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조인간이다. 신생아로 태어나 학교와 직장생활을 거치며 차근차근 세상을 배워나간 사람이 아니다. 날 때부터 이렇게 태어났고 더 이상 자라지도 않는 인형일 뿐이다. 누군가의 피조물. 원치 않는 네버랜드에 속박된 삶. 처음에는 차라리 내가 폐기되어 버리기를 바랬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다. 칙칙하기 짝이 없는 연구소를 탈출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살아볼 셈이다. 적어도 지금 나는 연구소 밖의 세상에 나와 있으니까.
Return to Zero
01
w. 랑두
내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에는 신기한 문화가 있다. 이사떡 돌리기라니. 왜 하필 치킨이나 피자 같은 음식들 놔두고 떡을 돌리라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재미있어 보이길래 상가에서 떡을 좀 사 왔다. 수북하게 담긴 시루떡을 보며 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 떡을 가지고 옆집을 방문해서 김종현과 안면을 트고, 그 후로는 설탕이나 세제 같은 각종 생활용품들을 빌리러 가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충분히 친밀도가 쌓였다 싶을 때에는 집에 인터넷이 끊겼다고 뻥카를 날리고 김종현네 집 컴퓨터를 쓰는 척하면서 거기 있는 연구자료들을 몽땅 삭제해 버리는 거지. 완벽하다. 차질은 없을 거다. 곧 쓰러질 듯 위태로운 떡탑을 들고 조심스럽게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자다 일어났는지 목소리가 좀 잠겨 있다. 열두 시가 훌쩍 넘었는데. 주말에 늦잠 자는 건 김종현 같은 일중독자라도 똑같은가 보다. 하긴 어떻게 사람이 일만 하고 살겠어, 잠이라도 푹 자야 좀 삶의 낙이 생기지.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 떡 좀 드리려구요."
[...아, 잠시만요.]
첫인상이 좋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친화력이 좋아야 한다, 웃어야 한다. 이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인간다워야 한다. 김종현이라면 아주 약간의 실수만으로도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릴 테니까.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자다 일어나서..."
...근데, 아들내미가 있다고는 아무도 말 안 해줬잖아!
"..."
"..."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녀석은 빤히 쳐다본다.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나이가 좀 있다는 건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유부남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 못 했다. 게다가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일 줄은 진짜 몰랐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건 내 불찰이다. 좀 더 조사했어야 했는데. 경우의 수를 조금 더 생각해봤어야 했다. 당장 집으로 달려가서 벽에 머리를 박아도 모자라지만, 일단 지금은 당황하지 않은 척을 해야 한다. 난 당황 안 했어. 그래, 난 당황 안 했다고.
"하하, 아버지는 안 계시니?"
녀석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젠장, 누가 봐도 당황했잖아!
"나는 그, 저기, 옆집 이사 온 사람이고. 이름은 이00라고 하거든? 스물다섯 살이고, 그러니까, 어..."
"..."
"고, 공부 열심히 하고! 내가 수학은 진짜 잘 하니까 모르는 문제 있으면 물어봐도 돼. 그럼 자주 보자!"
망했다. 벌써 망했어. 인조인간 주제에 연기를 이렇게 못 하다니. 녀석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집으로 슝 뛰어들어온 나는 숨을 고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 김종현은 아들이 있다. 심지어 그 아들은 고등학생쯤 되어 보인다. 결국 한숨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다. 식탁에는 아직 윗집, 아랫집에 돌려야 할 떡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미 사그라져 버린 의욕이 도저히 다시 솟질 않는다. 아 몰라, 옆집에 돌리면 됐지. 침대에 풀썩 눕는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기회라는 건 결국 시간이 만들어주는 거니까, 살다 보면 언젠가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
"아들?"
생필품 몇 개를 챙기러 황민현네 집에 찾아갔다. 역시나 이른 시간부터 기타를 붙잡고 있던 놈은 듣던 중 재미있는 얘기라는 듯 웃음기 있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황민현과의 관계는 친구쯤으로 정리하면 되려나? 같은 아버지를 뒀으니 어쩌면 남매사이라고 봐도 될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황민현은 날 만든 영감탱이의 아들이다. 평일에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주말엔 의외로 건전한 여가생활을 즐기는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주말마다 영화관에 틀어박혀 있더니 어느새 기타로 옮겨앉은 모양이다.
"그 사람 싱글이라며!"
"싱글이지."
"근데 왜 거기서 웬 고딩 놈이 튀어나오는데?"
"고딩... 혹시 귀염상에 키는 이쯤 되는 남자애야?"
정확하다. 이 자식 알고 있었으면서 나한테 말 안 한 거야? 고개를 끄덕이니 황민현이 풋 웃음을 터뜨린다.
"뭐야, 웃겨?"
"아니, 푸핫, 착각도 유분수지. 걔가 진짜 고등학생으로 보이든?"
"...많아야 열아홉일 줄 알았는데."
"니가 본 그 고딩이 김종현이야, 바보야. 나이는 스물여덟. 기계공학연구소 이스터 소장."
"..."
이건 아니잖아. 넋 나간 표정의 날 보며 황민현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배를 잡고 깔깔댄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저 놈의 심리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르는 문제 있으면 물어봐도 돼!'라고 입 털지나 말걸 그랬다. 큰일났다. 겨우 망한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한마디로 난 지금 아주 엿 됐다.
***
초면에 말 놓은 걸 사과해야 하나? 근데 갑자기 태도가 바뀌면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그냥 계속 고등학생으로 착각하고 있는 척이라도 해? 내가 반말하는 게 많이 거슬리면 언젠가 본인 입으로 나 고딩 아니고 스물여덟이오 털어놓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고민을 계속 하며 옆집 문앞을 서성거리는 중이다. 떡 접시도 받아올 겸 내 무례했던 언행을 사과하고 오자는 게 목적이었지만 십 분째 사과는커녕 초인종도 못 누르고 있다. 결국 접시 돌려받기와 사과하기, 둘 중 어떤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려던 참에 삐리리 알림음이 들리더니 옆집 문이 벌컥 열렸다. 세상에, 나도 진짜 운 없네.
"...어."
"..."
"아, 안녕."
"받아요, 일단."
그가 반질반질 광이 나는 녹색 접시를 건네준다. 그새 설거지라도 한 모양이다. 그냥 줘도 상관없는데. 얼떨결에 접시를 받아들자 김종현은 짧게 한숨을 내쉰다. 저건 또 무슨 의미야. 한숨 뒤에는 무슨 말이 있을지, 이거 상당히 불안하다.
"스물다섯이랬죠."
"..."
"당신보다 나이 많아요, 나."
"...아."
"몇 살 더 먹었다고 우열 가리자는 소린 아니고, 그냥 오해는 좀 풀고 가야겠다 싶어서."
"..."
"떡 잘 먹었어요."
그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난 뭐라고 더 말하지 못한다. 아니, 할 말이 없다. 한숨 뒤의 미소는 무슨 의미인지, 지금 내 데이터만으로는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는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고, 열려있는 문 사이로 쏙 들어가버린다. 다시 경쾌한 도어락의 알림음과 문과 벽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겹쳐진다. 나는 멍하니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본다. 뭐지, 저 사람?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랑두입니다! 1화는 등장인물 소개 느낌으로 가볍게 써 봤습니다. 초반엔 별로 무거운 소재가 아니라서 쓰기가 훨씬 쉬웠던 것 같아요(물론 쓰기 쉬웠던 만큼 재미는 반감이라 차마 포인트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껄껄!) 등장인물은 진짜 여기서 소개한 인물들이 답니다ㅋㅋㅋㅋ 특별한 에피소드가 추가되지 않는 이상 더 안 나올 예정이에요. 봐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ㅠㅠ 움짤 서치하면서 느낀 건데 부기는...정말 정말 잘생겼어요... 어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