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풀다가 모르면 무조건 3번이다?
수험표 있으면 영화 반값! CGV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시험 끝나고 꼭 연락 바람! 물론 오늘 수능도 잘 보고!
김여주, 답장 안 해도 괜찮으니까 보기만 해.
우리 꼭 만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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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7일. 유독 짙은 겨울 냄새가 났다. 숨을 토하면 지나간 자리에 하얀 그늘이 지는 계절이었다. 매서운 추위에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묻는다. 허나 이미 얼어버린 두 볼은 감각이 없다. 애초에 무엇 하나 성하지 않은 육체는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디뎠다.
[2017학년도 대학 수학 능력 시험, 33지구 제16 시험장]
현수막이 세차게 흔들렸다. 희망의 탈을 쓴 무리는 참혹한 얼굴들에 격려를 보냈다. 교실에 몸을 들이고 맨 처음 저지른 일은 반듯한 책상에 엎드려 습기 먹은 창가에 시선을 두는 것이었다. 이윽고 창밖은 쏟아질 듯한 눈을 보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너만큼은 날 위로해줘. 눈꽃을 따라 더부룩한 숨을 녹여낸다. 뭇 아이들도 나와 다를 바 없었다. 서서히 호흡을 되찾아 가는 시간, 감독관은 굵직한 봉투를 열어 마침내 준비를 알렸다. 빽빽한 큐브에 봉쇄된 아이들은 끝내 제물이 되어 의식을 치렀다.
오전 8시 40분.
비로소 갈망한 최후였다.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Chapter. 11.5 〈당신에게>
#46.
오전부터 쏟아진 눈발은 낮이 기울어지는 순간조차 눈물을 흘렸다. 퇴실을 알리는 교내 방송을 끝으로 아이들은 일제히 자리를 떠났다. 환호와 비명이 공존하는 세계에 까마득한 침묵이 도래한다. 쾌쾌한 교실 속 허무와 고독만이 남은 두 눈동자는 깊어 가는 겨울에 짧은 안녕을 고했다. 죽은 휴대폰은 안타까이 말이 없었다.
버스 터미널에 앉아 사람들의 흔적을 좇는다. 제각각 몸을 싣는 그들은 하나, 둘 형체를 잃어갔다. 출발이 지연된 어느 차량은 텅 빈 차고에서 하얀 불빛을 냈다. 느지막이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은 채 눈을 감는다. 노부부와 어린아이를 둔 여자가 전부인 버스는 수북한 눈꽃을 안고 도로를 달렸다. 코트에 찔러 넣은 손 마디가 시려 불면을 택한다. 늘 그랬듯 불가피한 자해였다.
어느 순간 불현듯 깬 의식이 주변을 찾는다. 정차한 버스는 문틈으로 거센 바람을 들였다. 앞 좌석 아이는 여자의 손을 잡고 버스를 나섰다. 마지막 승객의 하차는 그로부터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다. 머지않아 고꾸라진 한 떨기의 국화는 구석에 방치된 사진 앞에서 붉은 눈물을 삼켰다.
백색 리시안셔스를 품에 안은 열여섯의 은수가 웃는다. 국화를 보며 장난스레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아이를 상상한다. 목이 메어 한동안 숨을 참았다. 해를 거듭해도 시들지 않는 얼굴 앞에서 꾸역꾸역 참아내는 것이다. 결국 넌지시 틔우는 젖은 목소리는 곳곳에 가라앉아 침수했다.
은수야.
오늘 너랑 한 약속 지켰다. 네 말대로 ‘김여주’ 이름 박고 수능 보고 왔어. 진짜 별거 없는 하루라서 후기랍시고 말할 거리도 없는데, 단지 끝났을 땐 허무했고 네 앞에서 구구절절 쏟아내는 지금도 공허해. 아끼던 게 다 없어진 느낌이야. 네가 사라졌을 때처럼.
오늘은 재작년 겨울처럼 추웠고, 거리에 사람들도 많았고, 차도 꽤 막혔어. 네가 좋아하던 버스 정류장 포장마차 떡볶이도 그대로고 건너편 편의점도 그대로야. 아아, 편의점 상호는 변했는데 주인아저씨는 똑같아. 저번에 은수 잘 지내냐 물으시길래 트윅스 하나 샀어. 네가 매일 먹던 거 있잖아. 아저씨가 웃더라. 난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은수야.
새벽에 손목 그어서 병원 갔던 날 있잖아. 응, 눈 많이 오던 날. 그날 저녁에 화장실 가다가 잘생긴 쌤 봤다고 지랄하니까 네가 정신 차리라고, 미쳤냐고 울고불고 그랬던 거 기억나지.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 지훈이 사촌 형이었던 것 같아. 퇴원하기 전에 약 타면서 명찰 슬쩍 봤거든. ‘윤정한’이라고. 그때도 둥근 안경 쓰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이었거든. 지은수, 나 진짜 속없는 거 아는데 솔직히 너도 울다가 맞장구쳤잖아.
사실 그때 내 자살시도가 주제가 되는 게 싫어서 다른 말로 돌리고 싶었고, 너는 또 친구 아니랄까 봐 울면서도 그렇다고 맞장구쳤고. 그날의 넌 얼마나 가슴이 문드러졌을까.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은수야.
지훈이 있잖아. 승관이랑 엄청 친하다. 부승관 원래 아는 애는 많아도 친한 애는 별로 없잖아. 보통 다른 사람들은 승관이 낯가리는 거 잘 모르는데, 진짜 신기하게 지훈이만 안다. 자기도 낯 엄청 가리면서 승관이는 또 그렇게 챙긴다. 가만히 보면 둘이 형제 같아. 너도 같이 말 트면 무슨 뜻인지 알걸. 둘 다 귀여워서 네가 먼저 친구 먹자고 할지도 몰라. 아마 승관이는 본인이 제일 귀엽다면서 너한테 어필하겠지만. 그래도 넘어가면 안 된다. 아직 네 맘 제대로 못 전했으니까…….
은수야.
은수야…….
- “진짜 미안한데…… 너무 미안한데…….”
……
- “이젠 죽기 싫어…… 손목 긋기도 싫고 목매달기도 싫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은수야. 흐느끼는 울음을 따라 국화가 흔들린다. 질척이는 진흙은 침수된 바닥을 따라 흩어졌다. 죽음을 갈망하던 이는 처절히 빌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지훈이랑 같이 있고 싶어. 미안해 은수야. 미안해.
- “……미안해.”
언덕 아래 하얀 불빛을 따라 내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눈밭에 바퀴 자국을 새기던 버스에 가까스로 몸을 싣는다. 기력 없는 두 다리가 바닥에 주저 앉는다. 두 손에 움켜 쥔 목도리를 품에 안고 기꺼이 낙루하는 파편들을 위로했다.
국화는 은수의 머리맡을 지켰다.
Epilogue.
푸른 새벽, 아파트 현관을 향해 발을 구를 때, 자동문을 따라 덩달아 움직이는 상대방의 하얀 운동화가 있었다.
추운데 목도리도 안 했어. 시험 보는데 감기 걸리면 그것도 골치야. 그가 두터운 목도리를 벗어 내게 매듭을 짓는다. 긴 시간의 기다림을 말해 주듯, 분홍 가지는 마디가 얼어 붉은 매화를 달았다. 하얀 그늘이 흩어지는 짙은 새벽, 그는 제 코트 속에 품은 가디건을 건넸다.
- “입고 다시 돌려줘.”
- “…….”
- “이거 약속이고 꼭 지켜야 돼.”
- “…….”
- “기다린다.”
약속의 증표가 되지 못한 새끼손가락이 문드러진다.
소복한 눈밭을 걷는 그림자는 때때로 날 향해 몇 번이고 뒤를 돌았다.
지훈이 목도리.
지훈이 가디건.
지훈이.
지훈이.
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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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잠자리가 편안해요 하핳 12화 완결로 찾아뵐게요. 늘 고맙습니다. |