃 때문에?”
- “……그냥.”
- “대놓고 주기 부끄러워서?”
- “나, 팝콘 사러 가야 하는데.”
깜찍한 대답에 터지는 웃음은 그의 귀 끝을 더욱더 새빨갛게 물들였다. 지금 당장 스낵바에 꼭 입성해야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고 싶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아니 어색함이 가득한 그를 더 보고 싶었다. 당황하거나 멋쩍을 때 나오는 특유의 미소가 있다. 이 사이에 혀를 살짝 깨물고는 눈꼬리를 접는 것, 민망한 지 두 눈을 질끈 감는 것. 다음부터 DSLR을 들고 다닐까 해. 나노 단위 연사로 남기고 싶거든. 영화관에서 꽃을 들고 크게 웃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야. 미친 사람이 아니라, 진짜 꽃 때문에 행복해서.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지훈이 너라서.
프리지아 한 번, 지훈이 한 번. 또 프리지아 한 번, 지훈이 한 번.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오늘이 너와 함께하는 특별한 날이어서, 널 닮은 프리지아를 품에 안아서, 더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먼저 내게 다가오는 네가 있어서, 말로 형용해도 다 못할 마음이라서.
- “고마워.”
……
- "예쁘다, 지훈아."
이지훈, 너 프리지아 같아.
예뻐서 나만 보고 싶어.
내 마지막 사계절에 네가 있어서
난 너무 행복해.
- “너도 예뻐.”
목소리에서 짙은 프리지아 향기가 났다.
영원히 지우고 싶지 않은, 그런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