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사랑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와
참고: 구름이네 & 클라우디 에스프레소 구조 |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클라우디 에스프레소 |
화요일이었다. 민현선배와의 점심 약속이 있는 날.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고 하기에는 내 하루하루가 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렇지만 안 기다렸던 건 아니라서, 설레는 마음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기까지는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뭐 입냐...."
마음 먹고 꾸며보려고 했지만, 텅텅 비어버린 주머니 사정에 옷을 안 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걸 내 옷장은 증명해 보이고 있었고.
뭘 좀 사놓았어야 하나 생각이 들더라도 이미 늦어버렸다. 평소에 입던 거 그대로 입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소리다.
룸메라도 있으면 빌려보기라도 하겠는데, 메이트들이 죄다 남자라는 것은 이럴 때는 특히 별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하아... 괜히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바지보다는 치마가 낫겠다 생각해서 오래간만에 스타킹을 신고, 치마를 입었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꽤 어색했다. 그러나 맘에 안 들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조금만 더 늦으면 지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얼른 가방을 메고 걸음을 서둘렀다.
- 오세요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
"누나! 여기!"
화요일이라는 건 곧 호텔경영론이 있다는 걸 의미했고, 그건 곧 강다니엘이 내 자리를 맡아주고 있다는 걸 뜻했다.
같이 가지 말자는 내 등쌀에 밀려 다니엘이 택한 선택지는 일찍 가서 내 자리를 맡아주는 일이었다.
그날, 삼겹살을 먹은 뒤로 부쩍 가까워진 다니엘과 나는 이제 조금은 (물론 아직까지도 조심해야 했고, 조심하고 싶었지만) 같이 앉는 게 덜 어색해졌다.
물론 처음부터 어색했던 건 나 혼자뿐이었던 것 같지만... 하여간, 그랬다.
"와아....."
"뭐. 왜."
"누나 뭐 오늘 어디 가요?"
"나? 아, 아니.. 아닌데."
"누나 치마 입은 거 첨 보는 것 같은디."
"그, 그런가... 뭐 그냥 눈에 보이길래 입었는데."
오늘 민현선배와 밥을 먹는다는 사실은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나다. 물론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게 못할 짓이란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다니엘이 알게 되면 좀... 피곤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속이려는 생각은 아니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속여야 할 때도 있을 수는 있는 법이라는 합리화를 시작했다.
"......"
자리에 앉으니 생각보다 치마가 껑충 올라갔다. 급하게 나온다고 걸칠 것 하나 챙기지 않은 게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이라도 올려놔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책상 오른쪽 가방걸이에 걸어놨던 가방을 들어올리려는데 다니엘이 저가 입고 있던 옷을 내밀었다.
"덮어요."
어? 어.... 어... 고맙다. 엉겁결에 받아 들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니 어깨를 으쓱, 해보이는 다니엘이다.
다니엘이 내민, 빨간색과 검정색이 교차하는 체크남방에서는 다니엘에게서 나는 냄새가 났다. 첫향은 시원하면서 잔향은 아기 옷의 세제 냄새 같은 뽀송한, 그런 향.
나는 조용히 다니엘의 온기가 남아 있는 체크남방을 펴서 내 다리에 덮었다. 다니엘은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과제는 주말까지 가상강의실에 제출하세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다행스럽게도 교수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수업을 끝내주셨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수업의 절반은 졸고, 절반만 들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군소리 없이 내게 본인의 필기를 넘겼다. 내일 줄게. 고마움을 한껏 표현하는 내 눈빛을 쳐다보지도 않은 다니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챙겼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을 부비적거렸고, 오늘따라 밥 같이 먹자는 소리를 하지 않는 다니엘이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곧 서둘러야 했기에 나 먼저 간다! 하는 말을 남기고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며 카톡을 켜자 가장 위에 와있는 건 민현선배의 개인톡. 태호스시에 먼저 가있을게, 천천히 와. 하는 다정한 말에 음성지원이 되는 듯했다.
'화목한 구름이네'에도 약간의 메세지가 와있었다. 민현선배에게 지금 끝나서 가고 있어요! 하는 답장을 보내놓고 구름이네 단톡을 들어가 보았다.
[다니엘: 오늘 점심 약속 없으신 분?]
[민현선배: 나는 ○○랑 태호 가서 스시 먹으려구. 맛있게 먹어 니엘이~^^]
수업 중, 그러니까 내가 한창 졸 때 다니엘이 단톡방에 보낸 카톡이었다. 나한테 밥 같이 먹자고 따로 묻지 않았던 건 민현선배의 답 때문이었던 것 같다.
태호스시는 학교 앞에 있는 스시 맛집이었다. 점심시간에는 동운대 학생은 물론 학생이 아닌 사람들까지 합세해서 바글바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혹시나 기다리게 될 걸 배려해서 미리 가있겠다는 민현선배의 말에 감동한 것도 잠시, 아까 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가방을 챙기던 다니엘이 떠올라 왠지 좀 미안해졌다.
....왜 미안한 거지, 근데. 미안할 만한 이유까지는 없는데. 점심식사를 같이 못해서? 그거야 원래 그래왔잖아. 그럼 민현선배랑 밥 먹어서..? 그리고 내가 그걸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서?
누나 뭐 어디 가요? 하고 묻던 다니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인가 보다, 하고 나 혼자 결론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서 무거워진 마음과 반대인 가벼운 발걸음은 태호스시로 향하고 있었다. 뛰지 말구 천천히 와도 돼~ 민현선배의 카톡이 휴대폰 화면 위에 떴다.
- 오세요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
"많이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민현선배를 향해 꾸벅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선배는 뛰지 말라고 했지만, 설레는 발걸음이 저 혼자 자꾸만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조금 밭아진 숨을 몰아쉬며 민현선배를 봤더니, 급하게 왔구나. 하며 웃었다. 나는 식탁 위에 곱게 놓인 수저와 물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선배는 수업 열심히 들었어? 하고 물었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호경이야 늘 반은 졸고, 반만 들어요. 라고 대답하려니 과 수석인 선배 앞에서 너무 작아지는 것 같아서.
네... 하하. 하며 멋쩍게 웃으니 닿아오는 미소가 달콤하다. 아, 메뉴는 내가 알아서 시켰어. 열 피스짜리 세트. 괜찮지? 하고 묻길래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비스로 나오는 냉모밀만 먹어도 선배와 함께라면 행복할 걸요. 하는 마음을 숨기느라 고생 좀 했다.
"일하면서 학교 다니는 건 힘들지 않아? 피곤할 것 같은데."
민현선배는 젓가락질마저 완벽했다. 차분히 초밥을 들어 간장에 찍고 입에 가져가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부잣집 도련님 같기도 하구... 왕자님 같기도 하구... 나도 모르게 먹는 건 둘째 치고 얼굴 감상만 하고 있는 걸 인식하게 되니, 괜히 좀 부끄러웠다.
조금 피곤하긴 한데, 원래도 학기 중에 계속 알바는 해왔어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했더니 눈을 휘어 웃는다. 눈웃음조차 완벽... 대체 부족한 게 뭘까.
"혹시라도 내가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줘.
음... 뭐 세탁기 좀 돌려달라든지, 도서관에서 자료 좀 찾아봐 달라든지.. 그런 거?"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했다. 이 스윗함 실화냐? 싶어서 스시 맛이 좋은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도 없었다.
나는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고, 선배는 뭘, 당연한 건데. 하며 우물우물, 초밥을 먹었다. 그 모습마저도 너무 귀여워서 난 끙끙 앓았다.
마음이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은, 꿈처럼 느껴졌던 초밥집에서의 시간이 끝나고 선배는 먼저 계산지를 가져가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고, 선배는 나두 맛있게 잘 먹었어. 하고 나를 보며 웃었다. 커피라도 사드리고 싶은데, 다시 수업 시간을 맞춰 학교에 들어가려면 좀 빠듯했다.
"다음에 클라우디 오시면 완전 맛있는 커피 한 잔 만들어 드릴게요, 선배.
오늘 사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빠듯해가지구..."
"정말? 나 기대해도 되는 거야?"
장난스레 묻는 선배를 향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면 다음에 클라우디 놀러갈게. 하는 말에 이어지는 눈웃음.
선배는 도서관으로 가야 하고, 나는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해서 다시 학교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두둑이 부른 배가 오늘따라 잘 느껴지는 게, 안 입어버릇 하던 치마를 입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살이 좀 쪘나... 빼야겠는데, 생각하니 좀 슬퍼졌다.
"어, 잠깐만."
선배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아 끌더니 잠깐만 서보라고 했다. 그자리 그대로 멈춰 선 나는 멀뚱히 선배를 바라봤는데, 나를 마주보고 한 쪽 무릎을 꿇는 선배다.
신발끈 풀려서. 풀린 내 운동화끈을 보며 말한 선배가 능숙한 손길로 끈을 묶었다. 풀리지 않게 힘을 주어 매듭지은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차마 제가 묶을게요, 하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자리에 서서 정신없이 뛰기 시작한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선 선배는 치마 입었네, 오늘. 하면서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그대로 내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가 되어가고 있는 걸 느꼈다.
와.... 어쩜 이렇게 사람 심장을 폭격하시는지.... 나는 아, 네에.... 하는 바보같은 소리만 낸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선배를 따라갔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선배의 머릿결이 나풀거렸다. 치마 입었네. 오늘. 복잡하지도 않은 그 말에 붉게 물들어버린 내 얼굴에 애꿎은 부채질만 이어졌다.
- 오세요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
"아이스 바닐라라떼 두 잔에 따뜻한 모카 하나요!
휘핑 올라가요-"
"네에-"
아르바이트는 업무 강도로만 봤을 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힘들지만도 않았다. 아무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마음이 잘 맞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진영이는 여전히 쿨가이였고, 지성오빠는 붙임성이 좋아 은근히 손님을 잡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지성오빠를 보러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어가니 단골 쪽으로는 지성오빠가 꽉 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우리 사장님, 성운오빠는... '클라우디 에스프레소의 훈남 사장님'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으로, 동운대 학생들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톡톡히 했고.
덕분에 그들 사이에서 일하는 나는 뭇 여성손님들의 부러움을 샀다. 일할 땐 너무 바빠서 얼굴 보고 이야기할 시간조차 없었지만, 손님들 눈에는 그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느새부턴가 나는 클라우디 에스프레소의 홍일점 알바생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야! 오빠랑 당근케익 굽자-"
오늘은 구름이네에서 다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다.
클라우디 마감 후 나, 성운오빠, 지성오빠, 진영이는 물론 쉐어하우스 사람들까지 다 모여서 구름이네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진영이는 매장 한 켠에 노트북을 펼쳐두고 영화를 다운받고 있었고, 나와 성운오빠는 영화 볼 때 먹을 당근케익을 만들기로 했다.
그 안에서 지성오빠는 혹시나 들이닥칠 손님 파도를 대비하기 위해 긴장하고 있었고.
나는 당근, 중력분, 베이킹파우더 등 당근 케익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들을 계량해서 성운오빠가 만들기 쉽게 쭉 늘어놓았고,
성운오빠는 계란 풀기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차분하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혹시 오빠 없을 때 너도 만들어야 하니깐, 잘 봐둬-"
오빠가 하나씩, 하나씩 야무지게 뚝딱뚝딱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은 정말 못 하는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해하기 쉽게 중간중간 설명까지 덧붙여가며 케익을 만드는 모습에, 와... 우리 사장님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겼다.
정성스레 만든 반죽을 밥통에 붓고, 예열된 오븐 안에 밥통을 넣어 시간과 온도를 조절했다.
여기에서 30분 동안 익히다가, 이따가 젓가락으로 찔러보면 돼. 하는 성운오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진지한 얼굴을 풀고 슬며시 웃었다.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이렇게 멋있는 거구나, 새삼 깨달은 나는 와아, 멋있어요. 오빠. 하며 짝짝 박수를 쳤다. 오빠는 너도 다 할 수 있어. 하면서 내 팔을 툭 치고 계산대로 갔다.
"뭐 다운 받아?"
나는 매장 한 켠에서 노트북에 영화를 다운 받고 있는 진영이에게 갔다. 진영이는 <청년경찰>. 이라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아.... 하며 진영이 옆 자리에 걸터앉았다. 진영이는 누나 이거 봤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니. 안 본 것 같아. 하고 대답했다.
"형들 본 거 아니겠지?"
"글쎄.. 단톡방에 함 물어볼까?"
"근데 사람들 전부 안 본 영화를 어떻게 찾아요. 그냥 전 이거 볼래요."
진영이의 고민은 5초 이상 이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보통 그러한 고민의 지속여부는 마땅하고 정당한 근거 위에 결정되었다.
진영이의 말이 맞았다. 사람들 전부 안 본 영화를, 게다가 그 사람들의 대부분이 영화 보는 걸 싫어하지 않는 대학생이라는 전제 하에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진영이는 청년경찰의 다운로드 버튼을 클릭했다. 이어지는 다운로드 창을 본 진영이는 그제서야 나와 눈을 맞췄다.
"누나 당근케익 다 만들었어요?"
"오븐에 넣어놨어. 익히는 중이야.
성운오빠는 못 하는 게 없나 봐."
"여자를 못 만나죠."
"....아아...."
쿨하게 대답하는 진영이. 나는 멍청하게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진영이는 나 클라우디에서 일하면서 성운이형 연애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했다.
나는 진짜? 하고 물었고, 진영이는 네. 뭐 긴 시간은 아니지만... 별로 관심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손님들한테는 인기 많은데. 하며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가... 뭐 하여간, 와인이나 사러 갔다 오자."
케익에는 소주도, 맥주도 아닌 와인이 정답이라며 성운오빠는 우리에게 카드를 줬다. 나는 진영이와 함께 성운오빠가 적어준 와인 이름을 가지고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가면 이 이름인 와인이 있을 거야. 그거 하나 사오구, 너희 먹고 싶은 과자 몇 개 골라서 같이 사와. 하는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와인의 이름을 읽는 동안 진영이는 세상 시크하게 과자를 종류별로 몇 개 골라 담더니 가요, 누나. 하며 앞장섰다.
지성오빠와 함깨라면 30분은 족히 걸렸을 쇼핑이 진영이와 함께 하니 3분만에 끝났다. 귀찮은데 잘 됐지 뭐... 하면서도 새삼 진영이의 속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시 매장으로 돌아갔고, 당근케익은 잘 구워져 실온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와인은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과자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따로 빼두었다.
민현선배는 마감 시간이 다 되어 도서관을 나와 구름이네로 오고 있다고 카톡이 왔고, 옹성우와 다니엘은 각자의 저녁 약속을 마치고 들어와 매장 한 켠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매장에서 진영이, 지성오빠와 마감을 하는 동안 성운오빠는 저녁을 시원찮게 먹은 클라우디 스탭들을 위한 요리를 한다고 구름이네로 올라가 있었다.
정시에 마감을 마치고 문단속까지 단단히 해둔 우리는 구름이네로 향했다. 아, 피곤하다... 영화를 본다는 계획과는 별개로 슬슬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다들 조금씩이라두 맛만 봐봐-"
성운오빠는 간장계란볶음밥을 했다. 나와 진영이, 지성오빠는 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식탁에 모였고, 다니엘과 성우, 민현선배는 거실에 자리한 VR 게임기를 켰다.
어차피 영화보기 전까지는 밥 먹는 걸 기다려야 하니 그때까지만 게임 좀 하겠다는 거였다. 입주 파티 이후에 집에 사람이 이렇게 많고 시끄러운 건 처음이었다.
진영이는 지성이형 접시 좀 줘봐요. 하더니 볶음밥을 덜어주었고, 이어서 내 접시도 가져가 볶음밥을 덜었다.
지성오빠는 아이구, 우리 막내 다 컸네. 하면서 진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진영이는 애 아니거든요. 하고 제 입에 밥을 넣었다.
- 오세요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
"○○야, 일어나. 들어가서 자."
"...우으....."
유난히 피곤했던 게 잘못이었나. 영화 보기 직전에 볶음밥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었나.
눈을 떠보니 채 다 먹지도 못한 내 몫의 당근케익은 내 왼편에 곱게 놓여져 있고, 나는 머리를 성운오빠의 어깨에 기대어(라고 말하는 게 무색했던 이유는 너무.. 파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었다.
성운오빠는 조심스러운 손으로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성운오빠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곳에 두고 있던 내 얼굴을 들어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떴다.
지성오빠와 진영이는 집에 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고,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기겁을 하며 입을 가렸다. 번뜩 떠지는 눈은 보나마나 벌겋게 충혈되어 있을 거다.
"헐! 죄송해요 오빠!!!"
"...어...?"
"저 여기에서 이러고 잔 거예요?! 미쳤다. 죄송해요!!!"
나는 야단법석을 떨며 성운오빠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이야기했고, 성운오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아.. 어떡하지. 너무 피곤했나봐요. 죄송해요... 엄청 무거우셨겠다.. 하면서 울상을 지었다. 쪽팔린 건 둘째 치고 엄청 무거웠을 게 미안해서였다.
성운오빠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어어... 아냐.. 괜찮아... 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고, 나는 그게 내 실수에 대한 반응인가 싶어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자던데, ○○가. 성운이 어깨 거의 침대인 줄."
지성오빠가 놀리듯 말했고, 옆에서 진영이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나는 여전히 아... 너무 죄송해요 오빠... 하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성운오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을 들어 맨손세수를 했다. 나 때문에 화난 건가... 싶어서 나는 곧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형, 저희 들어가 볼게요. 내일 봴게요."
진영이와 지성오빠는 꼭 붙어서 얼굴에 웃음을 띄운 채 성운오빠를 향해 인사했다. 성운오빠는 여전히 조그마한 목소리로 어어, 들어가. 하고 답하는 게 전부였다.
우리를 제외한 사람들은 씻고 있거나 방에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잔 거야... 이 사람들이 다 일어날 정도였으면 시끄럽고도 남았을 텐데.
나는 민망하고, 쪽팔리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성운오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진짜 죄송해요... 그러려던 게 아닌데...."
"....아냐, 괜... 괜찮아."
평소답지 않게 말까지 버벅이는 성운오빠의 하얀 얼굴은, 어쩐지 좀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너무... 실수해서 그런 것 같아 더 미안해지는 마음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아아.. 나는 바보야. 피곤하면 차라리 들어가서 잘 걸.
혹시 이것 말고 또 다른 실수한 건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진영이에게 카톡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오빠 정말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너무 피곤했나 봐요... 했더니 아냐, 얼른 자. 들어가서 자. 하는 성운오빠.
나는 채 뒷정리를 도울 생각도 못하고 급한 마음에 방으로 들어와 배진영에게 카톡을 보냈다.
진영아 누나 뭐 실수한 거 없니... 하는 내 카톡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영의 답이 왔다.
[배진영: 누나 진짜 기억 안 나요?]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한 문장. 헐.... 나 어떡해, 또 실수한 거 있나봐. 망했어, 망했어. 미쳤어, ○○○.
어... 누나 기억이 안 나... 말해봐 뭔데ㅠㅠㅠㅠ 했더니 배진영에게 딱 한 마디가 왔다.
[배진영: 영화 시작하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해서 두 시간 내내 성운이형 어깨에 그러고 잠요]
[배진영: 성운이형이 누나 못 깨워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다 들어가고 나서도 30분 더 지나서 겨우 깨운 거예요]
[배진영: 성운이형 그렇게 당황한 거 처음 봤어요]
[배진영: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하성운 침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하성운 침대'를 끝으로 휴대폰을 침대에 던진 나는 이내 몸까지 침대로 던져 버렸다.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쥐고 침대를 쾅쾅 때렸다. 미쳤어, 미쳤다고. 왜 그랬냐고. 진짜.
당황했을 성운이오빠도 알겠고, 그 모습이 웃겼을 배진영과 지성오빠도 알겠는데,
당장 내일부터 성운오빠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너무 부끄럽고 그래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배진영: 성운이형 심쿵 좀 당한 모양이던데 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깐 저는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을게요]
[배진영: 화이팅 ㅎ]
지잉, 지잉, 두 번 울린 휴대폰 화면에 배진영의 마지막 카톡이 떴다.
아아... 돌아버리겠네. 나는 내가 만든 흑역사에 좀... 아니 사실은 많이...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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