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희망병원 ? 여긴 동우네 할아버지가 계신 곳 아니야 ? "
" 응. 3층 말고 여기 5층에 산부인과도 있거든."
" 산부인과? "
" 응.임신한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리는 곳이야. 혹시 잉란이 이쪽으로 왔을까싶어서."
" 진짜 그럴 수도 있겠네 !?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성규를 보는 우현이 우쭐대며 웃었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추고 우현과 성규가 나란히 산부인과에 내렸다. 다른 병동과는 다르게 알록달록한 시트지가 붙혀져있고 천장엔 달,해,별,구름 등등 모빌들이 깜찍하게 매달려있으며 잔잔하게 평화로운 클래식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 우와...우현아,보여 ? "
" 뭐가 ? "
" 뱃속에 있는 잉란들 말이야 ! 저렇게 이쁘게 빛나고 있잖아.이제 핑크빛이네 ? "
해맑게 웃어보이자 불룩한 배에 들어있는 잉란들이 반가움을 표현하듯이 밝게 혼을 빛냈다. 아직 주인의 몸에 들어가지않고 주인의 머리위에 얹혀진 잉란들도 보였고 성규가 등장하자 얼른 뱃속에 슈욱 들어가는 잉란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현의 눈에는 그저 다들 비슷한 임산부들이였고 어딜봐도 잉란의 기운은 느껴지지않았다.
" 난 안 보이는데...느껴지지도 않구..."
" 여기 있는 잉란들은 주인곁에 있으면서 훌쩍 자란 애들이라서 그래. 능숙하게 몸을 숨길 줄 아는거지. "
" 그럼 우리 엄마 잉란은..."
" 천상에 있던 그대로야.아직 주인을 못 만나서 자라지않았어. 얼른 찾아야해. 다른 사람들 눈에... "
갑자기 지나가던 어린 임산부를 노려보는 성규. 마치 금방이라도 눈에서 불이 나올 것처럼 화르르 타오르고 있다.성규를 만나고 처음 본 화난 모습에 우현이 성규의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 야,왜..왜 그래 ? "
" ...... "
임산부가 복도를 지나 병실에 들어가기전까지 노려보던 성규가 노려보던 눈을 풀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기시작했다.
" 저 여자 잉란. 완전히 색을 잃었어."
" 색을 잃어가다니 ? 주인을 만난 거잖아 ? "
" 주인이 지우려고 마음먹으니깐 잉란이 빛을 잃는거야.시름시름앓아가는거지."
" ...... "
팔에 소름이 으슬으슬 돋아온다. 자신의 팔뚝을 매만진 우현이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럼 낳으려고 했던 사람이 유산되는 건 왜 그런거야 ? "
" 그건 잉란이랑 주인의 몸이 안 맞아서 그래. 천상에서 보내주는 잉란도 각각 다 달라. 거의 대부분은 주인과 맞아떨어지지만 예외도 있지. 그렇게 유산된 인간들한테는 천상에서 다시 잉란을 보내주게 돼있어."
" 갑자기 천상이라는 곳 되게 위엄쩔어보이네..."
" 아쉽지만 여기엔 없는 것 같아.."
" 뭐 시내에 산부인과가 여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니깐..."
" 일단 나가자..여기 공기 답답해."
자꾸 밑에서 음울한 기운이 올라와...성규가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 온 김에 동우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자.걔 맨날 일요일마다 여기서 죽치고 있거든"
" 그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있어서 그냥 비상구를 이용하기로 했다.
4층을 지나 3층으로 내려가려던 성규가 갑자기 꾸벅 인사를 했다. ' 야,또 왜그래...존나 무섭게 좀 하지마.나 심장약하다고...'하며 약간 울먹거리듯이 말한 우현에게 먼저 가있으라는 말을 하자 우현이 군말없이 후다닥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 특이한 애네. -
비상구 계단에 앉아있는 건 호원이였다. 몸을 숨긴채 앉아 명부를 펼치고 무언갈 열심히 적고 있는 호원.
-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 -
- 명부 정리. 쉬운 말로 스케줄정리. 내일 이 근처에 세 명이나 몰려있거든. -
호원이 골치아프다는 듯이 붉은 펜으로 이것저것 체크하며 인상을 썼다. 그리고는 한 이름을 가리키며 투정부리듯이 이야기했다.
- 이 사람이 제일 골치아파. -
- 누군데요 ? -
- 김복녀라는 할머니인데 이 할머니 남편되는 할아버지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밤마다 손 꼭 붙잡고 자거든 ? 근데 진짜 그럴때마다...-
- 마음이 약해지신다는거죠 ? -
- 뭐...대충...그래도 어쩔 수 있나. 운명인 걸. 내일 모시러 가야지.-
- 아...그래요...-
- 너도 마음이 안 좋지 ? 나는 어떻겠어.-
씁쓸하게 웃은 호원이 열심히 명부를 체크한다.
- 아...그럼 혹시 뭐 좀 물어봐도 되요 ? -
- 어떤거 ? -
- 저기...장기영이라는 이름있어요 ? -
동우네 할아버지에게서 뿜어져나왔던 음울한 기운을 생각한 성규가 침대에 적혀있던 이름을 기억해내고 물었다.
- 흠~ 장기영..장기영...-
명부를 휙휙 넘기며 살피던 호원이 ' 아니,없어.'라고 대답한 호원이 말을 이었다.
- 왜냐면 난 이틀치만 받아볼 수 있거든. 전체적인 생사명부는 사관부 생사관리들만 알 수 있어. 난 사자계급이라...-
- 아아...-
- 어때. 인간과의 생활은 ? -
- 우현이요 ? -
- 아까 그 남자애 이름이 우현이야 ? -
- 네.남우현이요. 그냥 그럭저럭 지낼만해요. 아직 얼마 안 됐는걸요,뭐.-
- 근데 왜 그 녀석이지 ? 많고 많은 인간들중에...-
- 아아...사실 잃어버린 잉란이 우현이네 엄마꺼더라구요.-
- 그렇구나...-
호원이 안됐다는 표정으로 명부를 덮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난 이만 가봐야돼.-
- 아,네. 다음에 또 뵈요.-
-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명부를 들고 있던 손을 휙 저은 호원이 순식간에 없어지더니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게 보였다. 우와,속도 장난아니다...성규가 입을 벌리며 호원이 날아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 아,우현이 기다리겠다."
얼른 비상구를 나온 성규가 이 쪽으로 걸어오는 동우와 우현을 발견했다.
" 성규형 !! 안녕하세요."
" 어,동우도 안녕.왜 다시 나와 ? "
" 할아버지 주무시거든요. 요즘은 약때문인지 맨날 주무세요.."
여전히 웃고있는 동우였지만 무언가 우울한 분위기가 풍겨왔다.
" 근데 성규형...어디 가세요 ? 완전 삐까뻔쩍하게 차려입었네요 ! 연예인같아요. "
" 응 ? 여,연예인 ? "
" 네.완전 멋져요. "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말하자 쑥쓰러운듯이 미소를 지어보인 성규가 기분좋게 웃었다.물론 옆에서 우현이 '연예인좋아하네'하며 분위기에 찬물을 들이부었지만..
" 암튼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 ? "
" 무슨 일이긴. 너보러 왔지,임마."
" 거짓말."
" 진짜라니깐. 이제 너 봤으니깐 갈게."
'벌써 가게 ? 좀 더 있다가지...'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동우의 모습에 성규와 우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아,저 그게."
급한 볼일이 있다고 말하려던 성규를 막아선 우현이 '그러지,뭐. 할 것도 없는데 좀 있다가자.'하며 동우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 성규형도 시간 많잖아 ? "
우현이 성규를 보며 물었다. 표정은 협박에 가깝다.
" 어,어. 나도 시간 많아 ! "
" 와.다행이다. 혼자 무지 심심했는데."
'할아버지 약드시고 한번 주무시면 그냥 밤까지 쭈욱 주무시거든요.오늘은 그나마 고모가 와 계셔서 다행이에요...'하며 성규와 우현에게 양 쪽으로 팔짱을 낀 동우가 어서 밖으로 나가자며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
남자 셋이 딱히 갈 곳이 없어 손에 각각 아이스크림을 들고 거리를 배회했다. 동우와 우현은 여름방학때 갈 곳을 정하느라 시끌시끌했고 성규는 빵빠레를 할짝거리며 잉란의 기운을 느껴보려고 애를 썼다.
" 아,성규형도 같이 갈래요 ?! "
" 으응 ? 어디를 ? "
" 우리 여름방학때 바다가기로 했거든요~ "
" 쟤는...아니아니 성규형은 한달있다가 다시 시골로 내려간다니깐."
" 그런가..에이,시골에서 다시 올라오면 되죠~! "
'그래.시간되면.'성규가 애써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마음같아선 얼른 잉란을 찾고 원래 있던 천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갑자기 거리를 걷던 동우가 무언갈 가리키며 '우리 저거찍자!!'하면서 소리쳤다. 알록달록한 천막이 달려있는 스티커 사진기.
" 뭔 사진이야.더워죽겠는데."
" 뭐 어때~! 성규형.형도 찍을 꺼죠 ? 얼른 가요! "
쭈쭈바를 입에 문 동우가 후다닥 먼저 천막안으로 들어갔다. 우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천막안으로 따라들어갔고 성규도 어색하게 천막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액정에 비치는 세 명의 얼굴. 왠지 모르게 민망한 기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남자 셋이 이러고 있으려니깐 좀 그렇다."
" 흐흐흠~"
우현의 말을 한 쪽 귀로 흘려보낸 동우가 돈을 넣고 이것 저것 누르더니 '빨랑빨랑 포즈!'하더니 성규와 우현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씨익 웃었다.
" 우하하하학!! 남우현 찍기싫어하더니 표정봐봐.못났어! 우하하학!!! 성규형도 겁나 웃기게 나왔어요 !! 우하하학."
" 그,그래 ? "
성규가 울상을 지으며 동우가 보고있는 액정으로 다가가 자신의 표정을 확인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습은 자신이 봐도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실 갑자기 터지는 플래쉬에 깜짝 놀라며 우현의 옷을 움켜쥔 성규였다.
" 야,다시 찍어.나 존나 잘 생겼는데 상거지같이 나왔잖아."
" 참나.걱정마! 열컷으로 했으니까.자,다시 ! "
동우가 버튼을 눌렀고 이번엔 셋이 제대로 옹기종기 모여 미소를 지었다.
[ 스마일~찰칵! ]
+
" 아,덥고 배고프고... "
우현이 배를 잡으며 '아침부터 암 것도 안 먹고 돌아다녔더니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 같아.'하며 인상을 썼다.'나도 배고프다..' 동우 역시 배가 고팠는지 아까보단 에너지가 많이 줄어들어있었다.
" 형,형.성규형! 피자 좋아해요 ? 우리 배고픈데 피자나 먹으러가요!"
" 그..래. "
일단 말하는 걸 보니 먹는 것 같길래 대충 눈치로 대답을 하고 능숙하게 피자집을 찾아가는 동우와 우현을 따라갔다.
" 와,시원하다."
" 그러게.이제야 살 것 같아..."
" 성규형은 그렇게 입고도 땀 하나도 안 흘리네요 ?"
동우가 냅킨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 어? 아...땀을 잘 안 흘리는 체질이라서..'라고 변명을 하자 바로 '그래도 그렇게 입으면 안 흘리는 체질도 땀이 날 텐데...'라며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이번엔 대답대신 우현을 슥 쳐다본다.이제 우현도 성규가 쳐다보면 알아서 중재를 해준다.
" 야,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냐."
" 아,그런가. 아니 신기해서.으흐헝. 아무튼 우현이 너 뭐먹을래 ? 성규형은요 ? "
" 나 ? 난 괜찮아. 너네 먹고 싶은거 먹어. "
동우와 우현이 이름모를 메뉴들을 시키는 동안 성규는 좀 풀어진 호원이와의 교신띠를 좀 더 질끈 동여멨다.그 모습을 빤히 구경하던 동우가 팔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 형.근데 그건 뭐에요 ? "
" 어떤거 ? "
" 그 팔목에 차고 있는 거요. "
" 아,이거 ? "
누르스름한 띠를 만지작거리며 묻자 동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팔찌에요?팔찌는 아닌 것 같은데..'하며 갸웃거렸다.
" 아아...그냥 뭐 ...팔찌 비슷해..."
'빈티지인가...'하며 궁금한 표정을 지은 동우가 피자와 스파게티가 나오자 서둘러 덥석 피자를 들어 입에 베어물었다.
+
" 아,이제야 좀 살 것 같네. "
피자를 먹고 나와 동우는 병원으로 향했고 나란히 걷고 있는 둘. 이미 가볼 곳은 거의 다 가본 것 같다.근데 이거 걸음걸이며 표정이며 잉란을 찾는 건지 아니면 잠시 산책을 나온 건지 둘의 걸음이 매우 편안하다.
" 우리 너무 느긋하다..."
" 넌 괜찮지만 난 인간이라 밥먹고 바로 움직이면 배아파.안돼."
" 아아... "
" 어 ? 야!!남우현~!! "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쪽팔리게 누가 이렇게 크게 날 불러?'하면서 주위를 살피자 이 쪽으로 걸어오고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 야,존나 올만?"
" 어.노복순.그래.너도 존나 오랜만."
" 어,그ㄹ....야,씨바 디질래 ?! 내가 노복순이라고 부르면 죽여버린다했지!!"
우현과 같은 중학교를 나왔던 여학생이었다. 일요일이라 누굴 만나러 시내에 나온 건지 짧은 치마에 폭풍 싸이월드 업뎃을 할 것만 같은 일찐st의 옷을 입고 있다. 물론 피부는 하얗게 분칠을 했고 머리는 고데기로 돌돌 말았으며 마치 향수의 뚜껑을 따 온 몸에 콸콸 들이부은 것 처럼 독한 냄새가 났다.
" 니 이름 노복순 맞잖아."
" 몇 번을 말해야 알아쳐듣니. 노.하.연.이라고."
하연의 원래 이름은 '노복순'.
얼굴도 이쁘장하게 생기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인기가 사그라들지않는 복순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때쯤 어무니,아부지에게 울며불며 매달려 개명을 했으나 우연인지 악연인지 하필 제일 까불이 우현에게 본명을 들킨 후 중학교 3년내내 온갖 놀림이랑 괴롭힘을 당했다. 뭐,그러면서 미운정 고운정 다 쌓이고 흔히 말하는 베프같은 사이지만.
" 존나 주말엔 집에서 오질나게 잠만 쳐자던 남우현이 왠일이래 ? "
" 볼일이 있어서. "
" 볼일 ? 무슨 볼... "
뒤늦게 우현의 옆에 서있던 성규를 발견한 복순이가 말을 잠시 멈췄다. 새하얀 옷을 입은 성규가 우현의 옆에 있어서 그런건지,아니면 햇빛을 받은 하얀 옷때문에 창창히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뻔하지만 복순이의 눈에는 잠시동안 슬로우 모션.
급히 뒤돌아 메고있던 숄더백에서 거울을 꺼낸 복순이 후다닥 갈라진 앞머리를 정리하고 틴트를 옅게 바른 뒤 다시 수줍게 뒤돌아섰다.
" 우현아,이 분은 누구셔 ? "
" 그냥 아는 형."
" 그랬구나...안녕하세요... "
복순이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수줍게 인사를 하자 성규도 어색하게 '어,안녕.'하며 인사를 건넸다.
" 어디 가는 길이였니,우현아 ? "
" 존나 갑자기 왜 이래. 평소대로해.밥도 드럽게 많이 쳐묵는 년이 목소리...윽."
우현의 옆구리를 퍽 때린 복순이 우현의 귓가로 다가가 어금니에 힘을 준채 작게 읊조렸다.' 즈끄 그르믄 목을 따브릴끄야.'
" 큼...아무튼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만나자,우현아 ? 아,오빠도...다음에 뵈요. "
" 어 ? ...어...그,그래."
" 미친.대낮에 술 쳐마셨냐 ? 암튼 빠이.그리고 코끼리 다리 주제에 치마는 좀 자제해라."
" 이 짚신벌레같은새끼가 뒤질......왜 이래,우현아. 오랜만에 만나서. 그럼 갈께 ! "
하며 수줍게 인사를 한 복순이 우현을 스쳐지나가며 귓가에 속삭였다.'오늘 카톡 씹으면 팔자주름 찢어버릴테야.'
" 누구야 ? "
" 쟤 ? 그냥 초등학교때부터 알던 애.신경쓰지마."
우현이 귀찮은 표정으로 귀를 후비며 다시 발을 뗐고 성규도 얼른 우현을 따라걷기시작했다. 배도 든든하겠다 그냥 바로 집으로 가서 낮잠이나 실컷 자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엄마일이긴했지만 자꾸 만사가 귀찮아진다. 성규는 연신 두리번거리고 우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터덜터덜 걷고 있을때 반대편 횡단보도에 걸어오는 명수와 성열이 보였다.
" 성규형~!!"
성규에게 신나게 달려온 성열의 두 손은 먹을거리로 가득했다. 핫도그,솜사탕,핫바...그리고 그 뒤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명수가 보였다.
" 이게 다 뭐야 ? "
" 이거 먹어봐.대박 신기해."
손에 들고 있던 솜사탕을 뜯어 성규의 입에 쿡 쑤셔넣은 성열이 ' 입안에 넣자마자 바로 사라지지 ?! '하며 신나게 웃더니 솜사탕을 한아름 물어뜯었다.
" 너네 둘 무슨 데이트했냐 ? 솜사탕에..핫바에.. "
우현이 묻자 명수가 정색을 하며 자신의 지갑을 보여주더니 성규에게 물었다.
" 형. 얘 천사에요,식충이에요 ? 어째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어..."
" 야,그거 좀 사줬다고 생색은...아무튼 잉란은 찾았어 ? "
입술에 붙은 솜사탕을 떼먹던 성열이 물었다.
" 아니...못 찾았어. 너네들은 ? "
" 우리 ? 우리도 못 찾았지."
" 찾으러 돌아다닌건 확실해 ? "
의심하는 얼굴로 물어오는 우현에게 성열이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아마 이 근방은 다 돌았을걸 ?'하며 핫바를 질겅질겅 씹어댔다.
" 휴...일단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
" 왜 ? "
손을 뻗어 햇빛을 만지작거리던 성규가 ' 곧 비가 올꺼야.그것도 엄청많이.'하자 성열도 얼른 손을 뻗어 햇빛을 만져본다.
" 그러네.무겁고 탁한게...쯥,기분나쁘게 비는..."
그리고 그 둘을 따라 햇빛을 만져보는 우현과 명수.
" 야,멍수야.뭐 느껴지냐 ? "
" 아니. 그냥 존나 따뜻한데... "
" 얼른 가자.곧 쏟아질 것 같아."
성규가 걸음을 재촉했고 내일 보자는 인사와 함께 명수와 성열은 정류장쪽으로 성규와 우현은 반대쪽으로 서둘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
" 다녀왔습니다~"
" 너네 둘 어디갔다와 ? 아침도 안 먹구..."
" 아,급한 일이 있어서."
" 그나저나 성규 복장이..."
우현의 엄마가 성규의 복장을 훑어보더니 ' 성규 넌 왜 하얗게 차려입었어 ? 눈부시게 빛나는게 누가 보면 꼭 천사라 해도 믿겠다..호호.'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 아하하..감사해요."
" 밖에 비오니 ? "
" 아직이요.근데 이제 아마 막 쏟아질 거에요 ."
" 엄마,우리 올라갈께.점심은 먹었어."
" 응~ "
우현과 성규가 올라간 뒤 홈시어터에 태교 음악 CD를 넣은 우현의 엄마가 편안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고 배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
장마가 시작된 건지 창밖으로 미친듯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습한 기운이 들어와 컴퓨터를 하다가 창문을 닫고 미니 에어컨을 켠 우현이 침대에 앉아 비밀노트에 무언갈 열심히 끄적이는 성규에게 물었다.
" 야."
" 응,왜 ? "
" 한 달 지나면 너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는거야 ? "
" 그렇겠지."
" 만약에 못 찾으면 ? 한달안에 못 찾으면 ? "
" 못 찾아도 다시 올라가야지. 걱정마. 너희 어머니 아기혼은 내가 어떻게해서든지 책임질께."
입술을 앙 다문 성규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어보이자 우현이 픽 비웃음을 흘리며 '어디서 나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래'하자 '진짜라니깐.나만 믿어'하며 가방에 노트를 넣는 성규의 모습에 우현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한참 집중하며 총게임을 하는데 키보드 옆에 놓아두웠던 핸드폰에서 문자알림음이 울려왔다.아이쉬발,지금 중요한 순간이라서 확인하기 힘든데...결국 상대편 총에 맞아 리스폰상태에 있을때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 야.나 노하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대..귀신같은년.'ㅇㅇ'라고 대충 답장을 찍어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온다.
[ 야,아까 그 오빠누구야]
[ ㄴㄱ ]
[ 단답하면 죽여버린다.아까그하얀옷입은오빠]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확인한 우현이 침대에 앉아있는 성규를 휙 쳐다보며 답장을 했다.
[ 김성규 ? ]
[ 아.그오빠이름이 김성규구나.암튼그오빠.]
[ ? ]
[ 그오빠여친있음?]
목적이 이거였구만 ? 우현이 콧방구를 뀌며 핸드폰을 책상위에 휙 던지고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그러자 1분도 안되서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세상에나!이번엔 전화다. 분명 이 전화를 안 받았다간 받을때까지 할 복순이였기에 우현이 게임 속 캐릭터를 본진에 숨겨놓고 전화를 받아들었다.
" 왜 전화질이야."
[ 디진다.문자보고 씹으면.]
" 안 씹었어.답장을 안 한거지."
[ 아,그렇구...미친놈 뭐래. 아무튼 그그그 김성규오빠 ? 그 오빠 여친 있냐고.]
" ...... "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우현때문에 결국 성규가 ' 왜애 ? '하면서 물어오자 아무일도 아니라며 손짓을 한 우현이 얼른 대답하라는 복순이의 욕을 들으며 말을 이었다.
" 아니 없을 껄."
[ 오.씨바.아싸.야,우리 친구맞지? ]
" 아니. "
[ 그럼 오늘부터 다시 친~구. 아무튼 나 그 오빠 소개시켜줘.]
" 뭐 ? "
이 년이 미쳤나 ?
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 나 진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소설속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는데...아니야,시발.이건 운명이야.아,어떡해.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려.]
" 가슴도 없는 년이 두근은 무슨. 끊는다."
[ 야 ! 끊ㅈ...]
매몰차게 전화를 끊고 배터리까지 꺼놓은 우현을 멀뚱멀뚱쳐다보던 성규가 물었다.
" 누군데 ? "
" 아까 그 여자애.노복순이."
" 아아...근데 왜 ? 싸우는 거야 ? "
" 아니. 너 소개시켜달래."
" 나,나를 ? "
" 응.너를.뭐 첫눈에 반해서 운명이래나 뭐래나."
'아오,렉쩌네.'하며 마우스를 쾅쾅 누른 우현이 모니터만 바라보며 '관심있어?'라고 물으며 뒤돌아봤다.
" 아,아니 !!! 아,안 해줘도 돼....."
" 뭐하냐 ? 참나. 누가 해준댔수 ? 혼자 오버는..."
진짜 소개시켜주는 줄 알고 손사래까지 하는 성규를 보며 웃던 우현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벌떡일어난다.
" 아,씨발!!! 사진! "
그러더니 곧바로 1층으로 후다다닥 달려간다.
" 엄마 !!! 안돼 !!! "
" 깜짝이야 !! "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으려던 엄마가 깜짝 놀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 애기 놀래면 어쩌려고 그래!!'하며 우현의 등을 철썩 내려치자 그러던말던 엄마의 손에 들려있던 빨랫통안을 뒤져 오늘 자신이 입었던 바지를 꺼내들더니 주머니에서 서둘러 사진을 꺼냈다. 우현과 동우,그리고 조금 어색한 성규. 세 명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사진을 꺼낸 우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까찍은 스티커사진 중 4컷은 동우가 가져갔고 나머지 6컷은 우현이 챙겼다. 웃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표정도 아닌 성규의 표정은 다시 봐도 웃긴다.
" 갑자기 어디갔다와 ? "
" 아,이거. 그냥 세탁기에 넣고 돌릴뻔했네."
우현이 반짝 반짝 코팅된 스티커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동시에 성규의 억울한 듯한 팔자눈썹이 아래로 추욱 쳐졌다.
" ..그거..나 이상하게 나온거잖아..."
" 누가 이상하게 표정 지으랬냐 ? ...으허헉 !! 다시 봐도 웃기네. 아,표정봐.존나 이때 눈 뜬거냐,감은 거냐 ? "
" 이씨..."
성규의 표정을 가리키며 웃어댄 우현이 연신 성규를 놀려댔다.
물론 열 컷 중에서 우현이 웃어대는 한 장 빼면 모두 성규의 표정은 화사하고 깜찍했다. 처음 찍은 첫 컷에서만 눈이 좁쌀만 하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이고...
" 근데 진짜 작다,눈."
" 안 작거든 ! "
" 아냐,작아. 나랑 동우 사이에 있는 너 봐봐. "
동우와 우현과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사진을 성규의 눈앞에 들이대며 비웃는 우현. 자신이 봐도 좀 작게 나오긴했다.
" 거봐,작지. "
" ....... "
씩씩 거린 성규가 우현의 손에 들려있던 스티커사진을 뺏으려하자 날렵한 우현이 손을 번쩍 들고 피하며 낄낄거렸다.'어쭈,뺏어보겠다고 ?'하며 오히려 성규를 살살 약올린다. 거기에 더 약오른 성규가 씩씩거리더니 우현에게 다가가 그걸 뺏으려고 깡총깡총 거렸다.
" 이리줘 ! "
" 싫은데에~ "
두둥실 날아서 뺏으려고 하자 다시 사진을 밑으로 내리고 성규가 바닥에 내려오면 다시 손을 번쩍 들어 낄낄거리는 우현. 그렇게 한참 놀리는 우현과 사진을 뺏으려던 성규가 실랑이 하던 도중 성규와 우현의 발이 꼬여 그대로 바닥에 철퍽 고꾸라졌다.
" 어어 ! "
" 으읍 ! "
이미 우현의 손에서 떨어진 스티커사진이 나풀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등이 아려오는 걸 느낀 우현이 무언가가 자신의 입술을 꾸욱 누르고 있는 걸 느끼며 눈을 떴고 성규 역시 넘어질때 바닥에 박은 무릎에 인상을 쓰며 눈을 번쩍 떴다. 코가 맞닿아눌려있는 기분이 참 묘하다고 느낀 우현이 눈을 꿈벅꿈벅거렸다. '으악!!' 하고 성규가 벌떡 일어나 뒤돌아섰고 바닥에 누워 스티커사진을 잡던 그 포즈 그대로 손을 공중에 뻗은채 누워있는 우현이 잠시 멍을 때렸다. 방금 입술에 꾸욱하고 아주 질펀~하게 닿았던게..
" 아,시발...시발..."
우현이 붉어진 볼을 한 채 팔을 올려 눈을 가렸다. to.첫뽀뽀.안녕,잘가렴.나의 첫뽀뽀야. 순결하고 소중했던 첫 입술박치기가 이렇게 날라가는구나..
근데 왜 볼이 붉어지지.우현이 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미,미안."
" ...어... "
애매모호..아니 이 애매호모한 분위기는 뭘까.
평소같았으면 버럭 성질을 내야할 우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침대에 앉았고 책상쪽에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성규.
방안에 민망하고 후끈거리는 정적이 흘렀다. 순간 하늘에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이 들려왔고 그제서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이 ' 나 화,화장실 좀'하며 방을 나왔다.방을 나오자마자 자신의 방금 했던말을 곱씹었다.내가 언제부터 화장실 갔다오는 걸 말하고 다녔지 ?
" 아이썅..."
입술을 벅벅 문질러봐도 말캉물컹몰랑말랑했던 입술의 감촉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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