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조인간이다. 몸속엔 소화기관이 아닌, 섭취하는 모든 영양소를 전기로 바꿔버리는 기계장치가 들어 있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언제든 프로그래밍되어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로봇이자 실험체다. 실제 인간과 거의 흡사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은 아닌 존재. 내가 그런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필이면 내게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까지 도입되어 있어, 그걸 실감할 때면 좀 우울해지곤 한다. 그때마다 내 신세를 한탄하는 대신 감정 시스템을 개발한 못된 녀석을 원망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김종현이 원망스럽다.
Return to Zero
02
w. 랑두
언제부턴가 음식을 많이 만드는 습관이 생겼다. 집에 시루떡이 아직 한참 남아있어서 옆집에 좀 가져다줬더니 김종현이 꽤 좋아했었다. 떡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하나하나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쌓여갈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쾌감을 느낀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기분이 좋다. 단순히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기분이다. 뭐랄까, 모르는 단어가 있어서 앞뒤 문맥을 보고 대충 때려맞혔는데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까 그게 딱 들어맞은 그런 기분 있잖아. 말로 설명 못할 묘한 짜릿함.
"안녕하세요! 카레 좀 했는데 드실래요?"
"와, 잘 먹을게요. 카레 좋아하는데."
김종현은 나긋나긋하게 웃는다. 넘치게 많은 음식들을 가져다줄 때, 처음에는 몇 번 거절하나 싶더니 어느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옆집에 나눠주고도 남았던 내 음식은 종종 윗집, 아랫집까지 전달되곤 했다.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 김종현이 더 이상 내 호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게 좋았다. 처음 이사 왔을 때의 민망한 사건도 어느새 슬슬 잊혀져 갈 무렵이었다.
"야 이 자식아, 네가 바로 오늘 아침에 챙기겠다고 했잖아."
오후에 소나기 예보가 있었다. 근데 빌어먹을 황민현 녀석이 또 우산을 안 챙겼단다. 또 우산 챙기는 걸 잊어버릴까 봐 아침에 친히 문자까지 해 줬고, 심지어 그 자식은 알겠다고 대답까지 했는데 또 까먹었다. 머릿속에 정보가 들어오는 족족 먹어치우는 거지가 들었나. 투덜대면서도 난 우산을 챙겨 큰길 가장자리에 섰다. 습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온다. 비 오는 날은 어쩐지 별로다. 전기로 움직이는 내게 물은 어쩔 수 없는 상성인가 보다.
- 지금 오게?
"응, 지금 택시 잡는 중."
- 천천히 와. 아버지가 오는 김에 네 프로그램도 좀 손보고 싶대.
"...또? 얼마나 됐다고?"
- 좀 더 추가할 게 있다나 봐. 자세히는 모르겠다, 미안.
그 말을 듣는 순간 힘이 쫙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물이 어느 정도 차 있던 항아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난 내 프로그램을 조정하는 게 싫다. 조정에 조정을 거듭함으로써 완벽해지고 싶지 않다. 모든 걸 다 갖췄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인간다움에서 한 걸음 멀어졌다는 뜻이 되니까. 그것도 아주 큰 보폭으로 한 걸음.
"...안 갈래."
- 00야.
"미안. 비 맞지 말고 숙직실에서 자."
- ...
착해서 그런지 황민현은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다. 단호하게 쐐기를 박으며 화를 내지도, 부탁이라며 빌지도 않는다. 그냥 알았어, 하고 마는 게 황민현이다. 설령 나를 못 데려왔다는 이유로 자기가 꾸중을 듣더라도 담담한 반응을 보인다. 내가 자꾸 걔를 방패삼아 뒤로 숨는 것도 어쩌면 그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속이 상했다. 프로그램을 조정할 거면 슬픔, 속상함, 분노 같은 감정들이나 좀 제거해 줬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그게 되잖아. 마우스 몇 번 클릭하고 키보드 좀 두드리면 평생 동안 좋은 기분만 느끼면서 살 수 있을 텐데. 내 데이터는 슬픔과 속상함과 분노가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건지 아직도 분석하지 못했다.
"...앗,"
집까지 터덜터덜 걷는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방울씩 내리다가, 곧 샤워기를 틀었을 때처럼 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하필 회색 후드티를 입어서, 물방울이 닿은 자리에 금세 선명하고 짙은 자국이 남는다. 황급히 우산을 펼쳤다.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발걸음이 무겁다. 황민현 몫의 우산을 쥔 다른 한 손에 힘이 꾹 들어간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귀에 감겼다.
***
며칠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 단순한 성격이라 화가 나도 채 하루를 못 넘겼었는데 이번에는 좀 오래가는 것 같다. 집에 한참 동안 틀어박혀 있다가 밖에 나간 이유도 가관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젠장,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라도 사올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김종현이랑 마주쳤다.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 나온 거라 거의 폭탄 맞은 거지꼴이었다고. 내 인생 스탯분배를 대체 누가 이딴 식으로 해놓은 건지 모르겠다. 다 좋은데 운이 없어요, 운이.
"...안녕하세요."
내가 듣기에도 힘 빠진 인사였는데, 김종현은 그에 못지않는 무표정으로 간단한 목례만 하고 날 지나쳐갔다. 뭐지? 저 사람도 오늘따라 어둡다. 김종현한테서 항상 뿜어져 나오던 그 특유의 색깔이 아니다. 원래는 연한 올리브 색이었는데. 마냥 밝고 경쾌하지는 않지만 부드럽고 단정하고 깔끔했던. 그런데 오늘 그에게서 느낀 색깔은 올리브 색이 아니라 짙은 남색이다. 가라앉았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곤 봉지를 달랑거리며 김종현의 뒤를 따른다.
"저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엘리베이터 안의 숨막히는 공기를 견디지 못한 난 비닐봉지를 뒤적거려 사탕 봉지를 꺼내든다. 입이 심심할 때 하나씩 꺼내먹으려고 샀던 거다. 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미안합니다. 근데 원래 우울할 때 단 거 먹는 게 진짜 도움 많이 되거든요. 내 데이터에 따르면 단 것을 먹을 때 세로토민과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분비되어... 아니, 너무 멀리 갔나. 어찌됐든.
"이거 먹어요."
난 왜인지 위로에 서툴다. 이런 점도 결국 김종현의 영향일지도. 봉지를 받아든 김종현은 날 빤히 쳐다본다. 애초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연구소 밖으로 나온 나는 몇 번을 봐도 그런 표정에 적응하지 못한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말로 받아쳐야 할지는 더 모르겠다.
"밥 먹었어요?"
"네? 아직..."
"술친구 좀 돼 줄래요?"
거울에 비친 나는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다. 분명히 내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아무래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김종현은 내게 좀 더 가까워져도 되겠냐고 물었고,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다. 나는 그와 친해져야만 한다.
"그러죠 뭐. 치킨 시킬까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위장한 내 대답에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무표정이 미소로 변함과 동시에 네 주위의 가라앉은 공기가 연한 올리브빛으로 물든다. 김종현은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겨우 한 달 알았는데 일 년은 알고 지낸 것 같다. 내 두뇌는 그 이유를 간단하게 정의내렸다. 난 그의 손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그의 피조물이니까. 그 이유일 거다. ...아마도.
***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요."
맥주 캔을 따 건넨다. 공원에서 먹을까 했는데 한창 모기들이 날뛰는 계절이라 그냥 집으로 시켰다. 김종현 씨 집은 생각보다 깔끔하다. 서류나 문서들이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거실 책꽂이에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무심코 말을 던져놓고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책꽂이를 눈으로 훑는다.
"...아. 죄송해요, 괜히 딱딱하게 굴어서..."
오히려 미안해하는 그의 말투에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런 의미 아니라고!
"비꼰 거 아니에요! 내 말은...!"
"알아요. 그냥 제가 괜히 신경 쓰여서."
"..."
"지금은 괜찮아요. 아까 좀 예민한 일이 있었어서 그래요."
차분한 말투다. 김종현이 평정을 잃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런 점은 좀 본받아야 될 텐데. 난 감정의 동요가 크다. 감정 시스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속상한 일은 묻지 않는 게 예의다. 도를 넘어선 질문은 관심보단 오지랖에 가깝다. 그래서 난 그가 먼저 말을 꺼내주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난 내 이야기를 먼저 털어놓기로 한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취미, 특기, 꿈.
"00씨는 잘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요리도 그렇고."
맥주캔이 점점 비워져 가고 있었다. 그가 중얼거리듯 내뱉는다. 난 남은 한 모금을 들이키고 빈 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취하지 않는다. 취할 수 없다. 난 멀쩡한 정신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가끔 보면 부러워요."
그가 툭 맥주캔을 내려놓는다. 눈에 졸음이 가득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난 잘하는 게 많다. 요리나, 체육, 노래 등등. 근데 그건 내가 인조인간이기 때문이잖아. 나는 인간보다 더 출중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김종현은 사람이다. 그것도 '잘하는 게 많은 인조인간'을 만들어낸 사람. 내 창조주는 자기 피조물더러 부럽다고 말한다. 지나친 겸손이다.
두 번째 맥주캔을 따 홀짝이며 그의 눈이 스르르 감기는 걸 지켜본다. 주량은 맥주 한 캔.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다. 대화를 통해 나 스스로 무언가를 알아낸다는 건 정말 기분이 좋다. 어질러진 치킨 박스와 캔들을 대충 봉지에 주워담았다. 깨울까 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소파에 놓인 쿠션으로 머리를 받쳐 주고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켜져 있는 형광등을 모두 소등하고 살며시 집을 나왔다.
***
"..."
침대도 아닌 거실에서 어제 옷차림 그대로 깨어났다.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커튼을 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전날의 하루를 되짚는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날따라 연구원들이랑 의견 대립이 심했던 것 같다. 하긴 몇몇 고위직들은 그전부터 아들뻘의 연구소장을 못 미더워했었지. 씁쓸한 실소가 터져나왔다. 커튼이라도 칠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는데 탁자 위에 놓인 사탕봉지가 보인다.
'그래서 가끔 보면 부러워요.'
취중에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푹 한숨을 내쉰다. 별 꼴값을 다 떨었네 진짜. 마른세수로 시작한 자책은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걸로 이어진다. 앞으로 그 사람 얼굴 어떻게 보라고. 일단 정신부터 차려야 한다. 생수 대신 사탕을 한 알 까 넣었다. 인공적인 과일향을 입안에 문 채 옆집 여자에 대해 생각한다. 다짜고짜 고딩 취급 당했던 첫만남. 시루떡이 많이 남았다고, 이왕 먹을 거 나눠 먹자는 친근한 말을 들었을 때. 앞뒤 말 다 자르고 대뜸 '이거 먹어요'라며 사탕봉지를 건네던 어제 저녁.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는 건 잠시 뒤에야 자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은 내가 세워놓은 '좋은 사람'의 기준 안으로 끌려들어온 듯하다. 오래 알았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좋은 이웃의 관계로 남기를 원한다.
랑두입니다. 본문 도입부에 나오는 독백은 스토리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으니 가볍게 읽고 넘기셔도 됩니다. 그냥 여주의 복잡한 심리상태 중 하나예요. 1화랑 문체가 많이 다른데, 이게 리턴 투 제로의 원래 문체입니다 껄껄. 1화는 순전히 등장인물 소개를 위한 라--이트한 에피소드였기 때문에 보다 똥꼬발랄하게 썼던 거예요! 사실상 1화는 그냥 안 보고 넘기셔도 됩니다(...) 제대로 된 내용전개는 2화부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미리 써둔 게 2화까지였기 때문에 3화부터는 업로드가 조금 늦어질 수도 있어요ㅠㅠ 포인트는 중요한 에피소드에만 아주 조금씩 걸 예정이에요. 아깝지 않을 정도로 조금만요.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